롯데그룹이 3일 창립 50주년을 맞았다.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은 이날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린 '롯데 창립 50주년 기념식'에서 "상상을 뛰어넘는 혁신으로 신 사업기회를 모색하고, 세계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경쟁력을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신 회장은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면서 대한민국에서 새로운 산업을 시작하고 외환위기 및 글로벌 금융위기를 이겨낸 경험 등을 이야기했다.

롯데 50년은 신 회장의 아버지 신격호 총괄회장(95)이 일제강점기 일본 유학중 소규모 식품업으로 출발했다.

신 총괄회장은 한일 양국에 걸쳐 식품·유통·관광·석유화학 분야의 대기업을 일궈낸 자수성가형 기업가이다.

일본에서 창업한 신격호 총괄회장은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시작으로 호텔롯데, 롯데쇼핑, 호남석유화학 등을 잇달아 창업하거나 인수하면서 롯데그룹을 재계 5위의 대기업으로 만들었다.

특히 그의 숙원사업인 롯데월드타워는 1987년 첫 사업지 선정 이후 30년만인 이날 공식적으로 문을 열었다. 한국의 대표적인 랜드마크, 롯데월드타워의 시작점에는 빌린 돈 5만엔으로 사업을 일으킨 그의 경영신화가 있다. 롯데그룹의 자료를 토대로 신 총괄회장이 이끈 롯데그룹 창년 50년을 정리한다.

◇ 롯데 창업… 첫 사업은 ‘폭격으로 잿더미’

신 총괄회장은 1922년 10월 4일 울산시 삼남면 둔기리에서 5남 5녀의 맏이로 태어났다. 만 스무살의 청년 신격호는 1942년 부산과 일본 시모노세키(下關)를 연결하는 관부(關釜) 연락선을 타고 도일해 신문과 우유배달 등으로 고학생활을 시작했다.

▲ 신격호 롯데 총괄회장의 젊은 시절 모습/롯데그룹 제공

외지에서 문학도의 꿈을 키우던 청년 신격호는 ‘조선인’이라는 불리한 여건을 성실과 신용으로 극복했다. 평소 그의 성실성을 눈여겨 본 한 일본인 투자자의 출자로 1944년 커팅오일(절삭유)을 제조하는 공장을 세움으로써 기업 경영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딛게 된다.

당시 그는 2차대전의 소용돌이 속에서 숱한 시련을 겪으면서도 뛰어난 안목, 신용과 성실성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도전, 오늘날의 롯데 신화를 창조해 냈다. 신용에 관한 그의 일화는 생생하다.

우유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배달시간이 워낙 정확해 유명했다고 한다. 소문이 나다보니 주문이 늘어나 배달시간을 못 맞추게 되자 배달 시간을 정확히 맞추기 위해 아르바이트가 아르바이트를 고용하기도 했다.

이를 지켜본 '하나미쓰'라는 일본인이 사업을 제의하며 당시 돈 5만엔을 선뜻 내주었다. 이 돈으로 첫 사업을 시작했는데, 미군기의 폭격으로 공장을 가동해 보지도 못하고 전소되고 만다. 어렵게 재기를 했으나 다시 폭격을 당해 전소돼 버렸다. 그래도 하나미쓰의 신 총괄회장에 대한 신뢰는 변함이 없었다고 한다. 신 총괄회장은 이후 재기에 성공해 1년 반 만에 이 돈을 모두 갚고 고마움의 표시로 하나미쓰에게 따로 집을 한 채 사주었다.

◇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롯데의 탄생’

일본 와세다 대학에서 고학했던 청년 신격호는 첫 사업 실패의 시련을 겪지만 허물어진 군수공장에서 비누를 만들어내면서 진정한 사업가의 길에 들어선다. 워낙 물자가 부족한 시절이라 1년도 채 안돼 적지 않은 돈이 들어온다.

사업가 신격호의 타고난 재능이 빛을 발하기 시작한 건 바로 이때부터다. 미군이 일본에 주둔하자 껌은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신격호도 타고난 사업 감각을 발휘해 껌 사업에 뛰어든다. 껌이라면 없어서 못 팔던 시절이라 큰 돈을 번다. 그는 드디어 자본금 100만엔, 종업원 10명의 법인사업체를 만들게 됐고, 이때 회사이름 '롯데'가 탄생한다.

문학에 심취했던 청년 신격호는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의 여주인공 이름(샤롯데)에서 롯데라는 이름을 따온다. 그의 감수성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 마케팅의 귀재…‘장난감으로 변한 껌’

서구문명의 상징 껌에 일본 성인들은 비난을 퍼부었지만 그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일본에서 껌의 핵심 타깃은 바로 어린이라는 점을 꿰뚫고 있었다.

