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전자산업의 자존심 구기는 일대 사건

[이코노뉴스=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일본 도시바(東芝)의 메모리 반도체 사업 인수전은 점입가경의 양상을 띠고 있다. 도시바에 군침을 흘리는 인수 후보와 업체 간 제휴설이 무성하다. 인수 후보들 사이의 다양한 합종연횡 시나리오에 대한 관측도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반도체 사업 인수전에는 여러 변수가 작용할 전망이다. 특히 일본 내 여론

▲ 이동준 교수

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종업원이 19만 명이나 되는 거대기업 도시바의 고용 승계나 거래처 문제도 심각하지만, 반도체 사업 매각은 일본 제조업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문제이기도 하다.

도시바가 어떤 기업인가. 140년 역사의 도시바는 소니와 함께 ‘일본 전자산업의 자존심’ 그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자선풍기(1894), 냉장고 및 세탁기(1930), 자동전기밥솥(1955), 컬러TV(1960) 등 일본 최초 제품을 수없이 많이 선보였고 내면 불투명 전구(1925), 노트북컴퓨터(1985), 낸드플래시 메모리(1987) 등 세계 최초 제품도 쏟아냈다.

이런 회사를 매물로 내놓은 것이다. 도시바 반도체 사업이 해외로 매각되면 일본에는 반도체를 제조하는 기업이 사라지게 된다. 반도체 종주국을 자처해온 일본으로선 자존심을 구기는 일대 사건인 것이다.

더욱이 반도체는 '산업의 쌀'이라 불린다. 가전제품과 IT(정보기술) 기기는 물론 자동차 등에도 필수적이다. 특히 모든 것이 연결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를 맞아 반도체의 가치는 점점 배증되는 추세다.

이를 감안했기 때문일까.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일본 관방장관은 “(도시바의) 플래시메모리와 원자력 발전 사업은 일본의 성장 전략에 매우 중요한 분야”라면서 “상황을 예의주시하겠다”고 밝혔다. 도시바 반도체 사업이 매각되더라도 국익을 침해할 여지를 최대한 줄이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이 때문에 한국의 SK하이닉스나 중국과 대만 대신 미국 기업, 그 중에서도 자금력이 뛰어난 애플과 같은 곳을 끌어들일 것이라는 시나리오도 거론된다.

하지만 반도체 사업 매각만으로 도시바의 위기가 수습될 것 같지는 않다. 몰락의 단초를 제공한 미국 원자력 발전 사업에서 날이 갈수록 천문학적인 추가 손실이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도시바는 지난달 14일 미국 원자력 발전 사업에서 손실 처리할 금액을 7,125억 엔(약 7조2,000억 원)으로 추산했다. 하지만 손실 규모, 회생 방안을 둘러싸고 감사법인, 변호사 간에 이견이 많아 결산 발표를 더 늦출 수 있다는 관측마저 솔솔 나온다.

도시바의 가치에 대한 논란도 나온다. 시장조사업체 IHS에 따르면 지난해 낸드플래시 시장은 삼성전자가 점유율 35.4%로 1위를 굳힌 가운데 도시바(19.6%), 웨스턴디지털(15.4%), 마이크론테크놀로지(11.9%), SK하이닉스(10.1%)가 각각 분점하고 있다.

삼성전자를 추격하는 후발 주자들이 도시바를 차지하면 삼성전자와 자웅을 겨룰 정도로 지배력을 늘릴 수 있는 구도라는 해석도 있지만, 반도체 업계에서는 이를 두고 "1+1이 2가 안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두 회사의 합병 후 점유율이 합병 전 각 회사의 점유율을 더한 수치를 밑돌 수 있다는 지적이다. 예를 들어 2013년 미국 마이크론이 일본 D램 업체 엘피다를 인수합병(M&A)한 후에도 마이크론의 점유율은 선두권이 아니다.

특히 현재 낸드플래시 시장의 절대 강자는 삼성전자인데, 어느 회사인들 합병한다고 해도 기술 수준이 당장 삼성전자급으로 올라간다는 보장은 없다.

▲ 주형환 산업통상자원부 장관이 지난 1월 25일 경기도 이천 SK하이닉스 이천공장을 방문해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산업통상자원부 제공

독보적인 기술력과 고성능 제품을 보유한 업체에 주문과 수익이 몰린다는 점을 고려하면 양사의 합병 시너지는 기대보다 작을 수 있다.

그룹 해체 위기에 빠진 도시바는 반도체뿐 아니라 미국 원전 업체인 웨스팅하우스의 지배지분마저 팔고 영국에 새로운 원전을 지을 계획인 컨소시엄 누젠(NuGen)의 60% 지분도 줄이기로 했다. 이들 지분을 인수할 가능성이 있는 잠재 후보로 한국전력도 거론된다.

일부 외신은 한전이 미국 등 서방 국가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웨스팅하우스 인수 후보일 수 있다고 예상했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는 5일(현지시간) “일본의 미쓰비시나 히타치는 투자를 꺼리고 있고 미국의 제너럴일렉트릭(GE)과 프랑스 회사 EDF도 관심이 없다"면서 ”한전이 도시바 자회사인 웨스팅하우스 인수 후보자로 떠올랐다”고 보도했다.

FT는 "한국 정부가 2009년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수주 이후 8년 만에 해외 원전 시장 진출을 모색하고 있으며 최근 세계 원전 시장에서 활발히 움직이는 러시아와 중국은 미국이 안보상 이유로 꺼릴 수 있다"고 설명했다. 도시바의 운명이 SK하이닉스나 한전 등 한국 기업의 움직임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는 상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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