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사는 것이 요령부득일 때가 있다. 그럴 때 “삶의 층위, 삶의 규모를 바꾸기”가 하나의 대응방식일 수 있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

프랑스 작가의 <페르조나>라는 소설에 나오는 표현이다. 그런 변화를 실제로 도모하는 것은 그 소설의 주인공처럼 ‘페르조나(가면, 인격)’를 여러 개 운용하는 것인데 그것은 광인으로의 길이다.

나는 그저 미세조정이랄까 관념의 수준에서의 조정이랄까 하는 것에 그친다. 번잡한 행사나 만남을 일시 단절하고 나의 동선을 아주 좁게 줄여놓고 그 안에서 움직이기. 간단한 매뉴얼의 수준으로 내 삶을 하강시키기. (될 수 있는 한 간단한 먹이를)먹고 (배고파질 때까지)걷고 (곯아 떨어져 가능한 한 오래)자기, 그 세 가지만 하기.

반대로 확장형 조정도 가능한데 별로 잘 나가지 않던 모임까지 알뜰하게 챙기며 정신없이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가까운 이를 여읜 사람이 그 사연을 아는 이들을 기피하고 그리 친하지 않은 이들과 어울려 미친 듯이 나돌아 다닌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도 그 경우일 듯.

그리 익숙하지 않은 장르의 책을 기웃거리는 것도 그 한 징후이다. 테드 창의 <숨> 같은 것. 스키 파이(sci fi), SF, 공상과학소설? 요즘엔 그냥 과학소설이라 하나 본데, 익숙치 않아 어렵지만 묘한 위안을 준다.

도무지 과학은 문외한이라 어디까지가 지금의 과학기술 이야기고 어디서부터가 향후 발전을 상상한 것인지 모르겠다. 검색이라도 좀 해 볼까 하다 관뒀다. 인공지능이나 컴퓨터 공학을 기웃거린들 이해할 자신도 없고 그 책을 더 심도 있게 읽도록 도와줄 것 같지 않아서.

그냥 편하게 과학 용어가 많이 나오는 소설로 읽기로 한다. 모르는 것은 모르는 대로 넘어가고 알만한 것을 실마리 삼아 유추해내는, 학습으로서의 독서가 아니라 도락으로서의 독서. 혹은 과학에 대한 무지를 철면피하게 인정하고 하나의 철학책으로 접근하는 것도 한 방법.

남들은 철학이나 사회학으로 할 이야기를 테드 창은 과학을 통해 하고 있어, 그 영역이동이 많은 설득력과 임팩트를 주고 있지, 이렇게. 천천히 몇 날 며칠에 걸쳐 띄엄띄엄 읽었다. 고역은 아니지만 어떤 임계량이 있어 그 이상은 한꺼번에 읽어내지 못하겠더라.

과학기술의 발전은 무엇보다 인간 몸의 확장, 혹은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흐려지는 것 쪽으로 가는 것 같다. 하고 싶은 말을 머리 속에서 하위발성하고 그러면 망막 프로젝터가 그 문장을 보여 준다던가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 허파가 소모품처럼 되어 매일 비어버린 허파를 공기로 가득 찬 새 허파로 갈아 끼우고 비상시엔 공기 충전소에 가서 채운다던가 (‘숨’).

그러니 인간의 존재 방식은 변화된다. 이제 평행우주처럼 평행자아가 있어 그와 비교하고 질투하고 경쟁하고 협력하며 (‘불안은 자유의 현기증’) 다마고찌 키우듯 아니 자식 키우듯 디지털 유기체를 키우며 그 생애주기를 따라 온갖 고민을 한다(‘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그런데 인간은 행복해진 것 같진 않다. 인간 행동의 예측기가 나와 자유의지에 대한 인간의 환상이 무너져 무동무언증이 역병처럼 퍼지고 (‘우리가 해야 할 일’) 나이테가 없는 나무, 배꼽 없는 미라가 등장하여 과학적 설명의 한계와 신의 부재, 의미의 부재를 새삼 견딘다(‘옴팔로스’).

