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냉전시대 소련과 동구를 서구에서는 ‘철의 장막’(iron curtain)이라 불렀다. 또한 1949년 중국의 공산화 이후 마오쩌둥(毛澤東)의 인민공사운동, 문화대혁명시기를 ‘죽의 장막’(bamboo curtain)이라 칭했다.

▲ 남영진 논설고문

이제 미국의 7개 이슬람국가 국민들에 대한 입국거부에 이어 멕시코 국경에 담벼락을 쌓게 되면 세계가 미국을 ‘비자 장막’(visa curtain)이나 ‘벽돌 장막’(brick curtain)이라 비아냥거려도 할 말이 없다.

이런 우려 때문인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반(反)이민' 행정명령 조치를 내린 데 대해 미국의 국무부 외교관들이 집단반발하고 있다. 이는 다소 의외다. 어느 나라나 외교관이라면 본국 정부의 정책을 전적으로 지지하는 게 상례인데 1,000여명의 미국 외교관들이 이 조치에 항의표시로 이견제출을 했다고 한다. 소위 이견제출보장제도(dissent channel)라는 거다. ‘반대채널’이라고도 불린다.

이 서명은 일종의 연판장처럼 정부의 정책에 이견을 가진 외교직 공무원들이 서명을 할 수 있게 회람을 시켜 서명을 받는 제도다. 서명한 외교관들은 이번 행정명령이 ‘비(非)미국적’이며 미국 내 테러공격을 중단시키려는 노력을 오히려 약화시킬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 신문의 제목처럼 ‘이민의 나라에서 이민을 금지’한 것이 비미국적이라는 이유에서다.

국무부의 집단 반발은 트럼프 대통령이 국무부 등 주무 부처들과 교감 없이 정책을 결정했다는 점도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국무부와 법무부, 국토안보부 등은 행정명령이 공식 발표되기 전까지 이번 조치를 알지 못했다고 한다.

외교관들은 또 반이민 행정명령으로 인해 미국이 2차 대전 기간 일본계 미국인을 억류한 최악의 시절로 돌아갈 것이라고 우려하고 있다. 미국 정부는 이들에 대해 사과와 손해배상을 한 바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달 27일 리비아, 이란, 이라크, 시리아, 예멘, 수단, 소말리아 등의 테러 위험 7개국에서의 미국으로의 입국을 90일간 제한하고 시리아 난민의 미국 입국을 영구 금지하는 행정명령에 ‘전광석화’식으로 서명했다. ‘전광석화’란 트럼프 대통령이 백악관이 아닌 제임스 매티스 국방장관 취임식 참석차 펜타곤을 방문한 자리에서 서명했기 때문이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취임에 반대하는 시위대가 지난달 21일(현지시간) 워싱턴에서 구호를 외치며 행진하고 있다.[워싱턴=AP/뉴시스 자료사진]

이 매티스 장관이 3일 취임 첫 방문지로 우리나라에 와 윤병세 외교장관과 회담을 가졌다.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배치의 당위성’을 역설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급진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의 미국 입국을 반대한다면서 "미국을 지지하고 미국인을 사랑하는 사람들만 받아들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 영주권 소지자는 입국제한 대상은 아니지만 7개국 국적자는 별도 심사를 거쳐야 한다. 종교 박해를 받은 난민은 대부분 기독교도들이어서 예외 인정하기로 했다. 무슬림 차별이라는 비난에 미국 정부는 “이외 무슬림 국가가 40여 개 국이나 더 있다"며 반박한다.

행정명령에는 시리아 난민의 입국을 무기한 중단하고, 시리아를 제외한 모든 난민들은 120일간 난민수용 프로그램을 중단하는 내용도 포함됐다. 미국의 안보가 위협을 받지 않는다는 판단이 내려질 때까지 시리아 난민 입국을 유보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연간 예산 내에서 미국이 받아들이는 난민 수의 한계치도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이 확대해놓은 11만 명에서 절반 가량인 5만 명으로 줄어든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국토안보부에서 멕시코와의 국경에 장벽을 건설하는 방안과 불법 이민자를 체포하지 않고 보호하는 이른바 '피난처 도시'에 대한 연방재정 지원을 중단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행정명령을 내리는 장소로 백악관이 아닌 국토안보부를 선택한 것은 반이민 정책기조를 강조하기 위한 메시지였다.

국경에 장벽을 설치하는 비용은 대선 공약대로 멕시코에 청구한 것도 재미있다. 선거용 공약만이 아니었다. 미국이 우선 착공하고 추후에 멕시코 정부에 비용을 청구하겠다는 식이다.

▲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가운데)이 지난달 23일(현지시간) 백악관에서 기업 대표들과 조찬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워싱턴=AP/뉴시스 자료사진]

당연히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은 곧바로 비용을 지불할 의사가 없다고 반박했다. 미국 필요에 의한 것이니 알 바 없다는 투다. 장벽 건설비용은 약 120억∼380억 달러(약 14조∼44조3000억원)로 추산된다.

트럼프 정부는 당장 1,100만명에 달하는 불법 이민자 색출과 심사, 그리고 추방에 나설 방침이다. 남부사령관 출신의 해병대 장성 존 켈리를 국토안보부 장관으로 낙점할 때부터 이같은 상황을 예고했었다. 남부사령부는 미국과 멕시코의 국경 일대를 방어하는 임무를 띠고 있어 불법입국자 색출 등에 관여한다.

'이민자의 나라'로 탄생한 미국의 '멜팅팟'(인종의 용광로) 신화가 사라질 위기다. 2014년 미국 인구 총 3억1874만명 중 백인이 62.2%, 히스패닉이 17.4%, 흑인 13.2%, 아시아계 5.4% 등 미국은 다양한 인종과 다원주의가 성장의 원동력이었다.

영국의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였으나 소위 ‘아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찾아 전 세계에서 몰려들어 2차 대전 후에는 세계 제1의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어왔다.

한인 교민사회에서도 우려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미국 정부가 집계하고 있는 한인 불법체류자는 지난 2011년 기준으로 약 23만 명이다. 오바마 정부의 '불법체류 청년 추방유예 조치(DACA)'에 따라 보호를 받는 한인 청년은 3만여 명에 달한다.

독일, 중국 등에 대한 환율조작국 지정 움직임, 수입 상품에 대한 고관세 부과 등에 이은 국제기구 분담금을 삭감하려는 움직임도 '고립주의' 정책의 연장선이다. 뉴욕에 본부를 둔 유엔 분담금까지 삭감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트럼피즘'의 핵심 기조는 '온리 아메리카 퍼스트’(Only America First)라는 조롱 섞인 비판을 받고 있다.

지난 70여년간 ‘자유민주주의의 수호자’로서 90년대 초반 소련, 동구권의 몰락 이후 세계 기축통화인 달러를 마음대로 찍어내면서 단일패권을 쥐고 흔들어 왔던 미국이 이제 스스로 문을 닫으려 하고 있다.

로마제국 몽골제국 대영제국도 내부로부터 무너져 내렸다. 지도력은 솔선수범에서 나온다. 그래서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도 서서히 커튼이 내려지는 조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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