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러시아의 동부 시베리아 지역인 이르쿠츠크시에서 지난 17, 18일 양일간 보드카 대신 메탄올이 든 스킨 로션을 마시고 사망한 사람이 22일(현지시간) 현재 71명으로 늘었다고 한다.

외신에 따르면 이 지역 주민 117명이 함께 마신 뒤 전날까지 밝혀진 사망자 수만도 절반이 넘는 62명이었다. 이르쿠츠크시는 대체 알코올류로 인한 중독 사고가 급증하면서 비(非)음료용 알코올 함유 제품의 판매를 중단시키고 관내 비상사태를 선포했다.

▲ 남영진 논설고문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도 지난 21일 “내년 7월까지 향수, 로션 등 알코올을 함유한 제품 생산과 판매를 엄격하게 규제하는 법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단체 중독 사고는 끔찍한 비극"이라며 "이러한 말도 안되는 사태는 당장 막야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에서도 공업용 메탄올이 든 음료를 잘못 마셔 실명이 되는 사고가 가끔 있다. 그러나 이번처럼 마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마신 것은 희귀한 일이다.

이들은 피부 보습용 등으로 판매되는 목욕용 스킨 토너 ‘보야리쉬닉’을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이 제품에는 메탄올, 냉동 방지제 등이 함유됐다.

러시아 일부 주민들은 보드카보다 값이 싼 알코올 함유 화장수나 의료용 알코올 제품 등을 물에 타 보드카 대용으로 마셔왔다고 한다. 공업용 메탄올 자체가 아니라 휘발용으로 일부를 로션에 탄 것이라 보통은 바로 사망하거나 치명적이지는 않는 것 같다.

수사 당국은 뒤늦게 해당 제품을 판매한 상점 2곳을 압수수색하고, 제품을 유통한 거래상 7명을 체포해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또 다른 상점 100여 곳도 점검해 2t 이상의 '보야리쉬닉' 제품을 압수했다.

시 정부 직원들도 빈곤층이 밀집한 이르쿠츠크시 노보레니노 구역 아파트를 돌면서 위험성을 경고했다고 전해졌다. 주로 35~50세의 빈곤계층 피해자들이 마신 목욕 로션 병에는 '마셔서는 안 된다'는 경고문이 붙어 있었다 한다.

러시아에서는 2010년부터 술 소비세 인상으로 보드카 값이 오르면서 메틸 알코올이 함유된 제품을 술 대용으로 종종 마신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 수년간 국제유가 폭락 등으로 극심한 경기침체를 겪으면서 빈곤계층 가운데 '가짜 보드카' 음용 사고가 종종 있다는 것이다.

일부 단체는 의료용 알코올이나 화장수 등을 마시는 인구가 1천500만명에 달할 것으로 추산한다. 이번의 경우 왜 마을 주민들이 집단적으로 로션을 구매하고 함께 마셨는지 구체적인 상황은 전해지지 않았다.

이 황당한 뉴스를 보면서 두 가지 단상이 떠올랐다. 하나는 러시아인의 유난한 보드카사랑으로 인한 알코올 중독 증세다. 다른 하나는 알코올 중독이 심해지면 참지 못해 술의 성분인 에틸 알코올만이 아닌 알코올 냄새가 나는 유독성 메틸 알코올도 마시게 된다는 점이다. 90년대 초 동구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동구에 나와 있던 러시아군이 철수하기 전 탱크를 술과 바꿔 먹었다는 해외토픽을 본 적도 있다.

▲ 동서울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 학생들이 지난해 3월 24일 서울 잠실야구장 3층 복도에 금연·절주벽화길을 그리고 있다./송파구청 제공

소련이 해체된 후 초대 러시아 대통령이었던 보리스 옐친 대통령도 보드카 광이어서 유럽의 정상회담에 술이 취한 상태로 나타나기도 하고 비행기에서 자다가 방문국을 건너뛰는 경우도 있었다.

추운 지방에서 사는 러시아인은 몽골인과 마찬가지로 지방이 많은 육고기와 독주를 즐긴다. 맥주를 상음하는 독일인도 러시아인들이 자신들보다 술이 더 세다고 말한다.

 

이런 유머도 있다. 러시아인이 독일 가정에 초대돼 처음엔 맥주를 마셨다. 손님이 싱겁다고 해 냉장고에 있는 찬 ‘스냡스’(독일 소주)를 대접했더니 이제야 “독일 맥주는 차기만 하고 맛이 없다”고 푸념하더란다. 소주를 맥주로 알고 마신 것이다.

더 이상 독주가 없어 빙초산에 물을 타서 가져왔더니 맛을 보고 이런 좋은 술을 왜 이제야 주느냐고 좋아하더란다.

러시아 겨울은 아주 춥기 때문에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알코올을 찾는다. 러시아인들은 집을 지을 때 단열을 하지만 빈곤층 주민들은 단열이 잘된 중앙난방식 아파트를 갖기 어려웠을 것이고 기름값도 부담이 됐을 것이다.

서민들이 간단하게 추위를 이겨내는 방법은 알코올을 마셔 몸이 열을 내는 것이다. 그리고 뜨거운 건식사우나에서 땀을 내면서 추위를 견딘다.

▲ 뉴시스 자료사진

독주를 마시다보면 뇌세포가 망가져 알코올 중독이 된다. 이미 중독자가 되면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집중력이 약해져 실수를 하고 블랙아웃(일시적 기억상실)을 경험한다. 심해지면 직장을 그만두고 노숙자처럼 구걸해서라도 술을 마시는 악순환이 된다. 알코올 중독은 러시아에서는 국가적인 문제여서 이번에 알코올성 로션을 금지하는 비상조치까지 취한 것이다.

산사나무(hawthorn) 추출 수액으로 만들어진 이 로션 제품에는 유해한 메틸알코올과 냉동 방지제 등이 같이 들어있었다. 사건 당일 TV를 보니 약물 중독으로 병원에 실려 온 마을 주민들이 링러를 꽂고 침대에 누워있었다. 로션을 마시자마자 처음 49명은 집에서 숨졌거나 병원에 도착한 뒤 곧바로 사망했다고 한다.

현지 의사는 병원에 실려 온 중상자중 심각한 독극물 중독 증세와 쇼크 증상을 보이는 환자들이 많아 사망자가 더 늘어날 것으로 예상했다. 결국 20여명이 더 사망했다.

10여년 전 필자도 가톨릭에서 운영하는 알코올사목센터에서 알코올의존증 치료를 받은 적이 있다. 술자리에서 말이 많아지고 과격해지기도 한 데다 블랙아웃을 경험하는 일이 생겨 절주를 위해 이곳에 3년간 다녔다.

이때 회원 중 하나가 병원치료 때 너무 술이 먹고 싶어 스킨 로션을 마셨다고 고백했다. 당시엔 잘 이해가 되지 않았는데, 이번 사건을 보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전두엽의 흥분억제 세포가 망가지면 절주는 안된다. 한 두번은 버틸 수 있지만 다시 되돌아간다. 술을 끊는 ‘단주’밖에 치료법이 없다고 한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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