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어릴 적 정월 대보름 때는 그리 춥지 않았다. 산골 강변의 추위가 지금보다 더했을테지만 논두렁에 쥐불을 넣고 깡통에 불을 넣어 돌리며 보름달을 맞았다.

논은 들판에 있어서 문제가 없었지만 산으로 연결된 밭에 불을 놓아 산불로 번지기도 했다. 분유깡통 아래에 깡통따개로 구멍을 내어 바람이 잘 들어가도록 불통을 만들고 어디 창틀에 있는 가느다란 철사를 빼내어 끈을 만들어 돌렸다.

▲ 남영진 논설고문

설날부터 보름까지는 농한기여서 밤에 사랑방에서 새끼를 꼬던지 낮에도 화롯불을 피워놓고 화투 등을 즐겼다. 집집마다 ‘복조리’ 2~3개를 걸어둬 그 해의 복을 기대했고, 모여서 ‘나이롱뽕’ 등 화투치기를 해서 진 팀이 자기 집 처마에서 말리고 있는 곶감 한 줄을 끊어오던지 두엄에 넣어둔 무우나 백김치를 추렴해 국수를 곁들여 밤참을 먹기도 했다. 동네 어른들은 윷놀이, 엄마 누나들은 널뛰기, 우리들은 보리밭에서 연을 날렸다.

초등 4학년 때의 추억이다. 고향인 충북 영동군 황간면에 1960년대 초반 처음 강변 자갈밭에 포도밭이 생겼다. 유일한 병원집에서 경작하는 포도밭이었다. 여름 미역을 감다 배가 고프면 알몸으로 포도밭에 기어들어가 설익은 포도를 서리해서 먹기도 했다.

아직 나무가 크지 않아 줄기를 가드라란 나무에 철사로 묶어 놓았다. 어느 해 쥐불놀이를 하다 태울 게 떨어졌다. 골목대장이던 형들이 우리에게 그 나무를 뽑아오라고 했다. 모두 뽑아다가 추위를 달랬다.

다음날 학교도 못가고 지서에 끌려가 교감 선생님이 오셔서 모두 퇴학이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부모님들이 달려오셔서 군밤을 맞고 풀려났다. 목상을 하시던 우리 아버님이 송판으로 배상하셨다는 말을 후에 들었다.

지금도 명절 때 고향 친구들을 만나면 그 추억담은 꼭 나온다. 강 건너 친구들과의 돌던지기 싸움얘기와 함께. 승패가 없는 싸움이지만 지금은 언제나 우리가 혼내준 것으로 각색되어 전해온다.

이장이시던 큰 아버님 창고에는 농악 악기들이 있었다. 1년에 2~3번 쓰는 물건이었지만 꽹과리를 드신 상쇠 어르신의 굿거리 장단은 20명 정도의 농악대 모두를 이끄는 흥이 있었다.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집집마다 돌면서 한판놀이를 하면 있는 집주인이 음식과 막걸리를 내놓았다. 뒤에 줄줄이 따라다니던 동네 꼬마들은 농악대들이 남긴 음식과 밤 대추 곶감 등을 차지했다.

보름달 아래에서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밭이나 논두렁의 짚에 불을 놓아 들판의 쥐와 곤충을 제거하기 위한다는 ‘쥐불놀이’와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보름달이 뜰 때 타작마당에 짚으로 쌓아올린 달집을 태우며 나쁜 기운을 날려버리고 풍년을 기원하다는 ‘달집태우기’ 등은 어린이들에게는 어른들이나 형님들을 보는 신나는 모임이었다.

이날은 모두 새벽에 일어났다. 어릴 때 “내도사가”라고 들었던 풍습 때문이었다. 좀 커서 그 말이 “내 더위 사가라”라는 뜻이었음을 알았다. 충북의 밑자락 동네라 경상도 말의 영향을 받아 '내 더위‘를 ‘내도’로 발음한 것이었다.

▲ 정월 대보름(음력 1월 15일)을 하루 앞둔 10일 오후 서울 서초구 양재천에서 열린 정원대보름 달맞이 축제에서 달집태우기 행사가 진행되고 있다./뉴시스

동트기 전 일찍 이웃집에 가서 친구 이름을 불러 대답하면 “내도사가”라고 하고 도망 온다. 여름 내내 무더위를 그 친구에게 넘긴다는 뜻이지만 일찍 일어나라는 ‘새 나라의 어린이’를 만들기 위한 풍습이었을 거다.

