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118년만에 ‘만민공동회’가 되살아났다. 1898년 구한말 꺼져가는 대한제국을 지키겠다고 독립협회가 종로사거리에서 3월부터 12월까지 개최했던 만민공동회가 이젠 광화문 앞과 부산 창원 등 전국에서 열리고 있다.

그때는 윤치호 서재필 청년연사 이승만 등이 주역이었지만 지금은 중견 개그맨 김제동씨가 거의 혼자서 이끌고 있다.

▲ 남영진 논설고문

당시는 러시아와 일제의 압력을 고종이 받아들여 황국협회, 보부상 등을 동원해 12월에 해산시켰지만 이번엔 박근혜 대통령의 즉각 사퇴를 요구하면서 국회를 압박해 탄핵결정까지 이끌어냈다.

2016년 성탄이브인 12월 24일 토요일 오후 1시30분부터 광화문광장에서 벌어진 범국민행동-김제동의 ‘만민공동회’ 이야기다. 이번이 9차례다. 제목은 성탄절 전야에 맞춘 ‘하야 크리스마스’였다.

지난 12일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국회탄핵이 결정돼 헌법재판소로 넘어간 후 모이는 두번째 토요일이어서 광화문 광장은 탄핵직전 주말인 10일의 132만명 최대참가 이후 동력이 다소 떨어진 상태다.

그러나 촛불집회에 앞서 오후에 세종대왕상 앞에서 열리는 만민공동회는 김제동이 재치있는 입담으로 관계자들을 인터뷰하고 줄줄이 헌법조항을 꿰며 3~4시간의 집회분위기를 신나게 만든다. 그는 “한사람만 그만두면 될 것을 이렇게 많은 시민들을 고생시킨다”고 말해 박수를 받았다.

지난 17일부터 참가자가 줄고는 있다. 주최 측인 민주노총 등 진보진영 1500여개 단체의 연대체인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도 17일 저녁에 모인 ‘박근혜 즉각 퇴진 공범처벌·적폐청산의 날’ 촛불집회 참가자를 서울 65만명, 지역 12만명 등 전국 77만명으로 발표했다. 헌재로 탄핵안이 넘어간 뒤 정치권의 개헌론 대두와 일부 종편들이 야권 주자들의 ‘태통령병’ 등을 집중보도하면서 전국의 주말 촛불현장이 점점 줄어드는 현상이 나왔다.

현장의 분위기를 직접 살피려 지난 24일 오후 시청앞과 광화문 일대를 찾았다. 그간 오후부터 북적이던 광화문의 분위기는 ‘한참 때’와는 조금 달랐다.

그래도 야간집회의 웅장함은 안국동 헌재앞 ‘조기탄핵’ 시위로 옮아갔다. 대한문 앞에서는 보수단체들이 대형 태극기를 흔들며 ’억지탄핵 즉각취소‘를 외치는 소리가 컸다. 이날 집회의 연사는 “촛불은 바람이 불면 꺼진다”던 김진태 새누리당 의원이다. 김 의원은 헌재의 ‘탄핵기각’을 확신한다고 집회 참가자들을 격려했다.

▲ 방송인 김제동씨가 24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박근혜 대통령 퇴진 촉구 제9차 범국민 촛불집회를 앞두고 열린 사전집회에서 시민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뉴시스

경찰차가 세종로의 조선일보사 앞에 차단막을 쌓았다. 이곳을 경계로 태극기와 촛불이 갈린다. 김제동은 세종대왕상 앞의 대형 영상무대에서 ‘만민공동회’로 ‘광장민주주의’를 지키고 있었다. 본집회·행진에 앞서 오후 1시30분부터 시작된 토크콘서트에서는 경북 성주 사드( 고고도 미사일방어체계ㆍTHAAD) 배치 반대와 세월호 때 대통령 7시간 진상을 밝히라는 등의 관련자들이 나와 김제동과 말을 주고받았다.

