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일본은 19세기 중엽까지도 천황 위에 쇼군이 군림하는 봉건 체제 하에서 쇄국을 고집하며 군사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답보를 면치 못하는 신세였다.

그런 상황에서 국정농단의 주역 막부 체제를 일거에 무너뜨리며 메이지(明治) 유신의 단초를 마련한 계기가 사쓰마·조슈 밀약(또는 사쓰조 동맹)이다.

▲ 김선태 편집위원

이 드라마틱한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이 오늘날 일본인들이 무사(武士·사무라이)의 정신이라 추앙하는 존재, 시바 료타로의 대작소설도 널리 알려진 사카모토 료마다.

역사 발전에 대한 견고한 확신 속에 철벽 같은 정치적 난제를 뚫어낸 료마의 헌신적인 열정은 지금 우리 현실에도 귀감이 될 듯하다.

쇼군 탄핵에 앞장선 하급 무사

1853년 7월, 미국은 대형 전함 4척을 일본 우라가(浦賀) 앞바다에 정박시킨 채 위압적으로 개항을 요구했다. 압도적인 화력 앞에 일본 도쿠가와(德川) 막부(幕府)는 미국과 이른바 가나가와(神奈川) 조약을 체결하며 굴복하는데, 이 일로 일본 전역의 사무라이들이 쇼군(將軍·막부의 최고권력자) 탄핵을 요구하며 일어서게 된다.

이들이 공통적으로 내세운 표어가 존왕양이(尊王攘夷), 즉 무능하고 부패한 막부 체제를 끝장 내고 천황을 중심으로 체제를 개혁하자는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이를 실행할 주체가 마땅하지 않았으니, “일본 전통체제의 이중적이고 묘한 성격”이 문제였다.

일본의 명목상 최고 통치자는 천황(天皇·덴노)이지만 그 실권이 없어진 지 오래, 실질적인 통치권자는 1185년 이래 거의 700년간 이어져 온 막부의 쇼군이었다. 쇼군은 한편 형식적으로 천황을 떠받들면서 다른 한편 지방 호족인 쿠니(國·막부시대의 지방조직중 하나) 또는 번(藩·도쿠카와 막부시대, 다이묘의 영지)들을 이끌며 권력을 유지해 왔다.

▲ 『세계사를 바꾼 담판의 역사』 = 함규진, 휴먼앤북스, 2016. 11. 25.『료마가 간다 1~8』 = 시바 료타로, 동서문화사, 2011. 12.

가나가와 조약 당시 다수 번 가운데 가장 세력이 컸던 사쓰마(薩摩) 번과 서너 번 째 지위를 유지했던 조슈(長州)번이 개혁적인 입장을 공공연히 내세웠지만 결정적인 한 방을 갖추지 못해 어정쩡한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게다가 조슈 번이 막부에 대들었다 만신창이가 되는 과정에서 사쓰마 번이 오히려 막부 편을 드는 통에 양대 번이 대립할 지경에 이른다. 온건 노선의 사쓰마가 과격한 조슈와 거리를 둠으로써 쇼군이 어부지리를 얻은 이 상황을 저자는 아래와 같이 설명한다.

- 막부의 위신이 땅에 떨어졌다지만, 모든 번이 존왕양이에 동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소속 사무라이들은 존왕양이여도 번주를 맡고 있는 다이묘는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고, (…) 도쿠가와 막부가 세워질 때 ‘동군’과 ‘서군’으로 친 도쿠가와파와 친 히데요시파가 갈려 쟁패전을 벌였듯, 2백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런 대립구도가 불거지고 있었다.

