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으로 읽는 오늘의 일본

[이코노뉴스=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부교수]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외교 정책에 먹구름이 일고 있다.

국내적으로는 60%를 넘나드는 지지율을 자랑하며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듯 보이지만 국제관계에서는 불길한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 이동준 교수

특히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통령 당선에 이어 한국 박근혜 대통령의 조기 퇴진 표명이 아베 정권에겐 커다란 도전이 될 전망이다. 여기에 이달 중순 예정된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일본 국민들의 기대치에 크게 못 미치는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미국이 빠진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은 의미가 없다.” 아베는 지난달 17일 외국 정상으로는 처음으로 트럼프를 만나 이렇게 호소했다고 한다.

그는 이어 페루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에서도 TPP 참가국들에게 미국이 TPP에 머물러야 하는 이유를 거듭 설명하며 단합을 촉구했다. 아르나헨티나에서는 “(미국이 빠지면) 근본적인 이익의 균형이 깨진다”고까지 말했다.

하지만 트럼프는 21일 인터넷에 공개한 영상 메시지에서 TPP가 “미국에 재난이 될 우려가 있다”면서 “취임 첫날 참가 중단을 발표하겠다”고 선언했다. 아베의 요청을 공식적으로, 그것도 단칼에 거절해버린 것이다.

아베는 트럼프를 만난 직후 “신뢰할 수 있는 지도자”라고 추켜세웠다. 단순한 립 서비스일 수도 있지만, 트럼프가 TPP에 대해 양해했을 수도 있다는 ‘장밋빛’ 분석이 쏟아졌다.

아베가 미국 대선 전에 TPP 국내 비준 절차에 들어가고 TPP 참가국의 단합에 나선 것도 트럼프에 대한 무언의 압박이자 간곡한 호소였다. 하지만 이런 아베의 시도는 전혀 먹혀들지 않았고, 환상이었음이 분명해졌다.

▲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지난달 17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에서 도널드 트럼프 당선인과 비공식 회담을 마친 후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뉴욕=AP/뉴시스 자료사진]

미일 주도의 TPP는 체결 12개국 전체 국내총생산(GDP)의 85% 이상을 차지하는 6개국 이상이 비준하면 발효된다. 하지만 미국의 GDP 비중은 60%나 되는 만큼 트럼프가 공언한 대로라면 TPP는 이미 물 건너간 갔다고 볼 수 있다.

아베노믹스도 타격이 예상된다. 아베는 TPP를 통한 규제 완화와 농업 개방을 성장 전략의 축으로 삼아왔다. TPP가 발효하면 약 13조6000억엔(약 140조원)의 GDP 증대와 79만5000명의 고용이 발생할 것이라고 선전해왔다.

박근혜 대통령의 조기 퇴진도 아베 외교에선 부담으로 작용하고 있다. 일본 정부는 특히 지난해 ‘위안부 합의’ 등을 통해 개선된 것으로 생각했던 한국과의 관계가 흔들릴 경우 일본의 중국 정책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으로 우려하는 듯하다.

일본경제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외무성의 한 간부는 “다시 한국이 중국에 접근하는 사태가 되지 않으면 좋겠지만…”이라고 우려했다고 한다. 한미일이 힘을 모아 중국을 견제하려고 한 아베 정권의 구상이 새로운 한국 정권이 ‘친중’을 택할 경우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며 걱정한 것이다.

중국은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GSOMIA)에 대해 반발하고 있다. 게다가 중국은 해외에서는 한국과 연계해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 일본에 대해 비판·문제 해결을 요구하는 활동을 하고 있다.

▲ 한민구 국방부 장관(오른쪽)이 지난달 23일 서울 용산구 국방부 청사에서 나가미네 야스마사(長嶺安政) 주한 일본대사와 한일 군사비밀정보보호협정에 최종 서명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아베 정권은 한국의 새로운 정권이 중국과 함께 역사문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해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일본 정치권에서는 ‘위안부 합의’ 이행도 불투명해졌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일한의원연맹 회장인 자민당의 누카가 후쿠시로(額賀福志郞) 중의원 의원은 “한국 정부 내에서 어떤 식으로 할지 확실히 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고 한다. 박 대통령의 퇴진 표명으로 차기 한국 정부가 위안부 합의를 백지화할 가능성을 경계한 것이다.

아베는 쿠릴 4개 섬(일본명 북방영토)을 둘러싼 러시아와의 영토 문제 해결에 공을 들여왔다. 일본은 조만간 아베의 고향 야마구치(山口) 현에서 열리는 양국 정상회담을 앞두고 러시아를 위해 1000억엔(약 1조원)의 투자기금까지 조성하기로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하지만 이런 아베의 노력은 암초에 부딪히고 있다. 푸틴이 강경 입장을 고수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아베는 러시아에 대한 경제협력으로 4개 섬 반환을 끌어낸다는 구상이었다. 하지만 푸틴은 지난달 20일 아베에게 영토 반환 대신 4개 섬에서의 양국 간 공동경제활동 방안을 제안했다. 별도의 회견에선 ”쿠릴 4개 섬은 러시아 주권이 있는 영토“라고 못 박았다. 러시아는 구나시리와 에토로후의 2개 섬에 이동식 지대함 미사일 시스템까지 배치했다.

푸틴의 이런 태도는 트럼프 당선인의 대러 유화 제스처와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당선인과의 관계 정상화가 이뤄진다면 그만큼 러시아로서도 아베 정권의 이용가치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아베 총리는 강력한 미일 동맹을 주축으로 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면서, 중국·러시아 정책에 독자성을 갖고 외교자원을 분배하겠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트럼프의 미국이 미일 동맹을 어떻게 재조정할지 불투명한 상황인 데다, 박근혜 대통령 퇴진으로 한일관계 마저 예측할 수 없게 됐다.

여기에 아베 정권은 센카쿠((尖閣) 열도와 북방 영토 문제를 안고 있는 중국 및 러시아 관계에서도 별다른 돌파구를 찾지 못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결국 아베 외교를 둘러싼 불확실성은 커지면서 이것이 정권 운영에 걸림돌로 부상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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