▲ 테드 창 저 김상훈 역 엘리 펴냄

무엇을 할 것인가(what is to be done)는 고작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은 무엇인가(what’s expected of us)‘로 약화된다. 과거와 미래를 넘나드는 연금술사의 문이 있다 한들 과거와 현재 그 어느 쪽도 바꿀 수 없고 다만 더 잘 알 수 있을 뿐 (’상인과 연금술사의 문‘)인 인간이, 결정된 세계 속의 자동인형이 빠질 수밖에 없는 의욕상실을 넘어 살아가려면 무엇을 해야만 하는가.

테드 창의 답은 일견 비극적이다. “자유의지가 있는 것처럼 행동하라. 설령 사실이 아님을 알고 있어도, 스스로 내리는 선택에 의미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무엇이 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정말로 중요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믿느냐이며, 이 거짓말을 믿는 것이야말로 깨어 있는 혼수상태에 빠지는 것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94-95쪽) 왜냐면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에”(95쪽).

그러나 표제작 ‘숨’은 조금 결이 다르다. 그 세상에서는 매년 새해 첫날 정오면 포고꾼이 시 한 구절을 낭독하는 전통이 있는데 그 낭독에는 정확히 한 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최근 낭독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탑시계가 시보를 쳤다는 것, 즉 시계들이 빨라졌다는 것이 알려진다.

이를 한 뇌과학자가 자기 뇌 해부를 통해 해명하기를 시계가 빨라진 게 아니라 뇌가 느리게 작동한다는 것. 뇌는 공기의 흐름에 의존해 작동하는데 공기가 느리게 흐르자 우리의 사고도 느려지고 시계가 빨리 간다고 느끼는 것이라.

생명의 원천이 공기가 아니라 공기의 흐름이라고 한 것에 주목하라. 흐름은 다시 압력 차에서 나온다. 그러니 생명의 원천은 기압 차이이다. 서로 다른 압력이 서로 균형을 맞추는 중에 발생하는 힘이 뇌, 몸, 기계를 작동시킨다.

인간은 공기를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고압의 공기를 저압의 공기로 바꾸는 것이고 그것은 이 우주의 압력 평형화에 꾸준히 이바지하는 것이다. 평형이란 움직임의 제로, 모든 것이 스톱하는 것이다. (역사의 종언?)

이러한 사고 실험에서 저자가 전제한 것은 우주의 유한성이다. “우리의 우주는 열린 우물이 아니라 봉인된 방이었던 것이다.”(77쪽) 그리고 평형상태로 나아가는 경향이 우리 우주, 나아가 전체 우주의 특징이다. 아무리 오래 걸려도 결국 모든 것은 평형상태에 도달할 것이다.

 

이러한 치명적이고 필연적인 죽음 앞에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테드 창은 역설한다. 우주의 수명을 계산할 수 있다 해서 그 안에서 생성되는 생명의 다양한 양태까지 계산할 수는 없다. “우리가 세운 건물, 우리가 일군 미술과 음악과 시, 우리가 살아온 삶들은 예측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그 어느 것도 필연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86-7쪽)

▲ 테드 창/네이버 이미지 캡처

“나직한 쉿 소리를 내며 평형상태에 빠져들 수 있는 그것이 이토록 충만한 생명을 낳았다는 것은 기적이다. 당신이 존재한다는 사실의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고, 당신이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을 기뻐하라.”

생명의 전 의지가 입에, 빠는 힘에 집중된 듯 몽골몽골 땀을 흘리며 실리콘 젖꼭지를 빠는 신생아를 바라본다. 생명의 처음과 끝은 그 전적인 무기력함이나 생리 현상으로 축소된 생활로 인해 서로 비슷하다.

신생아를 보며 백년 살고 죽은 우리 엄마를 떠올리는 그로테스크한 연상작용을 일으킨 것을 굳이 설명하자면...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태어났다는 것을, 살아 있다는 것을 무의미하게 만들지는 않으리라. 처음과 끝 사이에 그 어떤 흔적/때가 생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테드 창의 교훈을 내 식으로 번역하면 뭐지? 경이로움에 관해 묵상하는 것은 졸리니까...

Carpe diem’지금 이 순간을 즐겨라’?

아니면 지성의 비관성을 의지의 낙관성으로 돌파하라?

※ 김미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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