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송재소 퇴계학연구원 원장]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위기에 처한 인문학을 살려야한다는 이야기가 이 시대의 화두(話頭)처럼 돼 버렸다.

인문학을 살리기 위해서는 우선 인문학의 개념부터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수많은 논자들이 인문학을 정의한 바 있지만 동양의 전통에서 그 개념을 찾는 것도 바람직한 일이다.

▲ 세종시교육청 관계자들이 지난달 24일 학교밖 인문체험활동의 일환으로 관내 고등학생들과 함께 '나를 찾아 떠나는 청소년 인문학 열차' 탐방을 진행하고 있다./세종시교육청 제공

정치학이 정치를 연구하는 학문이듯 인문학은 인문(人文)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인문이라는 용어가 최초로 사용된 출전은 『주역(周易)』이다. 주역 비괘(賁卦)의 단사(彖辭)에 이렇게 씌어 있다. 천문(天文)을 관찰하여 사시(四時)의 변화를 살피고, 인문을 관찰하여 천하를 화성(化成)한다.(觀乎天文 以察時變 觀乎人文 以化成天下·관호천문 이찰시변 관호인문 이화성천하)

정자(程子)는 이 구절에 대한 주(註)에서 “인문은 인리(人理)의 질서인데, 인문을 관찰함으로써 천하를 교화하여 천하가 그 예속(禮俗)을 이루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주역에서는 이 세계의 현상을 크게 천문과 인문으로 구분하고 있다. 천문은 자연계의 현상을 가리키고 인문은 인간 사회의 여러 현상을 가리킨다.

자연계의 현상에는 일정한 법칙이 있다. 해와 달과 별의 운행에는 그 나름의 질서가 있고, 더위와 추위가 교대로 찾아오는 것도 어떤 법칙에 의한 현상이다. 이런 법칙과 질서에 의해 자연계가 유지되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도 일정한 법칙과 질서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이 ‘인리(人理)의 질서’로 표현되어 있는데, 인리란 인간의 도리이다. 그러므로 ‘인리의 질서’는 인간으로서의 도리를 수행하기 위한 질서라 말할 수 있다. 이 질서가 인간 사회를 유지하는 기본 법칙이다. 그리고 이것이 곧 인문이라는 것이다.

공영달(孔穎達)은 주역에서의 인문의 개념을 구체화시켜 ‘시서예악(詩書禮樂)’을 가리킨다고 말했다. 시서예악은 인간으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인간행동의 준칙을 담은 책이다. 그러므로 인문의 개념 자체가 이미 규범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선초(鮮初)의 정도전(鄭道傳)의 글을 살펴보기로 한다.

일월성신은 천지문(天之文)이요 산천초목은 지지문(地之文)이요, 시서예악은 인지문(人之文)이다. 그런데 하늘(天)은 기(氣)로써 존재하고 땅(地)은 형(形)으로써 존재하지만 사람(人)은 도(道)로써 존재한다. 그러므로 “문(文)은 도(道)를 싣는 그릇이다”라 할 때의 문(文)은 인문(人文)을 말한 것이다.

그 도(道)를 터득하면 시서예악의 가르침이 천하에 밝아지고 삼광(三光· 해와 달과 별)의 운행이 순조로우며 만물이 옳게 다스려지는데 문(文)의 성대함이 이에 이르러 극치에 달한다. 『陶隱文集序』·도은문집서)

‘文’이란 원래 ‘무늬’ 또는 ‘문채’의 뜻으로 쓰인 글자이다. 이 문채는 어떤 사물 고유의 속성이 겉으로 드러난 것이다. 일월성신은 하늘 고유의 무늬이고 산천초목은 땅 고유의 무늬이다. 일월성신이야말로 하늘을 하늘이게끔 해 주는 무늬이고 산천초목이야 말로 땅을 땅이게끔 해 주는 무늬이다.

일월성신의 무늬가 없으면 하늘이라 할 수 없고, 산천초목의 무늬가 없으면 그것은 더 이상 땅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인문은 인간 고유의 무늬이다. 인문이 있으므로 해서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인간인 이상 인간 고유의 무늬인 인문이 있어야 한다. 인문이 없으면 인간이 아니고 짐승과 다름없는 존재로 격하된다.

결국 동양적 전통의 맥락에서의 인문학은 인간에 대한 학문이고 인간의 삶의 질에 대한 학문이다. 결국 인문학은 인간다운 삶에 대한 탐구를 목적으로 하는 학문이다.

인문학이 왜 위기인가

호랑이에게는 호랑이의 무늬가 있듯이 인간에게는 인간의 무늬가 있다. 이 인간의 무늬가 인문(人文)인데 요즈음 이 무늬가 점차 퇴색해 가고 있다. 이것이 위기이다.

인간의 무늬가 퇴색한다는 것은 인간다움을 상실한다는 말이다. 인간의 무늬가 퇴색할수록 인간의 무늬를 연구하는 인문학이 지혜를 모아 이에 대처해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인문학의 위기이다.

인문학은 가치의 문제를 다룬다. 어떻게 살아야 인간다운 삶인가. 어떻게 살아야 가치 있는 삶을 영위할 수 있는가를 연구한다. 그러므로 인문학은 인간의 무늬가 퇴색하지 않도록 해주는 학문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에는 인간의 무늬가 퇴색해가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부녀자들을 성폭행하고 살인하는 자, 심지어는 어린이까지 성폭행하고 살인하는 자들이 늘어난다. 유산상속을 노리고 어머니를 잔인하게 살해하기도 한다.

학교 현장에서는 학생들이 교사를 폭행하기도 한다. 이런 자들을 두고 우리는 “사람의 탈을 뒤집어쓰고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 있나”라고 말한다. 그렇다. 이런 사람들은 사람의 탈을 뒤집어 쓴 것이 아니라 짐승의 탈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무늬를 잃어버리고 짐승의 무늬를 지니고 있는 자들이다.

사람들이 책을 멀리하여 전국의 서점이 급격히 줄어든다든가, 청소년들이 타인과의 교제를 끊고 폐쇄적인 사이버 공간에 갇혀 버리는 일 등도 인간의 무늬가 퇴색해 가는 징후라 할 수 있다. 인간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게 되어 있는데 인간관계에서 인간다움을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도덕적 가치의 구현을 목표로 살아야 할 인간이 가치관을 상실한 채 점점 비인간화되어 가는 이 시대에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줌으로써 도덕적 가치의 진공 상태를 끊임없이 경계하고 예방해 주는 것이 인문학이다. 이러한 인문학적 바탕 위에서 인간이 짐승이 되는 길을 막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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