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궁가의 연치(年齒) 다툼

하응백의 국악가사 이야기 하응백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l승인2016.11.23l수정2016.12.23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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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뉴스=하응백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

▲ 하응백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

판소리의 특징을 꼽으라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 내용상으로 말하자면 주제적인 측면에서는 권선징악으로 대표될 수 있다. 조선 사회의 필수 덕목인 삼강오륜에 기초하여, 유교적 질서 체계를 공고하게 하는 이데올로기의 유희적 표현이 바로 판소리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말은 대단히 표면적인 말이다. 만약 판소리가 기존 질서 체계의 옹호로만 짜여 있었다면, 판소리의 생명력은 대단히 짧았을 것이다. 판소리가 개화기를 거치면서 근대 이후에도 살아있는 장르가 된 이유 중의 하나는 판소리 사설 내용이 풍자성과 확장성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판소리 어떤 구절은 요즘 들어도 귀가 솔깃할 정도로 현실성이 있다. 그것은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수궁가’의 앞부분은 이렇게 전개된다. 동해 용왕이 잔치를 벌이다, 과음 과식하는 바람에 병이 들었다. 용한 의원이 와서 백방으로 약을 써 보았지만 백약(百藥)이 무효다. 마지막 처방이 바로 토끼의 간이다. 누가 토끼의 간을 구해올 것인가. 논란 끝에 자라(별주부)가 결정된다. 별주부는 토끼 그림을 받아가지고 육지로 나온다.

육지로 나와 토기를 찾는 중에 날짐승과 길짐승의 다툼을 목격한다. 이때 네 발 달린 길짐승들이 모여 누가 상좌인가를 정하게 되는데, 이때 연치(年齒) 다툼을 한다. 연치란 이빨의 나이를 말하는 것으로 연장자 다툼이다. 즉 누가 나이가 많으냐에 따라 상좌에 앉게 되는 것이다.

▲ 판소리 어떤 구절은 요즘 들어도 귀가 솔깃할 정도로 현실성이 있는 것은 그 내용이 인간성의 본질에 대해 대단히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은 국립민속국악원이 펼친 창극 ‘수궁가’의 한 장면. /뉴시스 자료사진

이 연치 다툼에서 제일 먼저 나서는 짐승은 노루다. 노루는 자기의 나이가 이태백과 같다고 우긴다. 이태백은 당나라 현종 때의 시인이니 서기 8세기 때 인물. 그러니 노루의 나이는 1200살 쯤 된다.

다음 나서는 동물은 너구리다. 너구리는 조맹덕과 비슷한 나이라도 한다. 조맹덕은 삼국지의 조조이니,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초의 사람이다. 다음은 멧돼지가 나서 말하기를 한나라 때 흉노국에 사신으로 갔던 소무와 동갑이라 우긴다. 소무는 기원전 약 100년의 인물이다. 2100살 쯤 된다.

이에 토끼가 나서면서 엄자릉하고 같은 나이라고 한다. 엄자릉은 기원 직후의 후한 광무제 때 사람이니 2000살 쯤 된다.(여기서 <수궁가>를 지은 사람이 연대를 좀 헷갈렸던 것 같다.) 이렇게 길징승들이 서로 나이가 많다고 우기면서 옥신각신할 때 호랑이가 나타난다.

호랑이가 짐승들을 잡아먹으려 하자, 잡아먹을 때 먹더라도 나이나 따져 상좌나 가려보고 잡아먹으라고 하자 호랑이는 자신의 나이가 여화씨와 동갑이라고 말한다. 여화씨는 복희씨의 누이 동생이다. 복희씨는 전설상 삼황오제의 한 사람이니 나이를 따지기도 어렵다.

이렇게 하여 호랑이가 제일 연장자가 되어 동물을 잡아먹으려 할 제 노루가 또 꾀를 낸다. 호랑이는 수령이고, 사냥개는 세도를 부리는 아전 같은데, 사냥개 같은 간사한 자들에게 동물들이 핍박을 받고 있으니 수령인 호랑이에게 대책을 마련해 달라는 것이다. 호랑이는 수령이란 말에 우쭐해 동물들을 잡아먹을 생각을 하지 않고 대책마련에 고심하다, 곰이 포수가 온다는 말에 슬그머니 뒷걸음친다.(동초 김연수의 ‘수궁가’ 바디 기준)

이 부분을 듣다보면 남자들이 술자리 같은 데서 나이 따지는 부분과 흡사해 웃음이 아니 나올 수 없다. 잘 모르는 사람끼리 술자리에서 함께 모여 술을 마시다보면 통성명을 하고 다음에는 남자들은 대개 연치를 따져 형님, 아우를 가른다. 계급이나 나이를 따져 서열을 정하는 것이 남자들의 사회적 본능인 것이다.

그런데 이때 슬쩍 사기치는 사람이 있다. 한두 살 나이를 올려 형님 대접을 받으려는 것이다. 세월이 흘러 그 사람을 형님 대접 하던 아우님이 그 사람의 실제 나이를 알았다. 그러면 분개하여 따지게 된다. 왜 속였냐고. 상대가 계속 우기면 심지어 민증 까보자고 말한다.

이 때 사기쳤던 사람의 대답은 거의 비슷하다. 아버지가 출생신고를 늦게 해서 호적상 그럴뿐 실제는 아니라고. 이게 현대 사회에서도 익숙하게 보아 왔던 광경이다. ‘수궁가’의 길짐승 연치 다툼과 무엇이 다른가.

시대를 뛰어넘어 인간 본성이나 파렴치함을 풍자하고 조롱하는 것이 바로 판소리다. 그렇기에 오랜 세월 살아남아 우리를 웃긴다.

 

※ 하응백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은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에 당선돼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옥봉의 몽혼’(2009)등 20여 권의 편저서가 있으며 ‘창악집성’(2011)이라는 국악사설을 총망라한 국악사설 해설집을 펴내기도 했다. 2002년 ‘휴먼앤북스’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하 이사장은 경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편집자 주
하응백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  hbooks@empa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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