한바탕 동네를 돌고 오면 집에서는 밤·호두·땅콩 등 ‘부럼’을 까먹는다. ‘피부 부스럼’을 예방할 수 있다는 속설 때문에 요즘도 어디서나 나물에 오곡밥 먹는 풍습과 부럼을 먹는 풍습은 전해온다. 겨우내 못 먹었던 채소와 곡류로 비타민 부족을 보충하려던 뜻일 거다.

중국에서는 구정을 ‘춘지에’(春節)라 한다. 그 겨울 추위 속에서도 버드나무 움속은 물이 오르고 기지개를 준비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래도 역시 입춘(立春)까지는 춥다. 대한(大寒)을 지나 바로 다음 절기이기 때문에 겨울 동장군의 위력이 아직 가시지 않았다.

흔히 ‘꽃샘추위’라고 하듯 봄이 오기까지 2~3번의 찬바람이 분다. 선조들은 입춘 무렵에 큰 추위가 있으면 “입춘에 오줌독(장독·김칫독) 깨진다” 또는 “입춘 추위에 김칫독 얼어 터진다”고 했다.

입춘이 지난 뒤 날씨가 몹시 추워졌을 때에는 “입춘축을 거꾸로 붙였나”라고 말할 정도였다. 이번 강추위는 대보름까지 이어졌으니 올해는 이 말을 들을 만하다.

계절적 추위만이 아니라 탄핵정국 때문이다. 입춘추위는 ‘반드시 있다’는 뜻으로 “입춘 추위는 꿔다 해도 한다”는 말이 있어 한 두번 고비는 있을 줄 알았다. 격(格)에 맞지 않는 일을 엉뚱하게 하면 “가게 기둥에 입춘이랴(假家柱立春)”는 속담대로 청와대의 태도가 딱 그 격이다.

▲ 설 명절 이후 박근혜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는 첫 촛불집회가 열린 4일 오후 서울 종로구 광화문 광장에서 참가자들이 박 대통령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뉴시스

사상 두 번째인 대통령 탄핵정국을 맞아 100일 이상 연인원 1천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광화문과 재동 헌법재판소 앞을 메워 “대통령 물러나라”를 외쳤지만 청와대의 반응은 북악산 바람처럼 차다.

박근혜 대통령은 당초 “성실히 조사에 임하겠다”던 약속을 헌신짝처럼 저버리고 특검의 수사도 받지 않고 법원의 정식영장을 받은 청와대 압수수색도 거부하면서 ‘지연 작전’을 펴고 있다

지난 연말 국회의 탄핵소추 후 헌법재판소에 넘길 때만해도 탄핵사유가 너무 많다고 했다. 청와대의 국가기밀누설, 최순실의 장관 청와대수석 등 인사개입, 대기업의 스포츠재단지원에 압력을 행사한 뇌물죄 등만 해도 탄핵사유가 “차고 넘칠” 줄 알았다. 이후 1만여 명에 달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성 및 동행사, 세월호 참사 때 대통령으로서의 직무유기 등 탄핵인용에 적용될 죄와 증거는 넘쳐나 당연히 2월까지는 기능할 줄 알았다.

그런데 입춘이 지나면서 분위기가 조금씩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박한철 헌재소장이 1월말 임기를 마치면서 “이정미 재판관이 퇴임하는 3월초까지는 결정을 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을 한 이후 분위기가 심상찮다. 토요일 대보름을 맞은 춧불파들이 다시 광화문에 집결하고 대한문 앞의 태극기 집회는 ‘계엄령’ 운운할 정도로 더 강해졌다.

입춘을 맞이해 '입춘대길 건양다경'등 입춘축(입춘첩)을 써 붙인 것을 보았다.

‘적선공덕행’(積善功德行)이라는 풍속도 있었다. 작은 선행으로 남을 돕는다는 말인데 ‘박 대통령이 조금의 애국심이라도 있다면 입춘 추위에 떨고 있는 촛불시위대를 위해서라도 그냥 물러나 준다면…’ 보름달을 보며 ‘국민을 위한 적선행’을 빌어 본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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