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정유년(丁酉年)이 밝자 올해 대권을 노리는 잠룡들의 신년인사가 눈길을 끌고 있다.

유승민 개혁보수신당 의원의 ‘상유십이척‘(尙有十二隻·아직도 신에게는 12척의 배가 남아있습니다)은 임진왜란때 나라를 구한 이순신 코스프레였다. 올해가 7년 전쟁의 끝인 정유재란 420주년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

임진왜란은 육지에서는 일방적으로 당했지만 이순신 수군의 맹활약으로 결국 승리했기 때문에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엉망이된 이 나라에 정유년 새해에 무언가 희망을 걸어본다.

지난해 박근혜-아베 신조의 ‘불가역적’ 위안부 문제 합의에 대해 위안부 할머니 당사자들은 물론 시민사회단체와 국민들이 반대하고 있다. 또한 북핵에 대응한다면서 일본과의 군사정보교환협정이 체결돼 우리의 군사, 방위 체계의 정보가 일본에 고스란히 넘어갈 위험도 커졌다.

중국은 지난해 미국의 압력으로 경북 성주에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배치를 확정하자 롯데 세무조사, 한국 드라마 방영 금지 등 소위 ‘금한령’(禁韓令)이 거세지고 있다.

지난 12월 28일 'JTBC 뉴스룸' 손석희 앵커는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집회를 언급했다. 손석희는 "소녀는 외롭지 않았다. 제주도 소재 작은 북카페 앞에는 작은 소녀상이 놓여 있다. 철썩이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앉아있는 소녀는 오가는 손님들을 반갑게 맞았다"고 말했다.

이어 "또 소녀는 슬프지 않았을 것이다. 니도 숙이가? 내도 숙이다. 박숙이 할머니는 자신을 꼭 닮은 소녀상의 손을 잡았다. 12월 6일 숙이 할머니는 세상을 떠났다”고 브리핑했다.

손석희는 이어 임진왜란 때의 '금토패문'(禁討牌文)의 일부를 인용했다. "일본 장수들이 갑옷을 풀고 돌아가려고 하니, 조선군이 왜군과 교전하면 처벌할 것이라는 당시 명나라 황제의 지시에 이순신이 격노했다"며 이순신은 “왜는 간사스러워 믿을 수 없다”는 내용의 상소를 선조에게 올렸다고 설명했다. 한국국학진흥원 노승석 난중일기 연구가가 이날 공개한 '굴욕의 명령서'다.

손석희는 위안부 보상 합의를 "사과는 이미 받았다. 더 이상 시간이 없다. 싸움을 멈추라”는 우리 정부의 명령서라고 금토패문에 빗댔다. 그는 ”1년전 오늘 맺은 10억엔짜리 합의를 인정할 수 없다. 올해 마지막 수요집회는 마무리됐지만, 내년에도 1264번째 집회가 예고되어 있다"고 말했다. 지난해 위안부 피해자 7명이 사망해 이제 생존자는 39명. 이옥선 할머니(91)는 한국일보에 새해 희망을 ‘일본의 무조건 사죄’로 적었다.

▲ 지난달 30일 오후 서울 종로구 구 주한일본대사관 앞에서 열린 한일위안부 합의 폐기 및 소녀상 철거 반대 문화제에서 대학생 소녀상 지킴이들이 촛불을 들고 일본의 사죄를 촉구하고 있다./뉴시스

금토패문. 글자 그대로 왜군에 대한 ‘토벌을 금한다’는 문건이다. 조선 중기 문신 정탁의 ‘임진기록’에는 이순신의 장계(狀啓) 초본에 ‘금토패문’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다. 모함을 받아 삭탈관직 됐다가 다시 삼도수군통제사가 된 이순신이 선조에게 올린 장계는 2차 당항포해전이 끝난 이후인 1594년 3월 10일 작성됐다.

이순신은 이 장계에서 명의 황제 특사인 담종인(譚宗仁)이 이순신에게 전한 명황제 신종의 명령서를 구체적으로 보고한다.

