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의 외교와 내치 양족의 거침없는 행보가 연일 외신을 타고 있다.

대통령 공약부터 ‘마약소탕’을 들고 나왔고 취임 후 5개월만에 3천6백명에 달하는 마약 관련자들을 체포, 구속했으며 심지어 사살했다.

▲ 남영진 논설고문

미국이 재판없이 사살까지 한 것은 ‘인권유린’이라고 비난하자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개새끼(son of bitch)”라고 욕을 내뱉었다.

그가 이번에는 성인 인구 3분의 1인 1,700만명의 흡연자들과의 전쟁을 선포하려 하고 있다. 나아가 신정과 성탄절은 물론 크고 작은 축제 등에서 밤새 즐기는 폭죽도 금지시키려 한다.

지난 6월 30일 취임 후 마약단속으로 죽은 3600여명 중 경찰의 총에 숨진 사람만 1500명이 넘는다. 이 같은 유혈 단속에 미국만이 아니라 유엔, 국제 인권단체, 유럽연합(EU), 유엔이 강하게 비난하고 있다.

취임 전부터 “범죄자를 모두 처형하겠다”고 공언한 두테르테는 취임 직후부터 마약 범죄자에 대해 사법절차를 거치지 않고 ‘묻지마’식으로 사살해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지역 무장단체인 자경단이 살해한 시민만 2200명이 넘는다는 조사도 나왔다.

외교에서도 거침없는 ‘이중행보’로 전통적인 우방인 미국과 일본을 당황케 하고 있다. 두테르테는 취임 직후인 지난 7월 전임 베니그노 아키노 대통령이 헤이그 국제상설분쟁중재소(PCA)에 제소한 남지나해에서의 미국과 중국의 영유권 분쟁에서 중국에 불리하게 판정이 나오자 이를 환영했다.

그러나 중국의 시진핑(習近平) 주석과의 정상회담을 앞두고 중국편을 들어 거액의 지원약속을 얻어내며 대선 운동기간중인 미국의 입장을 어렵게 만들었다.

미국이 이를 비난하자 ‘외교단절’을 불사하겠다는 강성발언을 하다 500만명에 달하는 미국내 필리핀인들을 염두에 둔 듯 다시 우호입장으로 돌아섰다.

두테르테의 막말은 아시아에서 필리핀의 ‘대부’라 할 수 있는 오바마 대통령을 상대로 시작됐다. 지난 9월 오바마를 향해 “나에게 인권문제를 거론하면 개새끼라고 응수하겠다”고 하면서 “오바마가 필리핀 인권을 거론하기 전에 흑인을 마구잡이로 쏘는 미국 경찰관들의 문제를 돌아봐야 한다”고 역비판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두테르테는 바로 사과했지만 미국과 거리를 두고 중국, 러시아와의 외교를 추진하겠다는 ‘줄타기 외교’를 계속하고 있다.

▲ 필리핀 경찰이 지난 9월 27일(현지시간) 마닐라 북부 나보타스에서 손이 뒤로 묶인 채 살해된 남성의 시신을 살피고 있다. 이 남성은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선포한 '마약과의 전쟁'에 따라 살해된 것으로 알려졌다.[나보타스=AP/뉴시스]

두테르테는 아세안(ASEAN·동남아국가연합) 국가를 빼면 취임 후 첫 해외 순방국으로 지난 10월 18일 나흘 일정으로 중국을 선택했다. 그동안 중국과 소원했던 외교관계를 회복하고 경제적 실리를 챙기기 위해서였다. 정상회담은 시종일관 화기애애했다. 시 주석은 이 자리에서 “양국은 바다를 사이에 둔 이웃 국가로, 양국민은 형제”라고 친밀감을 과시했다.

두테르테 대통령도 “겨울이 가까워지는 시기에 베이징에 왔지만 양국관계는 봄날”이라며 덕담을 날렸다.

올해 71세의 두테르테는 중국TV와의 인터뷰에서 “할아버지가 중국에서 필리핀으로 건너온 이주자”라며 중국과의 혈연을 먼저 강조했다. 전통 우방국인 미국 대신 중국과 관계개선을 강조해 온 그는 10월 20일 시진핑 주석과 첫 정상회담에서 곧바로 남중국해 문제를 다룰 양국 간 대화를 다시 시작하기로 합의함으로써 본격적인 ‘피봇 투 차이나’(중국으로의 중심축 이동)’에 나섰다. 남중국해 문제에서 중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발언으로 비친다.