서로가 양보해 ‘반걸음 앞으로’

모두가 쇼군 탄핵은 물 건너 갔다고 생각하던 1864년 무렵, 이렇다 할 명망도 없던 하급 무사 사카모토 료마가 혈혈단신으로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의 중재에 뛰어들었다. 그는 약체에 속하는 도사(土佐) 번 출신이지만 사실상 번을 탈퇴한 지 오래고 따지고 보면 일개 사업가 신분으로 동분서주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료마는 일본이 근대 국가로 나아가려면 그 최대의 걸림돌인 막부 체제를 한시라도 빨리 무너뜨려야 한다는 것, 이를 가능케 하려면 오직 사쓰마와 조슈 두 번이 힘을 합치는 길 밖에 없다는 것, 이 점을 누구보다 분명히 인지하고 있었다.

이에 료마는 우여곡절 끝에 사쓰마 번의 책사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조슈 번의 대표 가쓰라 고고로(桂小五郎)를 만나 양대 번의 동맹을 역설하게 된다.

사쓰마와 조슈 두 번 사이에 쌓인 앙금을 털어내는 데 걸린 시간이 무려 2년여. 료마의 열정과 확신에 찬 논리가 마침내 양측의 합의를 이끌어냈으니, 이를 바탕으로 1867년 1월 21일 사쓰마 조슈 밀약이 성사된다. 당시 료마의 핵심 주장을 저자는 ‘반걸음 앞으로’라는 말로 요약하는데 내용은 이렇다.

존왕과 양이라는 두 가지 목표 모두 합의할 수 없다면 먼저 존왕(즉 막부 반대)에 합의한다. 다음으로 막부에 대한 공동 공격에 합의할 수 없다면 조슈 번이 공격에 나서는 동안 사쓰마 번은 수도에 군대를 주둔시켜 쇼군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이 밀약에 따라 조슈는 교토로 출병하고, 막부군은 사쓰마 수비군으로 인해 병력을 집중시키지 못한 탓에 조슈에 패배하고 말았다. 그 결과 1867년 10월 14일 몰락한 쇼군이 권력을 천황에게 반환하는 ‘대정봉환(大政奉還)’이 일어나니 이것이 메이지 유신의 시발점이다. 막부의 위협을 걱정하는 주변 사람들에게 “사람이 인생을 사는 데 있어서 자기가 세운 한 뜻을 이룰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치 않은가?” 하며 반문했던 사카모토 료마는 그로부터 1개월 뒤 자객들의 피습을 받아 33세의 짧은 생을 마감했다.

국내 정세는 최순실의 국정농단 실태가 점입가경에 접어들고 박근혜 전 대통령의 무능과 부패가 만천하에 드러나면서 분노한 촛불 집회가 매주 이어졌으며, 결국 헌법재판소에서 대통령 파면이라는 결정을 내놓았다.

권력 핵심부로부터 전대미문의 비리와 범죄 혐의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터져 나오고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수사 결과 등에 따라 정국은 언제라도 격랑에 휩쓸릴 분위기다.

냉정하게 따져 보면 1여2야, 대권 경쟁, 복잡한 수사와 재판 과정 등으로 표현되듯 현실의 상황은 조금도 녹록하지 않다. 만일 이 와중에 국민의 뜻을 대변한다고 자처하는 여러 정치 세력이 제 각각의 셈법에 따라 이합집산을 거듭한다면 반동의 물결은 언제라도 재개될 수 있다.

수십 년 누적되어 온 적폐를 뿌리뽑고 민주주의를 제대로 꽃피우는 데 이만한 기회가 다시 오기 힘들 것이다. 이럴 때 “권력은 오직 국민에게만 귀속”된다는 명제 아래 여야 정치 세력이 각자의 오만과 아집, 속단을 버리고 ‘국정농단 종식, 민주주의 회복’ 이라는 국민적 열망에 부응하려 서로 머리를 맞댈 때, 난국을 타개할 신의 한 수가 그로부터 나올 것이다. 그것이 우리 국민들이 생각하는 바이고 염원하는 바가 아닐까.

※ 김선태 주간은 서울대 독어교육학과를 졸업한 뒤 ㈜북토피아 이사, 전 내일이비즈 대표를 역임하는 등 오랫동안 출판업계에 종사해 왔습니다. 현재 휴먼앤북스 출판사 주간과 (사)지역인문자원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맡고 있습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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