청호 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한창기. 들어본 듯한 이름이다. 네이버나 다음에서 찾아보면 출판인으로 나온다.

1970년대 지식인들이 많이 보던 월간 <뿌리깊은 나무>와 폐간 후 80년대 재발행한 <샘이 깊은 물>의 발행인이자 편집인이었다.

‘태백산맥’의 조정래처럼 고향 전라남도 보성이 고향이다. 순천시 초입에 아직도 옛 모습을

▲ 남영진 논설고문

보존하고 있는 낙안읍성 입구에 순천시립 ‘뿌리깊은 나무 박물관’이 있는데 2년 전 방문한 적이 있다. 여기에 한씨가 모은 우리 전통생활용구 600여점이 전시되어 있다.

한씨는 전국 수재들의 집합소인 서울대 법대를 들어가서 고시공부를 하지 않고 1963년 졸업하자마자 영국의 백과사전인 ‘엔사이클로피디어 브리태니커’ 서적 외판사원으로 들어갔다.

박정희 집권후 서울에는 경제개발붐으로 성북동 평창동 동교동 서교동 등 소위 도둑촌의 ‘졸부’들이 양식 호화주택을 많이 짓기 시작했다. 2층 양옥의 서재엔 대개 정음사의 ‘세계문학전집’과 ‘브리태니카 백과사전’ 전집이 들어앉았다.

그는 열심히 외판 ‘세일즈맨’으로 성공신화를 만들면서 돈을 벌어 5년만인 68년 같은 이름의 한국회사를 설립해 대표를 맡았다. 한창기는 회사설립 8년만에 드디어 <뿌리깊은 나무>를 만든다. 서적외판원에서 잡지발행인이 된 것이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한글전용과 가로쓰기를 앞세운 월간지 <뿌리깊은 나무>는 우리 전통문화와 아직도 남아있는 전국의 토박이 생활문화를 소개해 나갔다. 한 때 정기 구독자가 6만5000명에 달할 정도로 지식인들에게 인기가 있었으나 80년 전두환의 신군부에 의해 폐간됐다.

이 한창기가 사후 20년만에 서울 한복판 서울시청 지하1층에 나타났다. 지난 18일부터 30일까지 시민청 갤러리에서 열리는 ‘한창기 선생 20주기 추모 전시회’(행사위원장 김명곤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제목이 ‘뿌리깊은 나무의 미래를 연다’이다. 잡지 외에도 <한국의 발견>9도 시리즈와 판소리전집, 반상기 등이 전시돼 전통문화를 살려내려 애썼던 한창기의 뜻을 기리고 있다.

남도전통문화연구소(대표 한광석)가 주최하고 한국인티브이(TV) 이두엽 대표가 기획위원장을 맡았다. 한광석 대표는 한창기의 조카로 유명한 쪽염색의 ‘명장’이다.

▲ '뿌리깊은 나무의 미래' 전시회 포스터/남도전통문화연구소 제공

이 대표는 KBS 피디시절 전두환 정권의 정치물 제작 압력을 버티다 사표를 내고 방송제작회사 대표 등으로 일했고 최근 ‘뿌리깊은 나무 문화운동’의 거점으로 인터넷 방송인 ‘한국인티브이’를 만들었다. 그는 옛날 한창기와 봄철마다 떠났던 여행팀원이었고 <샘이 깊은 물> 필자였다.

전시장 입구의 안내 팸플릿에는 ‘한창기야! 한창기야!-사망 스무돌에 새삼 그리운 이름 한창기. 도대체 그가 누구길래, 이 숨가쁜 시대에 무슨 의미가 있길래?’라는 글이 실렸다.

<뿌리깊은 나무> 초대 편집장이었던 윤구병 보리출판사 대표의 글이다. 윤씨는 충북대 철학과 교수를 하다 전북 부안으로 낙향, 농사를 지으면서 대안교육을 하는 ‘변산교육공동체’를 설립한 장본인이다.

이 잡지사 기자였던 참여정부시절 문화부 장관을 지낸 김명곤씨와 역시 이 잡지 기자였던 ‘아침산책’의 고도원, 현재 명상센터 ‘깊은산속 옹달샘’ 이사장 등의 회고가 실려있다. 이두엽 대표는 이번 행사를 “한창기 정신을 되살리고 있는 ‘뿌리깊은 나무 문화운동’의 출발점으로 삼겠다”고 했다. 바닥까지 떨어진 사회, 돈과 권력 가진 자들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우리 사회를 밑에서부터 바꾸자는 운동이다.

▲ 지난 2011년 11월 21일 전남 순천시 낙안면에서 '순천시립 뿌리깊은 나무박물관' 개관식에서 참석자들이 테이프커팅을 하고 있다. 이 박물관은 고(故) 한창기 선생이 모아둔 6500여점의 유물 가운데 800여 점을 전시하고 있다./순천시청=뉴시스 제공

그래서 ‘뿌리깊은 나무 문화운동’은 첫번째 과제를 “반말 없는 사회”로 설정했다. 그는 “우리말 쓰임새가 너무 험악해져 한창기가 실천했던 ‘님’자 붙여 부르기부터 시작합니다”라며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도 통하는 이 정신은 신분, 성별, 나이를 떠나 누구든 ‘섬김의 마음’으로 대하자는 우리 문화의 근본을 지키는 첫걸음”이라고 설명했다.

그 다음 과제는 무한 경쟁의 교육과정 개편과 교육혁명. 인간에 대한 예의와 생명에 대한 고마움을 가르치는 참다운 교육과, 공동체의 아름다움을 실천하는 일이다. 세번째 과제는 탁월한 치유효과가 있는 우리 문화를 통한 치유사업. 우리 춤과 소리, 가락, 전통놀이로 전국에 우리 문화 치유학교를 만들겠다는 복안이다.

군사독재시절 우리문화의 뿌리를 찾던 한창기의 정신이 사후 20년만에 그를 기리는 문화운동가들에 의해 서울한복판에서 다시 시작됐다. 한창기님이 심은 ‘뿌리깊은 나무‘가 40년 동안 조용히 뿌리를 내려 ‘님’자 붙이기 운동에서부터 반말없는 사회까지 무성하게 뻗기를 기대해본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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