‘금토패문’에는 “왜군이 본국으로 돌아가고자 하니 너희 조선도 태평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양국의 이익이 아니겠는가”라며 “사단을 일으키지 말라”고 명했다. 10여일 와병중에 패문을 받아본 이순신은 담종인에게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이라는 항의서를 보냈다. 왜군이 거제, 웅천, 김해, 동래 등 우리 영토에서 진을 치고 있는데 '일본 진영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명나라의 요구에 이순신은 응할 수 없었다.

명나라의 경략(총지휘관) 송응창(宋應昌)은 이미 1년 전인 1593년 2월 도원수 권율이 행주산성에서 대첩을 거두자 왜군과 싸웠다고 권율 도원수를 질책한바 있다. 그해 6월 2차 진주성 전투에서 조선군이 참패하고 모든 백성들이 도륙 당했는데도 담종인은 사신 심유경(沈惟敬)을 왜군 진영으로 보내 왜군의 만행을 두둔하는 발언을 하게 했을 정도였다.

진주성 2차 공방전 중에 강화 교섭차 명나라 사신이 왜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안내를 받아 일본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豊神秀吉)을 방문했을 때 도요토미는 명나라 사신에게 화건 7조(和件 七條)를 제시했다.

그 속에는 ‘조선 8도 가운데 북 4도와 한성(漢城)은 조선에게 돌려주고 남 4도(경기, 충청, 전라, 경상)는 일본에 할양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다. 한반도 남북 분단의 원형이 4백여년 전에 이미 제시된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신종의 무능과 환관의 전횡, 이민족의 발호 등으로 재정이 고갈된 상태여서 임진전쟁을 빨리 끝내고자 했다. 조선의 북쪽 땅을 요동 방어의 울타리로 삼는 ‘변방전쟁’으로 처리할 심산이었다.

일본은 전쟁을 확대하지 않고 조선 남부 4도를 할양받아 조선 지배를 확실하게 보장받고자 했다. 재상 류성룡은 “우리 강토의 땅은 한 자 한 치도 왜에게 넘겨줄 수 없다”며 강화교섭에 목을 걸고 반대했다.

▲ 2일 오전 서울 중구 롯데백화점 본점 앞에서 열린 국방부-롯데 사드부지 교환 저지 여성계 기자회견에서 한 참석자가 ‘노 사드(NO THAAD)'라고 적힌 마스크를 쓰고 있다. /뉴시스

천군(天軍)이라고 거들먹대던 명군은 왜군과 15차례 싸웠건만 제2차 평양성 전투를 빼고는 모두 패배했다. 그런데 이순신의 바다 싸움은 연전연승했다. 이순신의 수군을 통제 못해 강화협상에 걸림돌이 됐다.

명나라와 일본간의 강화협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명나라는 화전양론을 저울질한 끝에 강경론을 선택하고 조선과 함께 일본군과 전투를 벌인다. 조선으로서는 피아가 명확히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전쟁이었다.

임진란 7년 전쟁의 교훈을 되새겨본다. 중국과 미국, 일본은 한반도를 둘러싸고 각축을 하고 있다. 중국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묵인하면서 미국의 일본재무장, 사드 한국 배치에 노골적으로 항의하고 있다. 우리는 전시작전권도 없이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내용을 미국과 일본을 통해 전달받고 있는 실정이다.

인진왜란 다음해인 1593년 1월 7일 명나라 제독 이여송(李如松)은 군사 5만 명과 ‘항왜원조’(抗倭援朝·왜에 대항해 조선을 구한다)의 기치를 내걸고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왔다.

1950년 6,25전쟁 때는 유엔군이 북한의 남침을 물리치고 압록강 인근까지 진출하자 ‘항미원조’(抗美援朝)라며 중공군이 파병됐다. 명나라는 당시 조선을 위기에서 구했다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강조하며 내정 간섭을 일삼았다. 한국을 구한 미국도 ‘재조지은’을 앞세워 사드배치를 강행하려는 것은 아닌지 지켜볼 일이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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