원불교의 한 교무는 사드 한국배치가 급작스레 이뤼진 것도 최순실의 국정농단의 하나라고 강조했다. 정부가 발표한 북한핵에 대응한 안보적 필요성 때문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최순실이 미국 무기회사의 중개 리베이트를 받기위해 청와대가 국방부와 외교부도 모르게 성주에 배치 발표를 서둘렀다고 말했다. 외교부 장관이 국가안보의 가장 우선 순위인 북핵대응 무기를 배치한다는 발표시점을 모르고 백화점에 옷수선하러 갔다는 자체가 이를 비밀리에 진행시켰다는 반증이라는 것이다.

무대에서는 가수 이한철과 마야가 출연하는 ‘물러나쇼’와 ‘6대 긴급 현안’(구한말의 종로 만민공동회에서도 6개항의 건의안을 제안했다) 해결을 위한 ‘국민의 명령’, 1000여 명의 산타가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을 주고 박근혜에게는 수갑을 선물하는 ‘청년산타’ 행진 등이 이어졌다. 참가자 가운데는 아이들을 유모차에 태운 기족들이 많아 추운 바람에도 축제 분위기였다.

가창력의 마야가 인기였다. 그간 광화문을 다녀간 전인권, 양희은, 이은미 등 대형 가수들의 바톤을 이을만한 노래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마야는 자신의 인기곡 '진달래꽃'을 열창한 뒤 "여러 번 불렀지만 이렇게 절실하게 부른 적은 없었다"고 소감을 말했다. 마야는 이어 '뱃놀이'를 부르며 "2014년 4월 16일을 영원히 기억하겠으며 여러분과 함께 배를 띄워 올리겠다"며 세월호 참사를 추모했다.

▲ 지난 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박근혜 퇴진 광장 촛불콘서트 물러나쇼에 참석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공연을 관람하고 있다./뉴시스

오후 5시 본 집회에서는 시민들의 자유발언과 함께 자전거탄풍경의 공연이 이어지고 헌재앞 시위를 마치고 본진이 광화문광장으로 합류했다.

어둠이 짙게 깔린 저녁 8시께부터 연영석, 루이스초이, 서울재즈빅밴드가 참여한 ‘하야크리스마스 콘서트’와 ‘캐럴송 노래가사 바꿔부르기 대회’도 진행됐다. 흥겨운 스페인어 캐롤인 ‘FELIX NAVIDAD'를 “그네는 아니다. 그네는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네는 아니다”로 바꿔 불렀다.

김제동은 전 주일인 18일 오후 창원시청 광장에서도 박근혜 퇴진 경남운동본부와 함께 ‘제8차 경남시국대회-김제동의 만민공동회’를 진행했다. 창원, 진주 등지에서 온 약 1만명이 창원광장을 부채꼴 모양으로 채운 가운데 4시께부터 진행돼 추운 날씨에도 ‘헌재는 탄핵인용 하라’, ‘새누리당 해체’ 등을 외쳤다. 그는 전날인 17일 저녁 부산 서면 쥬디스태화 앞에서 부산 '2차 만민공동회'를 이끌었다.

이에 앞서 탄핵직전 132만명이 모인 10일 광화문집회에서도 김제동은 '청년들과 함께 하는 만민공동회'를 진행했다. 김제동은 이날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지 않았다는 대통령의 말을 듣고 헌법을 다시 한 번 살펴봤다”면서 대통령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1조1항부터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김제동은 지난 8월에는 성주군청 광장에서 열린 성주 촛불 시위에 참가했었다. 그는 여기서 사드배치 불가론을 설파했다. 그는 당국이 말하는 ‘외부세력’은 성주에 주민등록증이 없는 사람을 말하는 데, 대한민국 국민이면 다 관심사라고 말했다.

임진왜란때 충청도 의병이 경북을 지키러왔는데 그것이 외부세력이냐며 “주민등록 기준이면 대통령도 외부세력”이라고 반론을 펴 박수를 받은바 있다. 재기 넘치는 김제동이 한겨울 매서운 바람을 녹이면서 ‘민의의 광장’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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