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필리핀 마닐라=남영진 논설고문]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추진해온 ‘마약과의 전쟁’에 대해 가톨릭 교회를 비롯한 민주주의자들이 취임 7개월 만에 반발하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인 25일 마닐라에서 '마약과의 전쟁'에 항의하는 3천여 명이 참가한 대규모 도심 시위가 열렸다. 이날은 87년 독재자 베르디난도 마르코스 대통령을 몰아낸 ‘피플파워’ 30주년이었기 때문에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실감케 했다.

▲ 남영진 논설고문

강력한 마약전쟁중 현장범을 체포없이 살해하는 정책으로 ‘다바오의 도살자’ ‘필리핀의 트럼프’ 등으로 불려온 두테르테가 자신을 비판해 온 여성 의원을 불법 마약 거래 혐의로 체포한데 대한 항의시위다.

필리핀 경찰이 ‘마약과의 전쟁’에서 증거 조작, 뇌물 수수, 보고서를 날조하고 있는데 대한 항의다. 이 전쟁에서 성과를 올리기 위해 경찰에 성과급을 지급해 범인을 체포하기보다 살해하도록 조장하고 있다는 주장도 나온다. 심지어 경찰이 인건비를 주고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하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시위대들은 두테르테 대통령이 지난해 취임 직후 시작한 마약과의 전쟁을 1970년대 마르코스 독재 시대의 부활로 비판했다. 마르코스 독재에 항거해 2년간 투옥됐던 극작가 보니파시오 일라간은 이날 아침 2천명이 넘는 시위대를 이끌었다.

그는 외국 통신과의 인터뷰에서 “경찰이 마약사범을 체포하기보다 살해하고 있다”며 "다시 부상하는 파시즘에 대해 시민들에게 경고하고자 모였다"고 말했다.

바로 전임 대통령이었던 베니그노 아키노도 이날 반대시위에 참가했다. 아키노 전 대통령은 항의 표시의 검정 상의를 입고 나와 시위대 앞에서 바로 전날인 24일 마약 거래 혐의로 당국에 체포된 레일라 데 리마 상원의원에 대한 정부 처사를 비판했다.

아키노 전 대통령은 “신임 정부를 불안정하게 만들려 하고 있다”는 두테르테 대통령 대변인의 비판에 대해 "우리는 이 정부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라며 반박했다. 데 리마 의원은 아키노 전 대통령 집권기에 법무장관을 지낸 인물이다.

한편 이날 두테르테 대통령을 지지하는 청년들의 맞불 집회도 열려 수백 명의 지지자들은 마닐라의 한 공원에 모여 철야 모임을 가졌다.

이들은 평화에는 '네'를, 불안정에는 '아니오'라고 적힌 배너를 들고 있었다. 우리의 박근혜대통령 탄핵을 촉구하는 광화문 촛불시위에 대한문 앞에서 탄핵반대를 외치는 태극기 시위를 연상케 하는 대목이다. 우리의 87년 6월 항쟁 승리 후 필리핀에서도 ‘피플 파워’가 승리한 바 있다.

이 시위의 추이에 필리핀 주재 한국인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한국인들이 자주 살해당하고 지난해 10월에는 사업가 지모씨(53)가 경찰들에게 납치돼 경찰청사 안에서 살해됐기 때문이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지씨의 부인을 직접 만나 사과했지만 그는 앞으로 필리핀에서 준동하고 있는 한국인 조폭들도 마약에 개입되면 즉시 살해하겠다고 은근히 책임을 조폭들에게 돌리는 듯한 발언을 했다.

▲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초법적인 마약사범 처단에 항의하는 시위대가 지난해 8월 26일 마닐라의 필리핀 경찰청 앞에서 '처형을 중단하라'고 쓰인 표지판을 내걸고 시체로 분장한 채 누워 시위를 벌이고 있다.[마닐라=AP/뉴시스 자료사진]

델라 로사 필리핀 경찰청장은 기자회견에서 마약단속국 소속 경찰 4명이 포함된 납치범들이 지씨를 차량에 태워 경찰청 내 마약단속국 건물 옆 주차장에서 살해했다고 털어왔다.

