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이런 날씨에 가긴 어딜 가, 집 떠나면 고생이여, 방콕의 나날을 지내던 중 딸이 갑자기 우리도 휴가란 걸 가잔다. 자기 피티 선생이 휴가를 가서 토요일에 운동을 못 하게 됐으니 우리도 토요일 끼어 이박삼일 어디라도 가자고. 남이 들으면 대단한 체육인인 줄. 휴가 가는 이유도 가지가지군. 휴가의 도미노도 아니고.

▲ 김미영 칼럼니스트

어명이 떨어졌으니 황급히 휴가 급조. 장소 불문, 그저 숙박업소 예약 가능한 곳으로. 8월 첫 주, 완전 성수기이니 부르는 게 값인 것은 물론이요 아예 빈 방 자체가 없다. 이러다 못 가는 거 아녀? 휴가 갈 척도 안 하던 자들이 갑자기 휴가 안 가면 큰일 날 것처럼 발 동동.

상호 부양한 위기감 속에 남해의 무슨 호텔을 거금을 주고 예약하는데 성공. 그러나 성공의 감격이 가시고 제 정신이 들자 이건 아니다 싶다. 다시 호텔 예약 사이트를 뻔질나게 드나들던 끝에 진도에 새로 생긴 리조트의 마지막 남은 방 한 칸 잡기에 이르렀다.

바닷길이 열려 일 년에 두 번 장사진을 이루는 곳 근처 해안선을 끼고 아래에서 (밤에) 보면 지중해 연안 같아 보이려고 애쓴 흰 건물 몇 동으로 이루어진 리조트는 남녀노소 섞여 흥겨운 분위기.

지하 공간을 아케이드니 식당이니 상업공간으로 채우니 주차 공간이 택도 없이 부족. 그러나 우리가 누군가, 인구밀도 높은 나라에서 단련된 베스트 드라이버들, 눈치껏 어찌어찌 잘들 주차한다.

야산을 깎다 반쯤 남겨 언덕을 조성하고 꼭대기에 커다란 나무 하나 꽂고 산책길을 조성해 놨다. 리조트가 (그 안에서 먹고 자고 노는 것을 지향하니) 외떨어져 있어 차로 움직이지 않으면 별 달리 걸을 데도 마땅치 않아 그 짧은 산책길에 사람들이 웅성웅성.

구름 없는 하늘에 달이 운치 있군.... 이 아니라 가장 볼품없는 모양이군. 반달이 약간 배 부른 모습. 그 옆에 별 하나가 유난히 반짝여 저게 뭐여 샛별이여? 금성이여? 그게 그거여? 입씨름하며 바라보는데 주변 어디선가 여자아이 청랑한 목소리.

아빠 저 별 뭐야?

자신 있게 이어지는 아버님 (커다란) 목소리, 저거 별 아냐 목성이야!

▲ 경남 남해군 미조면 인근 바닷가에서 바라본 하늘에 보석같이 빛나는 수많은 별들이 밤하늘을 수놓고 있다./뉴시스

이 뭥미.

우리는 뭐, 그렇게 떨궈진 주요 테마를 휴가 내내 변주하며 놀았다. 우리 저녁 회 먹자. 아빠 이 생선 뭐야? 그거 생선 아냐 민어야. 이 와인 뭔데 이렇게 맛없어? 그거 와인 아니야 마주앙이야. 등등등.

그러나 그 딸은 어쩌라고. 나중에 남친 앞에서 당당하게 틀리면 그 쪽팔림을 어떻게 만회하지? 아니 그 이후로도 교정이 안 되어 자기 딸에게도 똑같이 말해주면...뭐 큰일은 아니지. 귀여운 무지? 농담 같은 무지?

태풍이 온다더니 나무가 좌우 45도 휘게 바람이 분다. 일찌감치 섬을 나와 목포에서 하루 논다. 구시가지 구경하자니 목포 근대역사관이 검색된다. 동양척식회사 목포 지사 건물을 활용한 역사관(II)은 주말이라 그런지 방문객이 꽤 많다.

