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정성희 실학박물관 학예연구사]

달력과 권력

정유년(丁酉年) 새해도 벌써 나흘째를 맞았다. 요즘에는 스마트폰과 컴퓨터 덕분에 시계와 달력의 인기가 예전 같지 않지만, 그래도 달력은 우리 삶에서 매우 익숙한 풍경이다.

시간이 사람의 삶에 깊숙이 관여하게 된 것은 근대 사회 이후이다. 전근대 한국과 중국은 이른바 시간을 기록해 놓은‘ 달력’을 국가가 독점하고 있었다.

전근대 사회에서 시간은 ‘관상수시(觀象授時)’라 하여 지배자의 영역에 속한 것이었다. ‘관상’이 하늘의 현상을 관찰하는 것이라면, ‘수시’는 그러한 관찰을 통해서 정확한 시각을 알아내고 이것을 백성들에게 알려주는 것을 말한다.

▲ 정조년간의 천세력. 다가올 100년간의 24절기 시각이 예보되어 있다

시간을 알아내는 사람은 위정자들이었고, 피지배층은 그들이 일방적으로 정해 준 시간을 받아야 했다. 시간은 독점되어 있었고, 이를 거부하는 사람은 형벌을 받았다.

전근대 동아시아 국가의 군주들은 왜 시간을 독점적으로 측정하고 백성들에게 이를 알려주고자 했을까. 그것은 군주의 절대권력이 하늘로부터 나온다는 관념 때문이었다. 군주는 하늘로부터 부여받은 명(命), 즉 천명(天命)을 받은 자였다.

그리고 군주의 천명은 관상수시를 통해 그 정당성을 부여받았다. 동아시아 국가의 군주들은 천명을 받은 존재임을 증명하기 위해 하늘의 현상을 관찰하였는데, 그중에 하나가 시간의 측정과 보시(報時)였다.

시간은 하늘에 있는 천체들이 규칙적으로 운행하는 것을 관찰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다. 하늘이 주는 시간을 독점적으로 장악한다는 것은 그 하늘이 천명을 부여한 왕의 지위를 보증해 주는 상징이다. 정확한 시간을 알려주는 일은 백성들의 필요가 아닌, 통치자의 필요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관상과 수시를 잘하는 것이 제왕된 자의 권한이자 책무였던 것이다.

동아시아의 정치사에서 관상과 수시는 천문학적인 활동일 뿐 아니라 고도의 정치적 사안이기도 했다. 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왕조가 들어설 때에는 거의 필수적으로 천문 전문가를 동원해서 새로운 관상과 수시의 시스템, 즉 새로운 역법을 제정해 반포했다. 이른바 ‘수명개제(受命改制)’의 원칙에 따라 ‘개력(改曆)’이 이루어졌다. 개력의 원칙은 이전 왕조의 역법보다 더욱 정확하고 우수한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새로운 왕조의 개창과 천문학의 발전은 별개였으므로 역법을 바꿀 때마다 우수한 역법을 제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책력의 시대

오늘날 흔히 일컫는 달력은 그 특징에 따라 역서(曆書) 혹은 월력(月曆), 책력(冊曆)’이라는 명칭으로 다양하게 지칭되었다. 특히 달력은 책의 형태로 제작되어 책력이라는 이름이 많이 사용되었다.

책력은 천문학과 과학기술이 발전한 조선 시대에 본격적으로 제작되었다. 조선시대 천문학을 연구하는 기관인 관상감에서 새 달력인 책력을 만들어 궁중에 헌납하면 백관에게 나눠주고 각 관아의 서리도 동지의 선물로 책력을 친지들에게 나눠주곤 했다. 이것이 이른바‘ 동지책력’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책력은 단순히 시간의 흐름을 나열한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일상에 필요한 농경 생활의 지침서로서 또는 길흉화복에 따른 관습적 일상의 지침서로서 활용되었다. 조선 전기에 1만 부 정도 발행되던 책력은 조선 후기에 30만 부 이상 발행되었다.

농경 사회에서 24절기에 맞추어 제작된 책력은 요긴한 선물로서 귀중한 대접을 받는 물건이었다.

우리의 전통 달력은 지구의 자전주기를 1일, 공전주기를 1년이라 하고, 달의 삭망주기를 음력의 한 달이라 정했다. 그러나 양력의 한 달 주기는 천체 운동의 주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고, 편의상 1년을 12로 나눴을 뿐이다. ‘역’에서의 문제는 1년, 1월, 1일의 시간 단위가 정배수로 되어 있지 않은 데 있었다. 이 때문에 여러 가지 역법이 고안되었고 개력을 거듭하여 오늘날에 이르렀다.

‘대통력과 시헌력’

조선시대에 사용된 달력은 대통력과 시헌력이다. 먼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대통력은 1580년 경진년 대통력(庚辰年大統曆)이다. 경진년 대통력은 활자본으로 총 1책 16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활자본으로 대통력 가운데서도 자료적 가치가 대단하다. 풍산(豊山) 유씨 종택의 대통력은 서애 유성룡(柳成龍)이 사용한 대통력으로 사용자가 알려진 달력으로는 가장 오래된 것이다. 그 외 우복 정경세(鄭經世)가 사용한 대통력이 남아 있는데, 대통력은 희귀하여 그 자체만으로도 중요한 자료적 가치를 지닌다.