당시 한국대사관 관계자는 “경찰청 본부에서 목을 졸라서 죽였다고 주범이 자백했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지씨는 지난해 10월 필리핀 중부 앙헬레스 시의 자택 근처에서 8인조에게 납치돼 사건 당일 숨졌다. 납치범들은 범행 2주일 뒤에 지씨 가족에게 몸값을 요구해 500만 페소, 우리 돈 1억2천여만 원을 받아 챙겼다.

지난 5년간 해외에서 살해된 110여명의 한국인중 국가별로는 필리핀이 전체 피해자의 29.3%인 48명으로 가장 많았고 이어 미국(21명), 중남미(19명), 중국(13명), 일본(10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특히 지난해 필리핀에서 살해된 우리나라 국민은 총 9명으로 전체 피해자(19명)의 47.4%를 차지했다. 필리핀에서 살해된 한국인 비율은 2012년 18.2%서 2015년 29.7%, 지난해는 47.4%로 급증하고 있다.

국제 사회의 비판도 높아지고 있다. 국제 인권단체인 국제앰네스티의 ‘필리핀 인권보고서’가 대표적이다. 올해 초 발표된 필리핀 보고서 <“가난하면 죽는다”: 필리핀의 ‘마약과의 전쟁’에서 벌어지는 초법적 처형>은 필리핀 경찰이 정부 수뇌부의 지시로 마약범죄 용의자 수천 명을 직접 또는 청부업자를 고용해 살해한 것으로 나와 있다. 초법적 처형은 인도주의에 반하는 범죄다.

필리핀 경찰이 마약 소탕 작전을 위해 주로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증거’를 조작하고, 살인청부업자를 고용해 살인 피해자를 갈취하고, 공식 사건 보고서까지 날조했다는 것이다.

티라나 하산(Tirana Hassan) 국제앰네스티 위기대응국장은 “이것은 마약과의 전쟁이 아니라 빈곤층과의 전쟁이다. 마약 사용, 판매를 의심받는 사람들은 아주 엉성한 증거만으로도 돈을 대가로 살해당한다”고 고발한다.

국가적인 마약 소탕 작전을 구실로 한 달만에 1천 명 이상이 무장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취임 7개월 만에 발생한 마약 관련 살인 사건은 7천 건 이상이었고, 그 중 경찰이 직접 살해한 경우도 2,500건 이상이다.

▲ 필리핀 노스 코타바토주의 마킬랄라에서 지난해 10월 28일 경찰들이 마약범들이 타고 가던 자동차안을 조사하고 있다. 이날 작전으로 남부 마긴다나오 주 다투 사우디 암파투안의 삼수딘 디마우콤 시장 등 10명이 경찰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마킬랄라=AP/뉴시스 자료사진]

국제앰네스티는 조사관을 파견해 필리핀 120개 도시에서 벌어진 59명의 살인 사건과 관련된 33개 사례를 상세히 다루었고 관련자 10명을 인터뷰하면서 경찰 보고서 등의 문서 자료도 분석했다.

필리핀은 국제형사재판소에 관한 로마규정의 당사국이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이러한 살인에 대해 우려 성명을 발표한 바 있다.

그러나 마약과 폭력에 시달려온 필리핀 국민 중 70% 이상이 검사 출신인 두테르테의 ‘마약전쟁’을 지지하고 있어 일부 정치인들의 반대시위에도 불구하고 당분간 이런 경찰살인이 계속될 전망이다.

마닐라의 한 교민은 “필리핀 국민 중 마약복용으로 죽는 사람이 너무 많아 범죄자를 일부 죽여서라도 이 전쟁을 성공해야한다”고 두테르테를 두둔했다. 어느 곳이나 찬반 양론은 있는 것 같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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