아이유 일인 패션쇼 같은 드라마 <호텔 델루나>를 거기서 찍었단다. 돌계단을 이십여개 올라가면 나오는 붉은 벽돌 건물이니 아래에서 위로 찍으면 그림이 예쁘게 나올 수밖에. 양각샷의 활달함 또는 위압감.

유달산 자락 높은 언덕에 위세 부리며 들어선 동척 건물을 우리는 이렇게 소비하게 되었구나. 위압감 제로 유희감 만땅으로 계단 중간에 앉아 엑스트라 출몰하는 사진을 찍는다.

시절이 시절인지라 방문객들이 꽤 진지하고 열띤 분위기로 둘러 본다. 방공호가 볼 만했을 것 같은데 수리 중이라 들어갈 수 없단다.

돌아서서 나오는데 뒤에서 우리를 앞질러 걸어가는 30대 아빠와 초딩 딸. 앞 뒤 소리는 못 듣고 지나치는 중에 들은 아빠의 멘트.

..... 이런 건물을 지을 정도였다라는 거지, 우린 초가집밖에 못 짓는데 말야.

▲ tvN 드라마 ‘호텔 델루나’ 촬영지인 목포근대역사관 전경[사진=목포시 제공]

이 뭐꼬. 이 뭔 개소리고.

저기요 민초들의 생활 공간인 초가집과 한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 침략 첨병인 척식회사 건물을 비교하는 게 맞나요? 내 비록 지식이 일천하여 1920년대 조선의 건축 기술이 어느 정도인지, 동척회사와 무엇을 비교해야 제대로 비교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런 식으로 지가 뭘 하는지도 모르는 채 어린 딸에게 민족적 열등감을 심어주는 그대는 그 따위 지식? 발상?을 어디서 주워 들었을까요?

엄연히 지배를 당해 열등감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 없던 윗 세대들이 읊조리는 ‘쪽바리들 대단해’ 소리를 서너 세대 지난 지금 그대로 반복하는 그대는 학교에서도 제대로 못 배우고 사회에서도 못 배우고 스스로 깨우칠 기회도 한번 없었답니까.

쪽바리라고 폄하할 민족도 아니고 대단하다고 감탄할 민족도 아니다. 그저 환경에 적응해 살아가며 형성된 어떤 집단 습성과 역량이 있을 뿐이다. 청결하고 예의바르다고? 까불면 사무라이 칼 맞던 시대 유산 아닐까? 소화제 좋다고요? 생체실험해 발전한 의학인데 그도 못하면 이상하지요.

이웃나라들끼리 사이 좋은 경우란 없지만 우리는 거기 더해 좀 그로테스크한 이웃을 가진 것 같다. 이 21세기 하이 모던 시대에 공화국도 이루지 못한 나라이니.

민주주의라서 시끄럽고 덜 효율적이지만, 민주주의라서 별별 이상한 세력이 과대발언하고 과대대표되는 형국도 왕왕 생기지만 우리, 민주공화국, 참 좋은 나라입니다.

공부들 합시다. 학자들 역사 연구 많이들 하시구요 과학자들 훌륭한 과학기술 개발하시구요 기업들 단기수익만 연연하지 말고 장기적 안목 기르시구요 시민들 할아버지 할머니께 들은 옛날 이야기좀 넘어서자구요.

아빠들, 딸 앞에 무식을 과시하지 마시구요. 검색하면 나올 상식을 모르는 것은 애교로 넘어가지만 어린 마음에 스민 그 어떤 정서는 고치기가 힘들잖아요.

요즘 핫한 또 하나의 아빠-딸을 보면, 글쎄 아빠가 너무 잘나(가)도 큰일인가요? 워워 엄마 탓으로 돌리지는 마시구요.

※ 김미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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