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용자 수필가] 어느 마을 가난한 집에는 물려받은 재산은 없이 제사만 여러 위(位)였다. 그러나 아무리 흉년이 들어 먹을 양식이 없어도 단 한 번도 제사는 빠뜨리지 않았다.

없는 집 제사 다가오듯 한다는 말이 그냥 생긴 건 아니다. 무엇을 어떻게 하든 정성을 드려 제사는 지내야 했다. 깊숙이 간직해 뒀던 떡쌀마저 바닥이 났다. 그 해는 시어른 제사를 어쩔 수 없이 메사로 지내는 수밖에 없었다. 편 없이 밥만 올리는 제사를 메사라고 한다.

▲ 지난해 9월 서울 충무로 한국의 집에서 성균관 유생들이 '추석 차례상 차리기'를 시연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보통 메사란 집안에 우환이 있다든지 흉사가 들면 간단하게 그날 제사만 잊지 않고 고인에게 흠향(歆饗)하게 하는 약식제사를 일컫는다.

남편이 사랑에서 과거공부에만 전념을 하였으니 가정 경제는 자연 부인의 몫이었다. 마른 일, 진 일 가리지 않았고 허리가 휘도록 밤낮없이 일을 해도 두 식구의 끼니를 잇기 힘들었던 시대가 있었다.

잘 차리건 못 차렸건 진설(陳設)을 해 놓으면 풀 먹여 손질한 무명 도포를 바싹 마른 몸에 걸쳤다. 흰 도포(道袍) 끈을 가슴에 둘러맨 후, 장가들 때 처가에서 큰맘 먹고 해 보낸 갓을 썼다. 정성 들여 마지막으로 매무시를 끝냈다. 효도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제사상 앞 낡은 초석(草席) 위에 공손히 꿇고 앉았다. 햇빛을 못 본 선비의 목덜미가 파르스름했다. 제사상 양쪽에 서 있는 촛대에 불을 켜고, 향대(香臺)에 질 좋은 향을 정성 들여 담고 불을 붙였다. 하얀 연기가 잠시 머물다 천정을 향하여 피어올랐다. 향 내음이 방안에 가득 퍼졌다.

진설된 제수(祭需)가 구색을 갖추지 못했어도 선비는 부인을 나무라는 법 없이 묵묵히 절차에 한 치의 소홀함 없이 곡진(曲盡)했으나 부인은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선비는 초헌(初獻)을 했다. 아헌(亞獻)을 드리기 위해 부인이 초석 위에 정성을 다해서 공손히 앉았다. 워낙 식구들이 없어 영성(零星)한 집안이라 제관은 고작 내외뿐이었다. 제사에 시중을 들어 줄 사람 하나 없이 두 내외가 각기 초헌 잔에 아내가 술을 쳤고 아헌에는 남편이 아내의 잔에 세 번으로 나누어 술을 따랐다.

그렇게 잔을 받은 아내는 남편이 한 것 같이 모사기(茅沙器)에 세 번을 조금씩 따른 후에 술잔을 받아 든 남편은 제사상에 다시 올렸다. 천신(天神)에, 지신(地神)에, 조상신(祖上神) 이렇게 세 번으로 나누어 술을 치는 법이라고 돌아가신 선비(先妣)께서 일러주시던 말이 생각나면서 명치까지 그리움이 복받쳤다.

종헌(終獻)에 남편의 가느다란 어깨가 흔들렸다. 진혼(鎭魂)하듯 내외는 서럽게 한참을 엎드려 애곡(哀哭)을 올렸다. 향로(香爐)와 지방(紙榜)을 밖으로 들고 나갔다.

어둡고 먼 산자락에 눈길을 한번 던져 보았다. 까무룩한 하늘에 별빛이 유난히 초롱초롱했다. 올해 이 초라한 상을 받으시고 내년에는 환한 마음으로 발길하시길 빌면서 지방에 불을 붙였다. 불길이 일순 밝아지면서 흑청색(黑淸色) 어둠이 잠시 사라졌다.

가라 앉으려는 가벼운 불길을 손을 휘저어 다시 하늘로 날려 보냈다. 꺼져 가던 지방에 불길이 살아나면서 어두운 하늘을 잠시 밝히고 할 말이 있는 듯 머뭇거리다 훨훨 날아가 버렸다.

음복 절차가 남았다. 초라하기 이를 데가 없는 제사상이긴 했지만 두 내외에겐 죄송스럽고 과분하였다. 음복주(飮福酒) 한 잔으로 간단히 음복을 끝냈을 때 새벽을 알리는 첫 닭의 긴 울음이 하늘을 갈랐다.

철상(撤床)을 하면서 해가 거듭될수록 더욱더 초라해지는 제사상에 어느 때보다 더 깊은 울음을 남편 모르게 속으로 삼켰다.

남편의 입신양명에 명운(命運)을 건 젊은 아내였다. 이렇게 곤궁한 제사가 빨리 끝이 나기를 빌고 또 빈지 몇 해가 되었던 것이다.

진설이 거의 끝나고 가장 마지막에 제상에 올릴 방금 뜸을 드린 뜨거운 메를 놋 밥 식기(食器)에 정성스레 괴는 것은 주부의 몫이다. 제사 밥은 담는다고 하지 않고 ‘메를 괴(蕢)다’라고 한다며 소녀 적에 어머니께서 이르셨다.

메를 괴면서 “아버님 어머님, 죄송합니다. 정성이 부족하다면 이 한 몸에게만 벌을 주소서” 수없이 되풀이해 고개를 숙였다.

작은 밥공기를 메 주발 안에 엎어서 넣었던 것이다. 그리고 곱삶은 검은 깡보리밥을 그릇이 찰 정도로 담고 난 후 그릇 위로 올라오는 부분을 반 공기도 못 되는 흰 쌀밥으로 봉분(封墳)을 만들 듯 정성을 들여 펴 봉긋하게 덮어 보리밥을 가렸다.

이런 일을 하면서 혼자뿐인 부엌을 휘둘러 보았다. 가슴이 두근거림과 동시에 손길이 파르르 떨리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부모님 살아실 제 단 한 번도 눈속임을 하여 어른께 걱정을 드린 일이 없었기에 한층 더 죄송스러웠다. 아무리 유명(幽明)을 달리 하였을지라도 말로만 듣던 귀신 속이는 이 망극(罔極)한 사정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가 있을까.

음복 시에 봉분으로 덮어 놓았던 쌀밥을 남편 그릇에 담고 나서 반 공기도 채 못 되는 깡보리밥은 아내, 자신의 몫으로 남겼다. 메 식기 안에 엎어 두었던 밥공기를 남편 볼세라 몰래 뒤로 감추면서 남편의 눈길을 피했다. 그렇게 귀신을 속인 것이다.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