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소주 '처음처럼'을 써준 신영복 교수의 1주기를 맞아 1월 15일 추모모임과 유고집 기념출판, 서화전, 19일 ‘만남’콘서트 등 그를 기리는 행사들이 1주일간 이어졌다.

'처음처럼' 소주병에는 신 교수가 쓴 '처음처럼'과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속의 '새 그림'이 함께 들어 있다.

▲ 남영진 논설고문

그는 1968년 통일혁명단 사건으로 감옥에 들어가 88년 특별가석방 될 때까지 20년간 복역했다. 이 때의 서간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 98년 출간돼 일반에 알려졌지만 소주병 ‘처음처럼’의 글씨로 우리와 더욱 친근하게 만나고 있다.

이번에 유고집 <세월아 흘러흘러 어디로 가니>’와 <손잡고 더불어-신영복과의 대화>도 나왔다.

두산주류(현 롯데주류)는 2005년에 개발한 새 소주의 이름짓기를 광고홍보 전문업체 '크로스포인트'의 손혜원 대표에게 의뢰했다. 손 대표는 신영복 교수의 서화 에세이 제목인 '처음처럼'으로 할 것을 제안해 채택됐다. 신 교수에게 허랃을 받으려 연락하자 그는 흔쾌히 수락했다.

“소주는 서민이 기쁘거나 슬플 때 자주 찾는 술”이라며 저작권료도 받지 않고 문구와 글씨체 사용을 허락해 2006년 2월 출시됐다. 두산은 저작권료 대신 그가 재직 중인 성공회대학교에 1억원을 장학금으로 기부했다. 이 손 대표가 지금 더불어민주당 의원이다.

독특한 그의 서체와 간단한 그림을 보기 위해 16일 인사동 동산방화랑을 찾았다. 바깥 입구벽에 신 교수가 함께했던 사단법인 ‘더불어숲’이 기획한 ‘만남’이라는 걸개에 쓰여진 ‘사람과 사람의 작은 만남이 모든 변화의 시작입니다’라는 글귀가 기획전의 의미를 알리고 있다.

1층에 들어서자 먼저 익숙한 ‘처음처럼’이 반기고 무교동의 오래된 추어탕집 ‘용금옥’, 인터넷방송사 ‘뉴스타파’의 제호가 액자에 걸려있다. 돌아가시기 1달 전에 지인에게 써준 ‘當無有用’(당무유용)이 적혀있다. “인간이 주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아야만 자연의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설명이 달려있다.

1층에는 11점의 간단한 제호와 한자 글귀가 전시됐고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94년 동학혁명 100주년을 기념해 지은 신동엽 시인의 <금강>서장 액자가 작은 글씨로 걸려있다.

출옥한 뒤 89년부터 재직했던 성공회대 교수들과 함께한 ‘더불어숲’에는 2015.12.22라고 처음 날자가 기입된 글이 있었고 “나무가 나무에게 말했습니다. 우리 더불어 숲이 되어 지키자”는 설명이 붙어 있다.

▲ 12일 서울 종로구 인사동 동산방화랑에서 열린 '만남:2017 신영복 선생 1주기'전을 찾은 시민들이 작품을 관람하고 있다./뉴시스

‘아름다운 동행’은 ‘만남’ ‘처음처럼’ ‘더불어 숲’과 같은 글씨체다. 여기에는 “함께 가면 길이 된다”는 부제가 붙어있다. ‘더불어 숲’은 2014년 6월 동물보호시민단체인 KARA를 위해 써준 것이라 한다.

1994년 서울 정도(定都) 600주년을 기념해 당시 조순 서울시장에게 써준 ‘서울’이라는 글씨는 지금도 시장실에 걸려있다 한다. 밑에는 한문글귀인 ‘北岳無心五千年, 漢水有情七百里’( 북악무심오천년, 한수유정칠백리)가 쓰여 있다. 옆의 설명에는 “왕조는 5천 년간 백성들의 고통에 무심했지만 한강은 민초들의 애환을 싣고 7백리를 유정하게 흐른다”고 되어있다.

