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냉전시대의 마지막 붉은 별 지다.’ 피델 카스트로의 사망을 전하는 신문의 제목이다. 카스트로는 11월 25일 타계했다.

냉전시대 소련의 이오시프 스탈린과 니키타 후르시초프,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 월맹의 호치민(胡志明), 북한의 김일성 등 카리스마적 지도자의 마지막이라는 뜻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

위의 지도자들이 다 20세기에 죽었지만 90세까지 장수한 카스트로는 21세기에 들어와서도 16년이나 더 살다 죽었다.

그런데 카스트로가 나오면 쿠바혁명을 함께 이끈 동지 체 게바라(Che Guevara, 1928- 1967)가 바로 떠오른다. 그는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의과대학을 나온 의사였지만 쿠바에서 게릴라 지도자로 활동하다 잡혀 복역중인 카스트로와 함께 1959년 친미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린 주역이다.

쿠바혁명 후 영구혁명을 위해 아프리카 콩고에서 싸우다 실패하고 남미의 볼리비아에서 처형당해 죽은 지 30년 만에 쿠바로 시신이 옮겨졌다.

쿠바의 수도 아바나에 도착하면 구시가지 혁명광장 중앙에 검은 베레모를 쓴 체 게바라의 얼굴사진이 돋보인다. 죽은 지 50년이 됐지만 쿠바인들뿐 아니라 전 세계 젊은이들의 우상중 하나다.

물론 한창 인기 있을 때 젊어서 죽은 분들이 영웅이 오래 기억되는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체 게바라의 얼굴 로고는 아직도 인기 캐릭터이다. 동시대에 함께 싸웠던 미국의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할리우드 배우 제임스 딘, 우리의 경우 자살한 노무현 전 대통령도 이와 비슷하게 우리 가슴속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혁명 이후 체 게바라는 혁명수비군 사령관, 산업부 장관, 중앙은행 총재 등을 역임한 뒤 카스트로가 1965년 쿠바 공산당을 결성하자 일체의 공직을 사퇴하고 또 다른 남미 해방을 위해 볼리비아로 떠나 그곳에서 죽는다.

▲ 쿠바 수도 아바나 혁명광장에서 29일(현지시간) 열린 피델 카스트로 전 국가평의회 의장 추모행사에 수많은 시민, 군인들이 참석해 있다./[아바나=AP/뉴시스]

카스트로는 국가평의회 의장(쿠바의 국가원수)에 취임하여 개혁을 실행하고 건강이 악화되자 2008년 2월부터 동생 라울 카스트로에게 국가평의회 의장 겸 대통령직을 물려주었다.

1996년, 2006년 10년 간격으로 쿠바에 1주일씩 가볼 기회가 있었다. 한국기자협회, 한국감사협회의 공식 방문단의 일원이었다. 20년 전 처음 방문 땐 가이드가 북한과의 수교국이고 우리와는 공식관계가 없는 곳이라 조심하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런데 아바나공항에서 우리를 태운 버스가 대우자동차였고 수도로 이어지는 공항길 옆에 LG입간판이 높게 서있어 낯설지 않았다.

현지 가이드는 평양 쿠바대사관에 근무하는 아빠를 따라 평양에서 한국말을 배운 쿠바인 청년이었다. 말은 북한말이었지만 의사소통엔 전혀 무리가 없었다.

현지 기자협회 방문이나 쿠바 시가공장, 지방의 악어농장 방문 등 일정이 이어지면서 이틀째부턴 전혀 사회주의 국가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분위기가 좋고 마음이 평온했다.

어네스트 헤밍웨이가 ‘바다와 노인’을 집필한 아바나 교외의 비치인 ‘발라데로’해변. 좀 낡았지만 40여년전 지어진 현대식 호텔에는 독일인, 일본인 관광객들로 붐볐다. 미국인들은 입국 금지이고 우리도 미국에서 바로 들어갈 수 없어서 처음에는 멕시코시티, 두 번째는 휴양도시인 캔쿤을 거쳐 비행기를 탔다.

