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한국국학진흥원 연구위원]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안 한다’라는 옛말이 있다.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시집살이혼을 당연시하는 우리 사회의 혼인습속을 잘 드러내는 표현이다.

그런가 하면 ‘장가들다(혹은 장가가다)’라는 말도 전한다. 장가든다는 표현은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가는 이른바 처가살이혼을 뜻한다.

시집살이혼이 일반화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장가들다’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는 까닭은 무엇일까.

남성 중심으로 집(가문)이 계승되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기는 유교의 경우, 혼인을 하면 주자가례(朱子家禮)에 바탕하여 여자가 남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시집살이혼을 실행하도록 되어 있다.

▲ 지난 10월 29일 서울 종로구 국립민속박물관 앞마당에서 열린 전통혼례 재현행사에서 신부가 신랑에게 절을 올리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당일 아침 신랑은 자신의 집에서 혼례를 치르기 위해 신부를 맞이하러 가는데, 이를 친영(親迎)이라고 한다. 이들이 신랑집에 도착하여 해가 저물기 시작하면 대례를 올렸던 것이다.

이처럼 원래 혼례는 저녁이나 밤에 거행했는데, 이런 연유로 주자가례에서도 혼례를 ‘어두운 밤의 의례’라는 의미에서 ‘혼례(혼례)’라고 표기해 두었다. 그러던 게 우리나라로 건너오면서 밝은 대낮에 혼례를 치르게 되었으며, 용어 또한 ‘혼례(婚禮)’로 바뀌었다.

조선 시대에 행해졌던 친영은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서 그곳에서 혼례를 치른 후 3일이 지나 신부와 함께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는 방식을 취했다. 이를 ‘삼일우귀(三日于歸)’라고 한다.

주자가례의 친영이 우리나라로 들어와서 변형되었던 까닭은 우리의 고유혼인 습속인 남귀녀가혼(男歸女家婚) 때문이다. 이는 신랑이 신부집에서 혼례를 올리고 나서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자녀들이 태어나 성장할 때까지 처가에 머무는 방식이다.

흔히 알려져 있는 고구려의 서옥제(婿屋制)도 여기에 해당하는데, 『삼국지(三國志)』에도 “혼인을 할 때 구두로 이미 정해지면 여자의 집에서는 대옥(大屋) 뒤에 소옥(小屋)을 짓고는 이를 서옥이라고 칭한다. 저녁 무렵 사위가 여자의 집에 도착하여 문 밖에서 자신의 이름을 크게 외치고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면서 여자와 동침시켜 줄 것을 요청한다.

이렇게 두세 차례 거듭하면 여자의 부모가 소옥에서 두 사람의 동침을 허락한다. 옆에는 전백(錢帛)을 놓아 둔다. 아이를 낳아 장성하게 되면 비로소 여자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간다”라는 기록이 실려 있다.

처가살이혼은 유교적 가족 이념이 본격적으로 정착하기 시작한 조선 중기까지 지속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에 관한 단서가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 등에 나타난다. “고려 풍속으로 보면, 남자는 본가로부터 따로 살지언정 여자는 집을 떠나지 않게 되어 있는데 그것은 마치 진(秦)나라의 데릴사위와 같아서 부모를 부양하는 것은 여자의 임무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딸을 낳으면 애지중지하여 이를 키워서 밤낮으로 그가 장성하기를 바라니 그것은 딸이 부모를 부양해 주기 때문이다”(『고려사』)

“전조(前朝)의 구속(舊俗)에는 혼인하던 예법이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장가들어 아들과 손자를 낳아 외가에서 자라게 하기 때문에 외가 친척의 은혜가 중함으로….”『(조선왕조실록』 「태종」)

처가살이혼의 경우 자녀들이 외가에서 성장하게 되면서 어머니 쪽의 친족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는 유교에서 추구하는 아버지 쪽의 친족 형성을 방해하는 요소가 되기도 한다.

이런 이유로 조선 초기 유교 이념을 준수하고자 했던 사족(士族)들은 처가살이혼을 엄격히 금지하고 친영을 시행하도록 건의한다.

당시에는 왕족의 혼인에서나 친영을 따랐을 뿐 민간에까지 확대시키지는 못했으며, 1435년(세종 17) 윤평(尹泙)이 태종의 13녀인 숙신(肅愼) 옹주를 친영한 것이 최초로 되어 있다.

이처럼 임금이 몸소 친영을 행하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실시되지 않자 중종대에 이르러 본격적인 논의가 시작되어 명종대에는 우리의 고유습속인 처가살이혼과 친영제를 절충한 ‘반친영(半親迎)’제도를 마련하게 된다.

『증보문헌비고』를 보면,“명종조에 이르러 사서인(士庶人)의 혼례가 예전의 제도와 약간 바뀌었다. 신랑이 처음 신부집에 도착하면 신부가 나와서 예를 행하되 교배례와 합근례를 행하고 이튿날 시부모를 뵙는데, 이를 반친영이라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반친영이란 신부집에서 혼례를 거행하고 그 다음날(또는 3일 후) 신랑집으로 가서 신부가 시부모에게 예를 올리는 현구고례(見舅姑禮)를 실시하는 방식이다.

이처럼 혼례를 치른 이튿날 시댁으로 가는 것을 ‘당일우귀(當日于歸)’라고 하며, 3일 후에 가는 것을‘ 삼일우귀’라고 한다.

그런데 실제 관행에서는 이보다 훨씬 오랜 기간 친정에 머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즉 혼례를 거행한 달(月)을 넘기고 가는 ‘달묵이’가 있는가 하면, 해(年)를 넘기는‘ 해묵이’도 적지 않게 발견된다.

오늘날 우리 사회의 시집살이혼은 유교가 도입되고 나서 정착된 것임을 알 수 있는데, 그 이전에는 남자가 여자의 집으로 들어가는 처가살이혼이 일반적 경향이었다.

아울러 이러한 경향은 부계(父系·남성) 중심의 유교적 가족이념과 달리 우리 고유의 가족문화에서는 남녀구분이 없는 양계적(兩系的) 속성이 주류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실제 유교가 정착하기 이전에는 재산과 조상 제사에서 남녀균등상속이 행해졌는데, 이와 관련된 문헌기록들도 적지 않게 발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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