▲ 서애 유성룡 선생이 사용한 정유년 대통력

대통력에 뒤이어 1654년부터 사용된 시헌력은 상용력이었던 만큼 조선 후기 역서 가운데 가장 많이 발행된 역서이다. 불과 4,000건만 인쇄되었던 시헌력은 1762년 1만0,300축(약 20만 부)을 시작으로 점점 증가하여 1791년 이후에는 약 1만 5천축이 인쇄되어 관료가 아닌 일반인들도 그 이전보다 손쉽게 역서를 구입할 수 있게 되었다.

1762년부터 비교적 많은 양의 역서가 인쇄되어 현재 남아 있는 역서들은 이 시기 이후에 발행된 것들이 대부분이다.

옛날 사람들은 어떤 일을 하는데 좋은 때와 나쁜 때가 있고 또 좋은 방향과 나쁜 방향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화(禍)와 복(福)도 들어오고 나가는 때가 있다고 믿었으며 혼사나 이삿날의 길일(吉日)을 정하거나 집을 수리하거나 장 담그는 날도 손 없는 날과 손 없는 방향을 따지는 습관이 있었다.

옛날의 역서와 현대의 민간력에는 날짜에 따라 길흉일과 길흉의 방위에 대한 역주(曆註)가 함께 실려 있는데 이러한 역주는 음양(陰陽)과 오행설(五行說), 그리고 간지에 음양과 오행설을 결합한 간지오행설(干支五行說), 구성술(九星術) 등에 의한 해석을 붙인 것들이다.

이들은 사실 따지고 보면 과학적 근거가 부족한 미신에 불과하지만 옛날 사람들은 때와 방향이 사람의 운명과 길흉화복에 영향을 미친다고 굳게 믿고 있었으며, 역서에 기록된 역주는 그러한 궁금증을 풀어주는 길잡이 역할을 했다.

역년(曆年)과 역월(曆月), 역일(曆日)을 간지로 나타낸 것이 세차(歲次), 월건(月建), 일진(日辰)이다. 마찬가지로 하루 중의 시간에 대해서도 간지를 배당하였는데, 이와 같은 시간 인식은 길흉일의 예측과 함께 순환론적 자연인식을 가지게 하였다.

인간의 길흉이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의 순환처럼 반복되는 현상을 가졌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순환적 시간인식은 농경사회의 자연관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양력의 사용과 달력의 대중화

19세기 후반부터 20세기 초반까지는 전통적인 한국의 시간 체계가 근대적 시간 체계로 변화하던 시기였다. 그 변화의 주축으로는 태양력에 기반한 양력의 사용과 시계의 대중화를 꼽을 수 있다. 특히 달의 주기와 간지를 기반으로 하는 음력과 달리, 요일제를 근간으로 하는 양력은 ‘7일=1주일’이라는 주일의 시간 개념을 안겨다 주었다.

19세기 말 근대 동아시아에서 일어났던 양력으로의 개력은 천문학적 이유도, 근대적 이유도 아닌 제국주의의 침략에서 비롯되었다. 한국과 일본은 전통과의 단절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양력을 택했으며, 근대 국가의 표피적 모습을 본 따기에 여념이 없었던 만주국은 역설적으로 청조의 달력을 공식적으로 발행하였다.

▲ 일년 중 밤이 가장 길다는 동짓날인 지난달 21일 서울 종로구 조계사에서 시민들이 달력을 받아가고 있다. 예로부터 동지는 한해의 시작으로 여겨 이날 달력을 나누는 풍습이 있다. /뉴시스

귀한 달력이 급속도로 퍼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이다. 일등공신은 엉뚱하게도 정치인이었다. 정치인들은 지역구 주민들에게 돌릴 선물로 달력을 만들었다. 신문지만한 종이판 한가운데 큼지막하게 자신의 사진을 박고 12달을 빙둘러 표기하였다.

이때 정치인의 달력만큼 인기를 얻었던 달력은 숫자판 달력이었다. 그림은 없고 날짜만 큼지막하게 적혀 있는 것으로 지금도 어르신들이 선호하는 달력이기도 하다.

달력이 상품으로 등장한 것은 1950년대 중반이었다. 1970년대 여성 연예인 달력이 등장하면서 한편으로 문화상품이기도 했다. 유명 작가의 그림 작품을 사용하여 문화적 삶의 공간이 되기도 했다.

1980년대 중후반부터는 풍경사진이 주를 이루었는데 특히 외국 풍경사진이 인기를 끌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기업체나 사업장에서 홍보용으로 달력을 무료로 배포하였기 때문에 굳이 돈을 주고 사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1980년대 언론보도를 살펴보면 ‘달력 풍년 내년 경기 겨냥한다’ ‘달력 인심 회복되나’ 등 호경기와 불경기 예상 지표가 기업의 달력 제작 물량이었음을 알 수 있다.

1990년대에 들어서는 탁상용 캘린더와 소형 달력이 인기를 끌었다. 벽에만 걸어두던 달력이 책상으로 내려오게 되었다. 시대에 따라 달력도 진화되어 입체달력이나 디지털 달력이 등장하여 시대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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