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태영 경희대 명예교수] 다산(茶山) 정약용(1762~1836)은 경세치용학과 이용후생학을 종합하는 실학의 전성기를 열게 되었다.

그의 학문은 약관 시절부터 서학과 특히 성호학의 영향을 받아 성숙하였다. 젊어서 관직에 종사하면서도 탁월한 실학적 저술을 내어놓았지만, 신유교난(1801)에 연루돼 남방으로 유배된 40세부터 그의 실학은 본격화하였다.

▲ 다산 정약용 선생 초상화/뉴시스 자료

그는 우선 경전(經傳) 공부를 근본적으로 다시 시작하여 15년 동안 6경4서에 대한 종래의 모든 주석을 다 검토 비판하여 자신의 독자적인 새로운 학설을 세웠다.

먼저 인간의 본질에 관한 견해부터 종래 성리학의 경우와는 확연히 달리하였다. 성리학은 천(天)으로부터 받은 성(性)을 인간의 본질이라 하였다.

그러나 정약용은, 천으로부터 타고나는 ‘형체가 없는 정신(심체)이야말로 인간의 본체’요, 성이란 것은 그 정신에 속하는 기호(嗜好)의 성향에 불과한 것이라 한다.

인간의 정신은 근원적으로 자주권을 타고 나는 것이어서, 각자는 선과 악을 자율적으로 선택할 능력과 동시에 책임을 진다.

또한 인간은 원천적으로 부와 귀를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를 타고 나는 존재이므로, 사회적으로 정당한 욕구는 긍정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인의예지(仁・義・禮・智)’와 같은 도덕가치도 인간이 자신의 판단에 따라 주체적으로 ‘실행’할 때에야 비로소 창출되는 사회적 가치라고 그는 단언한다.

나아가 그는, 인간은 교육을 통해서 사회적으로 성장하는 존재라고 말한다. ‘인간은 자연 상태 그대로는 선해질 수가 없다. 반드시 가르침을 받고난 후에야 착해질 수 있다.’ 그리고 인간사회의 기술문명은 진보발전한다는 견해를 편다.

도덕과 기술문명을 구분하고, 기술문명은 외국의 것이라도 수용해서 더욱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라 단언한다.

▲ 목민심서/뉴시스 자료

정약용에 의하면, 삼대(三代)의 왕정(王政)이 지나간 이후의 모든 통치법제는 근원적으로 잘못된 것들이다. 그것은 지난 시대의 폐단스런 법제를 이어받은 데다 다시 지배층의 사욕에 따라 무리하게 만든 폐법들을 쌓아올린, 비리와 인습의 더미에 불과하다.

그래서 6경4서에 대한 공부를 모두 끝낸 후 그들 경전의 근원적 원리를 집약하고 또 <주례>를 준거로 참작하여, 그는 현실의 국가체제를 근본적으로 개혁할 제도적 고안으로서 <경세유표(經世遺表)>를 저술하였다.

그런데 근본 개혁은 곧바로 착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우선 만백성의 고통을 조금이나마 덜어주기 위한 지방행정의 개선책으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저술하고, 다시 형정을 밝혀 인명을 구휼하는데 도움이 될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저술하였다.

정약용은 자기가 구상한 개혁론의 기초를 정전법(井田法)에다 두고 있었다. 그는 전국의 모든 농지를 井자 형태로 구획해야 한다는 종래의 정전 논의를 극복하는 독자적 이론을 창안하였다.

즉 ‘천하의 땅을 다 井자형 농지로 만들’ 것이 아니라 ‘井으로 만들 만한 곳은 井으로 만들고,’ 井으로 만들지 못할 구부러지고 비뚤어진 농지는 ‘井田의 내용이 되게 헤아려’ 구획한다는 고안이었다.

그의 정전제론은 또 전국 모든 주민에게 농지를 배분한다는 것이 아니었다. ‘옛 성왕의 뜻은 백성에게 모두 고르게 농지를 갖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라, 천하 백성이 모두 고르게 직(職)을 갖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경세유표에는 전국의 모든 주민을 사농공상(士·農·商·工)과 함께 圃(포·원예)·牧(목·목축)·虞(우·산림)·嬪(빈·직포)·走(주·노동)의 9직(職)으로 분업 배치, 모든 직역은 자립적으로 자영토록 한다고 돼 있다.

그러므로 정전제에 따라 농지를 배분받는 자는 오직 농민들이요, 나머지는 9직의 가운데의 한 가지씩을 직역으로 맡아 ‘각자 서로 도우면서 먹는 것을 얻도록 했을 따름’이라 하였다.

위와 같은 이상적인 왕정의 제도를 현실에서 구현할 통치 권력은 어디서 구해야 하는 것인가.

전국 농토를 정전제로 구획해서 실행하고 전국 주민을 9직으로 편성 배치하여 제각기 분발하여 성취토록 추진하는 일은 유사 이래 처음 있는 거국적인 개혁사업이었다. 전국의 각급 행정 관장(官長)의 권한 또한 크게 강화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그는 결국 왕정을 구현할 변혁주체로서의 강력한 왕권과 또 그를 보필할 현능한 신료가 출현하기를 대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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