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1992년 일제 강점기 한국인 노동자 강제징용 현장 취재를 위해 홋카이도(北海道·북해도)를 방문한 적이 있다. 삿포로(札幌) 공항을 통해 먼저 북쪽 아사이가와(旭日) 근처 수력발전댐 건설에 동원돼 죽어간 한국인 노동자들의 항의파업 사태를 취재했다.

▲ 남영진 논설고문

죽을 고비를 넘기며 야음을 틈타 ‘타코베야’(문어방)를 탈출해 일본인 농가에서 숨어 지내다 일본이 패전함으로써 목숨을 건진 유일한 생존자의 증언을 들으며 아름다운 홋카이도의 풍경이 처참해 보이기 시작했다. 타코베야는 2차 대전 당시 광산 노동자나 공사 인부의 노동 조건이 열악한 합숙소를 말한다.

이어 서북쪽으로 올라가 네무로(根室)라는 지역의 비행장 건설에 동원된 ‘8세 조선인 노동자’ 문제를 연구했던 일본인들의 안내를 받아 이 지역 절에 보관돼 있던 화장(火葬)명부에서 아버지와 함께 일했던 한국인 어린이 이름을 발견했다.

갑자기 절안의 향내에서 피냄새가 느껴졌다. 다음날 네무로 시내에서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강제점령된 북방영토를 반환하라’라는 빨간 글씨로 씌어있는 플래카드를 보고 이 지역의 역사를 알게 됐다.

근대 세 차례나 침략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현재 우리나라에 독도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만 이곳 북방영토 등 다른 지역의 영토 분쟁도 심각한 상황이다.

최근의 러일 정상회담에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으로부터 냉대를 당한 북방 4개섬 문제와 중국과 으르렁대는 동지나해의 센카쿠(尖閣·중국명 釣魚島) 열도 분쟁이 대표적이다. 암초섬이라 국제법상으로 영유권 문제가 있는 일본열도 남쪽 먼바다의 오키노토리시마(沖鳥島)도 마찬가지다.

일본 정부는 독도는 분명히 우리 대한민국 땅이고 쿠릴열도의 남쪽 4개섬인 소위 ‘북방영토’는 러시아가 실효지배하고 있는데도 영토 문제를 제기한다.

일본 외무부는 역사적으로 독도가 우리 영토가 분명한 데도 국제문제화를 위해 정기적으로 외교 항의 문서를 보낸다.

반면 일본이 실효지배하고 있는 센카쿠는 중국이 계속 물고 늘어진다. 그래서 일본은 센카쿠의 경우 ‘실효지배’를, 독도 등은 ‘자기 땅’이라고 우기며 영토문제를 제기하는 ‘모순외교’를 펴고 있는 셈이다.

▲ 일본을 방문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오른쪽)이 16일 도쿄의 유도 성지인 고도칸(講道館)을 방문,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와 담소를 나누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국제유도연맹(IJF)이 인정한 8단자로 유도 애호가다.[도쿄=AP/뉴시스]

자민당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정부는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 국가’를 지향하면서 총선을 통해 국민의 지지를 확보한 뒤 미국과의 협력을 바탕으로 이번에 푸틴 대통령을 초청해 북방영토 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풀려고 했다.

푸틴은 일본 방문 첫날인 지난 15일 정상회담 장소인 아베의 고향인 야마구치(山口)에 두 시간 늦게 도착하더니 이튿날 도쿄정상회담도 30분이나 지각함으로써 아베에 외교적 결례를 범했다. 그러면서도 러시아는 3조원대의 경제협력 실리는 챙겼다.

양 정상은 이틀간 회담의 결과를 ‘공동경제활동’이라는 조항에 담았지만 2차 대전 이후 러시아가 실효지배하고 있는 쿠릴 4개섬의 영유권 문제는 구체적 논의가 이뤄지지 않은 것 같다.