첫 번째 갈 때는 미국의 LA를 경유해 가면서 호텔에 묵었다. 가이드가 시내에 혼자 나가기 위험하니 개인행동을 하지 말고 호텔내에서 지내라고 했다.

▲ 쿠바 아바나를 방문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3월 21일(현지시간) 독립영웅 호세 마르티 기념상 앞에서 열린 기념식에 참석해 미국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가슴위에 손을 얹고 있다. 그 뒤로 쿠바 및 중남미 혁명 영웅 체 게바라의 얼굴 벽화가 보인다./[아바나=AP/뉴시스 자료사진]

멕시코시티의 호텔에선 주변에 있는 술집까지는 보안이 되어 있으니 괜찮다고 했고 쿠바에 들어가선 호텔에서도 조심하라고 했다. 그런데 여행이 끝난 뒤 기자들 평가는 정 반대였다. 아바나 구시가의 해변돌담 위에서 석양에 비친 체 게바라 사진을 보면서 나눈 맥주 맛이나 자메이카 그룹들의 기타연주와 레게음악, 그리고 춤. 단연코 세나라 중 가장 자유로왔다.

체 게바라의 사진은 셔츠, 핀, 포스터로 전 세계에서 팔리고 있다. 스위스의 시계회사 스왓치는 그의 얼굴 사진이 든 시계를 만들었고, 영국의 맥주회사에서는 ‘체’ 라는 브랜드를 론칭했다.

그의 이미지는 유럽 각국의 디스코텍, 소형 승용차, 백화점 등의 광고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체 게바라의 이미지는 항상 똑같다. 긴 머리, 거친 수염, 별이 달려 있는 베레모의 매력남이다.

그러나 ‘게바라 열풍’의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에 있다고 생각한다. 모든 혁명은 종국엔 부패하기 마련인데, 그는 부패할 틈이 없었다.

체 게바라는 53년 부에노스 아이레스 의과대학에서 알레르기에 관한 연구로 전문의 자격증을 취득했다. 평소 여행광이던 그는 공부를 끝내고 중남미 대륙을 탐사하는 본격적인 여행길에 나섰는데 이게 그의 운명을 바꿔놓았다.

그는 남미 대륙의 구석구석에서 민중의 비참한 삶을 목격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 그는 54년 민중을 위한 개혁을 단행한 과테말라의 하코보 아르벤스 정권이 미국의 지원을 받은 용병대의 쿠데타로 무너지는 걸 목격하면서 아르벤스의 편에서 싸움에 뛰어들었다.

결국 그는 쫓겨 아르헨티나 대사관으로 피신하게 되었고 곧 멕시코로 탈출했는데 여기에서 한 살 위의 카스트로를 만난다. 그게 1955년이다. 체 게바라는 후일 “나는 과테말라에서 혁명가가 되기 시작했다”고 했는데, 카스트로와의 만남은 체 게바라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카스트로의 유격훈련에 동참한 체 게바라는 56년 11월 25일 그랜마호에 승선해 바티스타 정권을 무너뜨리기 위해 쿠바로 떠난다. 혁명 성공 후 ‘그랜마’는 쿠바의 정부 기관지 이름으로 채택된다.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리진 않았다. 게바라 일행은 12월 2일 쿠바 동부 해안에 상륙하자마자 바티스타 친위대의 공격을 받고 82명 가운데 12명만 간신히 살아남아 시에라 마에스트라산으로 도피하게 된다. 그의 불멸의 신화는 바로 여기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게릴라전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체 게바라가 볼리비아로 떠난 이유로는 혁명의 동지였으나 혁명 이후 정치적 경쟁자가 된 카스트로와의 정권 다툼에서 밀렸다는 설과 자신의 혁명 이념을 다른 나라에도 전파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주장 등 여러 설이 있다.

카스트로와 게바라는 좋은 동지 겸 친구였다. 현재 쿠바에서 가장 영웅시 되는 사람은 여전히 게바라다. ‘금세기의 가장 완벽한 인간’.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가 체 게바라에 대한 헌사한 평가다. 카스트로보다 체 게바라를 더 좋아하는 이유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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