롯데는 풍선껌 사업을 강화해 아예 풍선껌을 작은 대나무 대롱 끝에 대고 불 수 있도록 함께 포장했다. 당시에는 변변한 장난감이 없던 터라 롯데의 풍선껌은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갔다.

껌이라는 상품자체가 식품이라기보다는 심심한 입을 즐겁게 해주는 장난감이라는 제품의 핵심가치를 간파한 것이다.

이벤트와 미디어로 소비자의 눈길을 끌어당긴 점도 빼놓을 수 없다. 껌 포장 안에 추첨권을 놓고 당첨된 사람에게 1천만엔을 준다는 광고를 내놓기도 했다.

이 같은 천재적 마케팅 감각은 경영학 강의와 교재에서 도움을 받았다기보다는 그의 감수성과 창의성에서 나온 것이다.

1961년 그는 일본 가정에서 손님 접대용 센베이가 초콜릿으로 대체될 기미가 보이자 초콜릿 생산을 결단한다. 초콜릿 산업은 과자 사업 중에서는 중공업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만큼 제조방법이 까다롭다는 얘기다.

그는 유럽에서 최고의 기술자와 시설을 들여오면서 초콜릿 시장을 장악하고 이것이 롯데가 종합메이커로 부상하는 밑거름이 된다. 이후 롯데는 캔디, 비스킷, 아이스크림, 청량음료 부문에도 진출해 성공을 거듭한다.

◇ 고국투자…현해탄 경영의 시작

"새롭게 한국 롯데 사장직을 맡게 되었사오나 조국을 장시일 떠나 있었던 관계로 서투른 점도 허다할 줄 생각되지만 소생은 성심성의, 가진 역량을 경주하겠습니다. 소생의 기업 이념은 품질본위와 노사협조로 기업을 통하여 사회와 국가에 봉사하는 것입니다." (1967년 한국 롯데제과 설립 당시 신격호 롯데회장 인사말)

신 총괄회장은 기업보국(企業報國)이라는 기치 아래 폐허의 조국 어린이들에게 풍요로운 꿈을 심어주기 위한 계획을 짰다. 해 한·일 수교 이후 한국에 대한 투자의 길이 열리자, 1967년 롯데제과를 설립해 모국투자를 시작했다.

▲ 롯데그룹 창립 50주년을 맞은 3일 국내 최고 높이 건물(123층·555m)인 롯데월드타워 그랜드 오픈식이 올림픽로 롯데월드타워에서 열렸다. 개장을 축하하는 풍선이 하늘로 날려지고 있다./뉴시스

롯데그룹은 1970년대에 롯데제과에 롯데칠성음료와 롯데삼강으로 국내 최대 식품기업으로 발전했으며 호텔롯데와 롯데쇼핑을 설립해 당시에 불모지나 다름없던 국내 유통·관광 산업의 현대화 토대를 구축했다. 또 호남석유화학과 롯데건설 등으로 국가 기간산업에도 본격 진출했다.

1973년 당시 동양 최대의 초특급 호텔인 롯데호텔이 문을 열었다. 지하 3층, 지상 38층의 고층 빌딩으로 1000여 객실을 갖춘 롯데호텔 건설에는 6년여 기간 동안 경부고속도로 건설비에 버금가는 1억5000만 달러가 투자됐다.

호텔사업 구상은 대단한 모험이었다. 당시에는 산업기반이 취약한 데다 국내에 외국 손님을 불러올 국제 수준의 관광 상품도 개발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관광업 자체의 민간투자가 저조한 데다 산업정책의 우선순위에서 뒤로 밀려 거의 불모지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부존자원이 빈약한 우리나라는 기필코 관광입국을 이루어야 한다는 게 그의 신념이었다. 이후 롯데호텔은 2010년 러시아 모스크바에 한국 호텔로는 처음으로 해외 체인을 오픈할 만큼 성장했다.

◇ 롯데쇼핑의 탄생

우리 정부는 1970년대 후반 제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을 진행했다. 국민소득이 향상되면서 자연스레 소비 욕구와 구매 패턴이 다양해졌지만, 유통업을 대표하는 백화점의 수준은 선진국에 비해 떨어졌다.

1970년대 우리나라 백화점은 대부분 영세하고 운영방식이 근대화 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격호 총괄회장은 백화점 사업에 도전하게 된다.

롯데쇼핑센터(현 롯데백화점 본점) 건립공사는 1976년 시작해 1979년 12월에 완료됐다. 규모는 연면적 2만7438㎡, 영업면적 1만9835㎡에 지하1층, 지상 7층에 이르렀다. 이는 기존 백화점의 2~3배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롯데쇼핑센터는 우리나라 1위 백화점의 위치를 지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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