러시아는 영유권은 협상대상이 아니며 양측의 신뢰조성이 우선이라는 입장이다. 이에 따라 일본 원주민의 왕래를 위해 인도주의에 입각한 방안을 검토하기로 하고 에너지와 사회 기반 시설 등 60개 항목에 걸쳐, 협력 분야를 당초 예정의 2배로 늘리기로 했다

푸틴은 회담 뒤 "러시아와 일본 양쪽에 만족스러운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내세우면서 양국이 이곳에서 공동경제활동에 나서되 ‘평화조약’에 대한 양국의 입장을 해치지 않기로 했다.

앞서 옛 소련 시절인 56년 소일공동선언에서는 4개섬 중 북쪽인 쿠나시리, 에트로후섬 밑 남쪽의 시코탄과 하보마이군도 2개섬은 평화조약 체결 후에 일본에 인도한다고 발표했었다.

그러나 60년 미일안보조약 개정을 통해 일본이 미국의 아시아동맹의 전진기지가 되고 특히 베트남전 중에 미군의 보급기지화됨으로써 2개섬 반환은 물건너 갔다.

▲ 일본 극우파 단체 회원들이 지난해 11월 20일 도쿄의 러시아 대사관 앞에서 차량 확성기를 통해 북방 4개섬(쿠릴 열도) 반환을 주장하며 반러 구호를 외치고 있다.[도쿄=로이터/뉴시스 자료사진]

이후 일본은 역대 정부마다 러시아 시베리아 개발을 미끼로 이의 반환의사를 타진했으나 소련해체 이후 러시아마저 영토협상을 지연해오다 푸틴의 강력한 리더십에 ‘통큰 양보’를 기대해왔다. 그런데 이번에 ‘동상이몽’ 속에 진행된 정상회담에서 푸틴이 실속은 챙기고 ‘먹튀’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일본 NHK방송은 회담후 "쿠릴 4개섬의 실질적 반환 협의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았다"며 푸틴이 미국을 중심으로 한 미사일 방어 시스템에 대한 우려를 나타냈다고 전했다.

아베 총리는 그간 미국의 견제에도 불구하고 푸틴 대통령을 16차례나 만나 쿠릴 4개섬 문제 해결을 위해 공을 들여왔다.

일본은 이번 회담에서 북방영토 문제 해결을 위한 큰 진전을 마련했다고 밝혔다. 합의 문서에는 "러일 평화조약 체결을 위한 진지한 결의를 표명했다"고 돼 있다.

아베 총리는 “영토문제 해결에는 곤란한 길이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커다란 한 걸음을 내딛는 것이 가능했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도 "영토문제는 곧바로 해결될 수 있는 게 아니다"라며 “이는 러일 양국 국민에게 지지받는 전략적인 해결책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공동경제활동’에는 '특별한 제도'에 근거해 어업, 해면양식, 관광, 의료, 환경, 기타 등 60여건의 다양한 분야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평화조약 문제에 관한 일본과 러시아의 입장을 해치지 않도록 한다며 앞으로 이곳에서의 활동이 러시아법에 의해 이루어짐을 암시했다.

양국 정상은 공동경제활동이 평화조약의 체결을 향한 커다란 밑거름이 될 수 있다는 점에는 서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일본 언론들은 합의 문서에 쿠릴 4개 섬 문제를 명시하지 못하면서 성과없는 ‘퍼주기’ 논란을 제기하고 있으나 아베의 거침없는 외교 행보는 사실 일본 국익에 결코 마이너스가 아니다.

아베 정부는 한국과의 ‘불가역적’인 위안부 문제에 합의한데 이어 최근에는 북핵문제에 대응한다며 한일정보교류협정을 맺었다. 미국과는 지난 5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히로시마 방문에 이어 26~27일에는 아베가 직접 하와이 진주만을 방문해 오바마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는다.

취임 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인과 지난달 중순 회담을 갖고 이번에 푸틴을 초청함으로써 대(對)중국 압박 작전을 착착 진전시키고 있다. 외교적 답방 형식이지만 푸틴도 이번에 아베를 러시아에 초청했다. 대통령 탄핵 사태로 정상 외교가 마비 지경에 빠진 우리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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