‘通’(통)이라는 글씨에 이어진 한반도 지도도 이채롭다. “統(통)이 완성이라면 通(통)은 과정입니다. 막다른 데서 길을 찾고 길 없는 데서 길을 낼 결심이 분단극복과 통일로 가는 길에서는 절실합니다. 소통과 대화, 꾸준한 교류와 이해가 通만의 내용이자 방법입니다. 通성은 統입니다.通으로 統을 이루어 내기를”이라는 설명글을 썼다.

▲ 15일 오후 서울 구로구 성공회대학교 성미가엘성당에서 고(故) 신영복 선생 1주기 추모식이 열리고 있다./뉴시스

2층에는 14점 중에 2점 이철수 화백과의 합작품도 있다. 간단히 피아노 건반이 그려진 ‘반음과 동반의 화합’에는 “동반(同伴)은 반음(半音)에서 시작됩니다”라는 글이 붙었다. ‘함께맞는 비’에는 우산과 10줄의 막대가 그려져 있다. “돕는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는 것입니다”(2015)라는 잘 알려진 글귀가 쓰여 있다. 김남주 시인의 ’함께 가자 우리 이 길을‘(2014)은 고 김남주 시인의 생가에 걸린 현판글씨란다.

‘북극성과 지남철손’ 서화도 재미있다. “북극을 가리키는 지남철은 무엇이 두려운지 항상 바늘 끝을 떨고 있다.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우리는 그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만일 그 바늘 끝이 불안한 전율을 끝내고 어느 한쪽에 고정될 때 우리는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이미 지남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2015. 떨고 있는 지남철)

‘당신의 서쪽에서’는 “기다림은 바라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비가 그치기를 바람이 잦아들기를 파도가 잠들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몰아치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그것을 당연히 생각하는 것 그리하여 그 당연한 것들이 결국엔 당연히 지나갈 것을 믿는 것이다”는 설명이다.

한자 ‘水’에는 ‘水善利萬物而不爭(수선이만물이부쟁) 處衆人之所惡幾於道’(처중인소악기어도)라는 한문이 붙어있다. “사람들이 싫어하는 악에 처하여 도라 할 수 있다”는 설명이 붙었다.

한자 액자도 몇 점 있다. ‘百鍊剛’(백련강)에는 ‘精金百鍊出紅爐 梅經寒苦發淸香’(정금백련출홍로 매경한고발청향: 정금은 화로에서 백번 정련돼야 나오고 매화는 한고를 겪고서야 청향을 발한다)이 붙었다. ‘無鑑於水’무감어수)라는 작품에는 “물에 비추어 보지 말고 사람에게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는 설명이 있다.

‘春風秋霜’(춘풍추상)도 있다. ‘對人春風 持己秋霜’(대인춘풍 지기추상: 타인에게는 춘풍처럼 대하고 자기는 추상처럼 관리하라)이라는 작은 글씨가 붙어있다. 돌베게가 출간한 ‘처음처럼’에 나온 ‘花明故土風移新天’(화명고토풍이신천: 빛이 되어 이 땅을 밝히고 바람이 되어 새날을 연다)도 걸려있다.

▲ 소주 처음처럼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한 6쪽 한글병풍에는 선생의 글자체의 변화를 알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한다. 옥중에서 쓴 ‘춘향전’의 한 부분이다. 단아한 정자체의 글씨를 볼 수 있다. 75년 대전교도소에서 노촌 이구영 선생을 만난다. 그는 이 분을 “춘풍추상의 자세로 역사의 한복판을 걸어간 양심적인 지식인”이라고 평했다. 함께 수감 생활을 하면서 스승으로 모셔 이후의 삶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

고인의 옥중 산문집 <감옥으로부터의 사색>과 <나무야 나무야>, <더불어 숲> 등 저서도 전시됐다. 이중 기세춘과 공동 편역한 <中國歷代詩歌選集(중국역대시가선집)>4권이 눈에 띤다. 선생이 한문시가에 조예가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1월 15일 75세로 별세했다. 요즘 시대에 더욱 그리워지는 큰 어른이었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