이어 10월말 일본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의 정상회담에서는 더욱 헷갈리는 발언을 했다. 일본의 경제 지원을 얻어내려 “필리핀과 일본은 중국에 대해 같은 입장이다” “항상 일본편에 서겠다”라고 중국에서와 다른 발언을 하면서 2021년까지 정권을 지킬 수 있는 아베의 환심을 사려했다.

필리핀은 내년 아세안의 의장국을 맡게 되어 있다. 중국과 일본의 센카쿠열도(다오위다오)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과 중국과 베트남, 인도네시아간 남사군도를 둘러싼 영유권 분쟁에서 영향력을 최대한 활용해 중국과 일본에서 경제지원을 끌어내려는 양면전략이다.

두테르테의 이러한 국제사회에서의 ‘갈짓자 행보’에도 국내에서는 높은 인기가 유지되고 있다. 미국의 뉴욕타임스는 두테르테의 막말과 극단적 정책이 오히려 인기 유지 요인이 되고 있다고 평가했다.

두테르테의 거침없는 언행이 역대 정권이 보여 온 허약한 리더십에 질린 필리핀 대중에게 ‘용감하게 행동하려는 지도자’의 모습으로 비친다는 것이다. 그는 마약, 금연 등 규제만 아니라 광산 개발과 벌목 등으로 살 곳을 잃은 원주민에게 고향으로 돌아게 해주는 등 각종 진보적 사회정책도 펼치고 있다. 서민들이 그를 좋아하는 이유다.

또 막말과 기행 속에서도 실리외교를 통해 더 나은 삶을 가져다 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도 두테르테의 인기를 뒷받침하고 있다.

국민들은 뿌리 깊은 족벌정치에 환멸을 느끼고 있다. 1986년 독재자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축출된 뒤에도 필리핀에서는 스페인 식민시대부터 이어진 아키노 가문 등 100여개 가문이 정치권력을 독점해 왔다.

그는 “나는 특권층이 아니다”며 엘리트주의와 족벌에 대한 반감을 표로 만들었다. 취임식에서도 파인애플 섬유로 만든 전통의상 ‘바롱 타갈로그’와 검은 면바지를 입었다. 평소 폴로셔츠와 면바지를 즐겨 입으며 소탈한 이미지를 유지한다.

두테르테 대통령이 곧 흡연 금지 집행명령에 서명하면 자신이 22년간 시장을 역임했던 민다나오의 남부도시 다바오처럼 공공장소는 100% 금연지역이 된다. 다바오 시정부는 경찰 지원 뿐 아니라 전담반을 구성하는 등 흡연금지를 엄격하게 시행하고 있다.

▲ 지난 9월 7일 ASEAN+3 정상회담 참석차 라오스를 방문한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이 7일 라오스 비엔티안 국립컨벤션센터 회의장에서 생각에 잠겨 있다.[비엔티안(라오스)=뉴시스】

두테르테는 다바오 시장 시절에 직접 담배를 피우는 운전자를 잡아내거나 금연 지시를 거부한 관광객에게 꽁초를 먹이기도 했다.

전자담배도 연기가 너무 많이 나기 때문에 금지된다. 담뱃갑에 그래픽 건강 경고문을 붙인다. 건물입구에서 최소 10m 떨어진 별도의 흡연 공간이나 건물 뒤편 등 인적이 드문 곳이 아니면 실외에서도 담배를 피울 수 없다. 공공장소는 물론 개인차량 안에서의 흡연까지 단속할 예정이다.

두테르테 정부가 싱가포르처럼 법치를 앞세워 시민들을 과도하게 제약하려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 도를 넘어선 단속과 처벌로 국민을 움츠러들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해부터 서민들의 기호품인 담뱃값을 한꺼번에 2배 가까이 올려 그때부터 서민들의 지지가 떨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두테르테에 대한 국민적 지지가 여전히 높지만 금연정책으로 영혼이 자유로운 필리피노들이 자유를 제약받을 때 한방에 ‘훅’ 갈수도 있다. 마약과 담배는 다르다. 금연정책은 ‘도박’이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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