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정숙 영남대 국사학과 교수] 한국에서 커피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최초의 국비유학생으로 미국을 다녀온 유길준의 『 서유견문』이다. 그는 이 책에서 ‘우리가 숭늉을 마시듯 서양 사람들은 커피를 마신다’고 소개했다.

커피를 즐긴 최초의 한국인으로 기억되는 사람은 고종 황제이다. 아관파천(俄館播遷) 당시 러시아 공사관에 피신했던 그에게 러시아 공사 웨베르는 가배차(嘉排茶·커피)를 대접했다.

그 후 1년여 간의 러시아 공사관 생활에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한 고종 황제는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건물을 짓고 자주 그곳에서 커피를 마셨다.

한국 최초의 서양식 카페는 손탁(Sontag)의 집(현이화여고 내)에 있었다. 손탁은 러시아 공사 웨베르의 처형이었는데 요리 솜씨가 뛰어났으며 사교에 능했다.

▲ 서울 중구 덕수궁 정관헌에서 대한제국 외국공사 접견례 재현행사가 열리고 있다. 정관헌은 고종황제가 커피를 마시며 외교사절들과 연회를 즐기던 곳이다./뉴시스 자료사진

그는 1895년 고종 황제로부터 정동에 있는 가옥을 하사받아 외국인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하다가 왕실의 도움으로 이 가옥을 서양식 2층 건물로 지어 ‘손탁호텔’을 운영했다. 이곳에 카페를 열고‘ 가배차’ 또는 ‘양탕’이라는 이름으로 커피를 제공했다.

이 호텔에 드나들 수 있는 사람들은 외국인이거나 그들을 상대하던 개화인사들이었다. 커피는 이들에게 제공된 고급문화였다.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다방이 문을 연 해는 1927년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활동사진 감독이었던 이경손이 종로의 관훈동에 ‘카카듀’란 다방을 차린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 기자 이선근이 아이디어를 냈고, 이름은 문학가 김진섭이 지었고, 실내장치와 조명은 문학가 정인섭이 맡았다. 다방 운영자들은 문화예술인이라는 자부심을 지니고 있었다.

시인 이상과 기생 금홍도 종로1가에 ‘제비다방’(1933년)을 열어 2년간 운영했다.

당시 사람들은 다방을 차를 파는 곳과 차의 분위기를 마시는 곳으로 구별했다. 전자는 대중적, 개방적이며 차를 주로 마시는 곳이었다.

이에 비해 분위기를 파는 곳은 낙랑, 프라타느, 에리자, 프린스, 밀림 등과 같이, 귀족적이고 폐쇄적이며 실내는 담배연기로 자욱했다. 고전음악을 들려주며 찻값은 비쌌다.

드나드는 손님은 예술가, 가두철인(街頭哲人), 미남자, 실업자, 대학생이라고 분류되었다. 아무튼 한국인은 다방에서 포크, 케이크, 커피 등의 이국적 체험을 해 가면서 서양음악을 듣고 문학을 논했다.

식민 지배를 받는 나라의 지식인들이 커피로 ‘근대’의 기분을 내면서, 그걸 매개로 다방에 모여 앉아 은밀하게나마 세상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언어의 향연을 벌였단다.

다방은 세태의 변화와 재료의 발달에 따라 크게 변해 왔다. 일제 말기 경성역에는 역전 다방인 ‘도루췌’(Dolce)가 생겨 고급 만남의 장소를 제공했다. 뒷날 서울시장이 되었던 자유당의 이기붕도 해방 전 미국에서 돌아와 1939년 부인 박마리아와 함께 다방을 경영했다. 이곳에는 훗날 정치가가 된 사람들이 많이 출입했다.

광복 이후 다방은 곳곳에 생겨났고, 커피는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이 대중화는 물론 인스턴트 커피가 보급되면서 가능했다. 한국전쟁 때 주한 미군을 통해 야전용 인스턴트 커피가 처음 들어왔다. 이로써 커피는 특권층이 아닌 대중적인 음료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1960년대에 이르러 국내에서 커피가 본격적으로 제조되면서 커피 시대가 열렸다. 이때는 다방 문화의 전성기였다. 한때 흐트러진 문화를 바로잡기 위해 공무원의 다방 출입을 금하기도 했지만 소용없었다.

다방의 인기는 절정에 다다랐다. 다방은 만남의 장소, 데이트 장소, 문화와 예술을 논하는 사랑방이 되었다. 그때 서울의 대학로에서 문을 열었던 ‘학림’ 다방은 전설이다시피 했다.

이후 우리나라에서는 ‘맥스웰하우스’라는 인스턴트 커피가 만들어지고 ‘프리마’가 등장했다. 유럽에서는 주로 커피를 순화할 때 우유를 사용하는데, 프림은 매우 한국적 특색이다.

프림을 넣은 달고 고소한 커피와 함께 다방에는 마담과 레지도 등장했다. 모닝커피라 하여 아침 일찍 오는 손님에게는 달걀 노른자위도 제공되었다. 이런 인기 때문에 적은 양의 커피로 많은 커피를 만들어야 했던 주방장들이 커피를 내릴 때 담배꽁초 필터를 삶아 커피에 섞어 잔 수를 늘리던 ‘꽁피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1982년경 국내 최대의 커피회사인 동서식품에서 진공 동결 건조커피인 맥심을 출시했다. 이 즉석커피의 편리함 때문에 다방들은 원두커피를 인스턴트 커피로 바꾸게 되었다. 이렇게 개발된 한국인의 고안품 ‘커피믹스’를 미국의 맥스웰하우스 커피 본사에서는 세계 5대 커피 제품 중 하나로 지정했고, 이는 전 세계에 수출되고 있다.

▲ 지난해 6월 18일 서울 중구 청계천 헌책방거리와 오간수교 아래 산책로에서 열린 '청계천 헌책다방-무지개를 파는 헌책다방‘ 행사에서 시민들이 커피를 마시며 책을 보고 있다./뉴시스

1990년대 전후 생활이 윤택해지면서 원두커피를 즐기는 인구도 점점 늘어났다. 이에 따라 고급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원두커피를 제공했다.

그러면서 인스턴트 커피를 ‘다방커피’라 하며, 다방과 카페를 서로 다른 뜻으로 나누기 시작했다. 이때 외국에 다녀오며 가져오는 원두커피는 품격 있고 반겨하는 선물이었다.

그러다가 IMF 때문에 원두커피 수입이 어려워지자 우리나라에서는 생두를 수입해 직접 로스팅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원두커피점이 문을 열기 시작했다.

1999년 스타벅스 1호점이 이화여대 앞에 오픈했다. 이후 다른 전문 커피전문점들이 줄이어 현재 도시 번화가에는 대형, 고급 커피점이 즐비하다.

다방 분위기도 어둡고, 자리마다 칸막이로 독립공간을 확보했던 데서 밝고 환한 조명과 인테리어로 바뀌었다.

커피로 인한 수익금은 달러의 세계 교역량을 기준으로 석유에 이어 두 번째로 크다고 한다. 우리 한국인이 커피를 배운 지는 100여 년 남짓밖에 안 되었지만, 세계의 교역량에 보태 주는 양이 적지 않다. 이를 보면 커피잔에 담아 근대를 마셔 왔던 우리는 커피의 물결에 따라 국제화의 물결을 타고 넘어왔음에 틀림없다. 이 근대화와 국제화가 우리에게 좋은 것만이었는지 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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