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백의 국악가시 이야기

[이코노뉴스=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이별이야 이별이야/임과 날과 이별이야, 인제 가면 언제 오리요/오만 한을 일러주오”로 시작되는 ‘이별가’는 경기민요이다.

▲ 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이춘희 명창의 소리로 잘 알려져 있는 이 노래는 조용한 한 밤에 들으면 온 가슴이 젖어들고 적적해진다. 장단이나 후렴 없이 길게 내뽑는 것이 특징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중 ‘막북행정록(漠北行程錄)’ 편에 보면 다름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땅이 좁은 곳이라 살아서 멀리 이별하는 일이 없으므로 그리 심한 괴로움을 겪은 일은 없으나, 다만 뱃길로 중국에 들어갈 때가 가장 괴로운 정경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 대악부(大樂府) 중에 이른바 배따라기곡(排打羅其曲)이 있으니 우리 시골 말로는 배가 떠난다는 것이다. 그 곡조가 몹시 구슬퍼서 애끊는 듯하다. 자리 위에 그림배를 놓고 동기(童妓) 한 쌍을 뽑아서 소교(小校)로 꾸미되, 붉은 옷을 입히고, 주립(朱笠)ㆍ패영(貝纓)에 호수(虎鬚)와 백우전(白羽箭, 흰 깃을 단 화살)을 꽂고, 왼손엔 활시위를 잡고, 오른손엔 채찍을 쥐고, 먼저 군례(軍禮)를 마치고는 첫 곡조를 부르면 뜰 가운데에서 북과 나팔이 울리고, 배 좌우의 여러 기생들이 채색 비단에 수놓은 치마들을 입은 채 일제히 어부사(漁父辭)를 부르며 음악이 반주(伴奏)되고, 이어서 둘째 곡조, 셋째 곡조를 부르되, 처음 격식과 같이 한 뒤에 또 동기가 소교로 꾸며 배 위에 서서 배 떠나는 포를 놓으라고 창한다. 이내 닻을 거두고 돛을 올리는데 여러 기생들이 일제히 축복의 노래를 부른다. 그 노래에,

닻 들자 배 떠나네(碇擧兮船離)

이제 가면 언제 오리(此時去兮何時來)

만경창파에 가는 듯 돌아오소(萬頃蒼波去似回)

하였으니, 이는 우리나라에서는 제일 눈물지을 때이다.”

▲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이춘희 선생이 무대에서 이별가를 구슬프게 부르고 있다. /뉴시스 자료사진

여기에 나오는 가사가 ‘이별가’와 매우 흡사하나 그렇다고 이 기록 속의 노래가 현재의 ‘이별가’라는 직접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흥미로운 점은 1979년에 출판된 김정연의 ‘서도소리대전집’에 나오는 ‘자진배따라기’ 부분 말미에 “ ‘이별가조’ 배띄어라 배띄어라 만경창파에 배띄어라”라는 대목이 보인다. 그리고 제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이 부분이 실제 가창될 때 현행의 ’이별가‘와 거의 동일했다는 것이다.

평양 권번 출신인 김정연이 ‘이별가조’라고 특별히 기록한 것을 보면, 그리고 김정연의 소리 구성이 현재의 ‘이별가’와 흡사한 것을 보면, ‘이별가’는 최소한 박지원이 살았던 시대인 18세기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특히 현재의 ‘이별가’나 18세기의 ‘이별가’나 다같이 “그 곡조가 구슬퍼서 애끊는 듯”한 점에서는 서로 공통점이 있다고 보겠다.

연암은 우리나라가 땅덩어리가 좁아서 멀리 이별하는 일이 별로 없다고 하였지만, 아무리 좁은 땅이라도 이별은 늘 일어나는 일이다. 고려 때의 정지상의 유명한 시 ‘송인(送人)’도 이별의 슬픔을 노래한 시며, 조선 중기의 기생이었던 매창의 시조 이별을 노래한 절창이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 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매

봄에 이별한 님이 가을이 다 되어가도 소식 한 자 없다. 그러니 꿈에 님 계신 천리까지 가서 님을 만난다. 깨어나면 허망할 따름. 그렇게 사랑은 가끔 꿈이며, 그러기에 ‘이별가’는 사람의 심금을 울린다.

 

※ 하응백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은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에 당선돼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옥봉의 몽혼’(2009)등 20여 권의 편저서가 있으며 ‘창악집성’(2011)이라는 국악사설을 총망라한 국악사설 해설집을 펴내기도 했다. 2002년 ‘휴먼앤북스’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하 이사장은 경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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