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정인호 칼럼니스트] 벌써 몇 년째인가. 나는 한 달에 한 번쯤 경북 안동에 내려가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는 갈 적마다 사랑방에서 아버지를 모시고 잠을 잤는데 새벽녘이면 윗목에서 자고 있는 나를 깨우시곤 했다. 그리고는 선잠으로 덜 깬 나에게 우리 집안의 내력이라든지 이런저런 집 안팎의 대소사를 자상하게 귀띔해 주셨다.

▲ 악극 '불효자는 웁니다' 제작발표회/뉴시스 자료사진

부자 간의 조조대화(早朝對話)가 가끔씩 내 직업에 미치면 나는 무척 곤혹스러웠다. 아버지로서는 내 직업이 못마땅한 듯, 지금이라도 좀 더 그럴듯한 직업을 찾아 출세해 주기를 바란다는 뜻을 비치곤 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친구들은 교수나 교장, 거기다가 박사 자녀들이 수두룩한데 그게 몹시 부끄러웠던 모양이다.

그럴 적마다 나는 미안하고 죄송스러웠다. 팔불출 소리를 들어도 자식 자랑은 하고 본다는 세태가 아닌가.

나처럼 못난 자식 둔 죄로 그 흔한 팔불출 소리 한번 못 듣게 해서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헌 신발 버리고 새 구두 사 신듯이 생업을 바꾼다는 것이 그처럼 쉬운 일인가.

하던 일 그대로 하면서 직업을 하나 더 가지는 것은 어떨까 싶어도 그 역시 쉬운 일이 아니다. 이를테면 시의원이나 도의원, 아니면 그럴듯한 기관장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기를 은근히 바랐겠지만 그것도 오랫 동안 터를 닦고 공을 들인 사람에게 돌아가지 아무나 갑작스레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언젠가 부친께서 어느 단체의 신년 하례회에 참석했는데 군수와 경찰서장이 차례로 악수를 해 오다가 자녀가 출세 못한 내 아버지와는 악수를 하지 않고 돌아갔다며 서운해하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나는 효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하고 고민의 농도가 더 깊어진 것도 사실이다.

알다시피 내 고향 안동은 유교적 윤리관이 뿌리 깊게 박힌 곳이다.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질서에 따라 직업도 선비‘ 士’자가 들어가야 행세하는 것으로 쳤으니 중소기업을 경영하는 나의 직업쯤이야 말단으로 치부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께서 불만족하시는 것은 안타깝지만 지금 같은 고도 산업사회에서 사농공상의 유교적 질서가 무너진 지가 오래다. 이제는 거꾸로 상공농사(商工農士)라 우길 수는 없다 해도 나의 직업인 상공업이 천업(賤業)으로 괄시받을 하등의 이유가 없다고 믿어왔다.

나는 이날까지 내 생업에 긍지와 자부심을 갖고 성실하게 일해 왔다. 언제나 아침 일찍 출근하여 누구보다 먼저 하루의 일거리를 챙기며 직원들을 독려했다.

내 나름대로 소비자가 믿고 찾는 제품을 만들어 신속 정확하게 공급해 주는 일에 혼신의 정열을 쏟아 일해왔지 무슨 새 직업을 구해야겠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해본 적이 없다.

내가 하루 종일 회사 업무에 골몰하다가 퇴근해서 집에 오면 파김치가 되기 일쑤였다. 세수를 하는 둥 마는 둥 저녁상을 받으면 누적된 피로로 입맛을 잃는 날도 허다했다. 나는 그처럼 원도 한도 없이 일하면서 후회 없는 삶을 살아왔다.

하지만 아버지를 생각하면 회한이 없을 수 없다. 내가 못나고 무능한 탓에 생전에 바라시던 소원을 이뤄드리지 못했으니 죄인이요, 불효자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헤아릴 길 없는 부모의 은공을 손톱만치도 갚질 못했으니 어찌 미련한 불효자식이라고 하지 않으리오.

평소 아버지는 매주 월요일 밤 10시만 되면 어김없이 방송되던 가요무대 프로를 무척 좋아하셨다. 사람들이 노래를 하는 건 그 구슬픈 가락이 자기의 울적한 심정을 말해주는 것 같아서 아닐까. 아버지 역시 그래서 흘러간 노래를 좋아하고 자주 들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채워지지 않는 아들에의 기대, 거기서 오는 서글픈 심사 같은 것이 한이 되어 한숨과도 같은 옛 노래들을 들으며 시름을 달래곤 했을 것이다.

이제 아버지가 가신 지 4년. 아득한 명계(冥界)에 계시는 혼령께 불효 자식의 사죄를 올리고 싶다. 부친이 거처하시던 사랑방 낡은 TV 앞에 앉아서 ‘불효자는 웁니다’를 따라 불러 보았다. 어찌 할 수 없는 회한과 더불어 오늘따라 아버지가 한없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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