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한필이 칼럼니스트]

대학

전(傳) 2

신민(新民): "백성을 새롭게 한다"에 대하여

구약성경에 나오는 여호와와 신약에 나오는 하나님이 약간 다르듯이, 대학도 구본(舊本)과 신본(新本)이 있어서 이번 2장 타이틀은 두가지 버전 사이에 차이가 있습니다.

'친민(親民)'으로 적은 구본이 맞다는(왕수인 선생) 입장과 구본이 잘못된 거고 '신민(新民)'으로 봐야 한다는(주희 선생) 주장이 팽팽히 맞섭니다.

이 논쟁은 아주 유명해서 많은 유학자들이 자신의 입장을 개진했는데요 둘 다 맞다는(정약용 선생) 주장도 나타났습니다.

친할 친(親)자냐?새로울 신(新)자냐? 이것을 성서적으로 치환해 본다면 구약중심 관점과 신약중심 관점간 논쟁과 유사함이 있습니다.

구약은 유대 민족의 역사서일 뿐이니 크리스트교의 인류적 보편가치는 신약에 있다는 진보적 관점과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직접 묘사된 구약이 바탕되어야 비로소 신약도 설 수 있다는 보수적 관점이 있습니다.

이와 유사하게 주희 선생은 '친할 친(親)'으로 전해오던 전통적 기록을 엎고, '새로울 신(新)'이 맞다라고 선언을 합니다.

이에 왕수인 선생은 고본이 맞고, 주희는 틀렸다며 친할 친자를 유지하는 것이 맞다고 반기를 듭니다.

이 논쟁은 여러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송(宋)대 주희의 주자학 vs 명(明)대 왕수인의 양명학, 송대 중농주의 계급론 vs 명대 중상주의 평등론, 송대 객관적 인식론 vs 명대 주관적 인식론등 다양한 생각거리를 갈래치고 있습니다.

서구 철학이나 인도 철학에서 벌어진 논쟁이 그대로 재현되고 있는데요, 마르크스의 순차적 사회발전론과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습니다.

주희 선생처럼 새로울 신(新)으로 보면 지배 엘리트가 백성을 교화의 대상으로 보는 쪽에 가깝게 됩니다. 그래서 사농공상의 신분제적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력히 뒷받침해 주게 됩니다.

이와 달리 왕수인 선생처럼 친할 친(親)자로 보면 백성은 함께 해야하는 대상이 됩니다.

불가적 하화중생(下化衆生)이나 지식인의 하방(下放)운동 등이 연상되죠.그래서 다산 정약용 선생은 신(新)과 친(親)은 글자 형태도 유사하고, 예전에 신자에는 친자의 의미도 있었으니 둘 다 타당한 면이 있다고 봅니다.

이를 '도는 원리' O(영)사상으로 보면 역시 신민(新民)과 친민(親民)의 균형을 잡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 매정한 자가 제도자이니라.(신민의 입장)

- 세도를 부리면 제도가 사라지니라.(친민의 입장)

- 제도로 잘 다스린다는 것은 억압하지 않고 위협하지 않고 상하게 하지 않고 자유롭게 자랄 수 있도록(친민의 입장) 조종하는 것이니라.(신민의 입장)

이제 이런 배경과 관점을 바탕으로 전2장 첫 구절로 들어갑니다. 현재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주희 선생의 관점을 우선 보겠습니다.

湯之盤銘曰苟日新(탕지반명왈구일신)

日日新(일일신)

又日新(우일신)

옛날에는 자주 쓰는 물건에 자신을 경계하는 문구를 새겼는데 이를 '되뇌어 새김'이란 의미로 반명이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를 해석하면 이렇다고 하지요.

[탕임금의 큰 대야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만약 어느날 새로워 진다면이를 통해 매일 새로워질 것이며더더욱 날마다 새로워질 것이다.]

이를 왕수인의 친할 친(親)자로 보면 이렇겠지요. [만약 어느날 (백성과 더불어) 가까이 된다면이를 통해 매일 기꺼워질 것이며더더욱 날마다 친근하게 될 것이다.]

이를 '도는 원리' O(영)사상으로 보면 <대학>의 일관된 입장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즉, 각성에 기반한 ㅇ적 진화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간절하게 참되어 하루가 새롭다.그 하루가 다른 하루를 새롭게 한다.그 다른 하루가 또 다른 하루를 새롭게 한다.]

새로울 신(新)자를 파자(破字)해 보면 다양한 이미지들이 떠오릅니다. 설 립(立), 나무 목(木), 도끼 근(斤)의 조합자가 바로 새로울 신(新)입니다.

이 세 단어로 이미지를 상상해 보면 나무를 찍어내려 도끼를 들어 올린 형상이 떠오릅니다.

낡은 구조물을 부수고 새로운 씨앗을 뿌리려는 형상입니다. 좀 더 극적인 상상을 해보면 나무 꼭대기에 사람을 세워놓고, 갑자기 나무 밑둥에 도끼질을 해내는 모습도 떠오릅니다.

이런 위기와 절박감속에서 새로움은 솟아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렇게 보면 생존을 위해 몸부림치는 기업의 끊임없는 혁신(innovation)도 생각납니다. 또 도끼로 나무를 깎고 다듬고 세워서 뭔가를 창조해 내려는 움직임도 읽혀집니다.

​​한 개인도 하루하루 일상을 살면서 어느 날 보다 나은 내가 되기로 결심을 하기는 어떤 계기가 주어지지 않는 한 쉽게 먹을 수 있는 마음이 아니지요.

회사에서 된 통 한소리 들었거나, 믿었던 이들로부터 신뢰의 붕괴를 다시 한번 확인하거나, 거리 한구석에서 휑하니 부는 바람이 어느 순간 초라한 나를 발견하게 하거나 등등 어떤 불꽃 튀는 촉발점이 있습니다.

그런 찰나의 순간이 개인에 따라 새로움을 간구하는 각성의 거대한 불길을 일으키는 부싯돌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오늘의 문구를 이리 볼 수 있겠습니다.​

​[아주 사소한 것이라해도 진실된 각성의 순간을 어느 날 맛본다면 그것은 공부에 있어서 자전력을 확보할 수 있는 좋은 단초가 됩니다. 작은 각성들이 매일 매일 쌓여가고그러다보면 어느 순간 이전 각성들보다 더 큰 각성이 찾아옵니다. 그 각성이 일상화되어 크기조차느껴지지 않을 때 또다시 더 큰 다른 차원의 각성이또 다른 사이클을 시작합니다.]

이런 진화적 각성의 순간이 쌓여갈수록 새로움을 추구하는 칼끝같은 매정함 역시 자라갑니다.

바로 그 매정함으로 세상을 위해 애를 쓰는 제도자로 성장해가는 것이겠지요.바람이 차가워졌습니다. 바깥 세상도 소란하지만 뜨겁게 새로운 마음을 먹기에는 더 없이 좋은 날들이 오고 있습니다.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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