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한필이 칼럼니스트]

전(傳)1

명명덕(明明德)에 관하여

4 皆自明也

 개자명야

이를 해석하면 이렇다고 합니다.

[(앞서 인용한 것은) 모두 스스로 (자신의 덕을) 밝히는 것이다.]

그동안 계곡물이 졸졸졸 흘러서 작은 소(沼)를 만들고, 다시 그 소에서 물이 흘러서 좀 더 커다란 연못을 만들고, 거기서 소용돌이치던 물이 오늘은 이제 장대한 폭포수가 되어서 등골을 때립니다.

물보라가 일고, 주변에 굵은 대나무들이 휘청입니다. 앞서 인용한 내용은 극명덕(克明德)-고명명(顧明命)-극명준덕(克明峻德)을 말합니다. 아주 쫄쫄거리는 지리한 물길였습니다.

작은 연못 하나씩 파서 한 모금씩 먹었습니다. 청량했습니다. 다음 못물은 돌절구에 흐르더니, 다음 물은 하늘을 담았습니다.

그래서 애써 밝은 덕에 이르고, 끊임없이 하늘의 뜻을 여쭙고, 마침내 하늘과 하나된 사랑에 도달하는 이 전 과정이 결국은 누가 시켜서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그리 했다는 말이 됩니다.

이 자기 '스스로 그리했다'가 바로 폭포수입니다.

이를 불가적(佛家的)으로 보면 열반경(涅槃經)이 됩니다.

부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 마지막 설법으로 이런 말씀을 남기셨다고 합니다.

自燈明 法燈明

자등명 법등명

[스스로에게 의지해 밝히고, 진리에 의지해 밝혀라.]

진리를 추구하는 가문은 달라도 진리를 추구하고 밝히는 법은 유사한 모양입니다. 대개 많은 가르침들은 무지를 어둠에, 각성을 빛에 비유해 왔습니다. 불가의 열반경이 결(結)이듯이, 개자명야(皆自明也) 역시 결(結)입니다.

이를 도는 원리 O(영)사상으로 보면 이렇습니다.

우선 어떻게 스스로 밝힐 수 있는가? 그것은 우주알(Cosmic Egg) O(영)이 모든 생명에 내재해 있어서 그럽니다. 우리 마음속에 있는 우주알이 하나님의 우주알과 같습니다. 그래서 통할 수 있고, 계속 지도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실 '스스로 밝힌다'라는 말이나 '하나님 말씀으로 밝힌다'는 말이나 그말이 그말이 됩니다.

우리 각 개개인이 이 우주의 주인이라는 말이 됩니다. 동시에 남 탓할 필요가 없다는 말도 됩니다. 구원의 주체는 과정이야 어찌 되었든지간에 시작과 끝은 자기 스스로 할 수밖에 없다는 말도 됩니다.

사실 정신활동을 값어치로 환산하는 작업은 몹시 애매한 구석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예술적 창작활동의 결과물인 작품에 대해 어느 정도의 화폐적 가치를 부여할지는 객관적 기준을 찾기 어렵습니다.

마찬가지로 좀 더 나가서 영혼의 활동에 대해 어느 정도의 물질적 가치로 환산 가능한지는 더더욱이 어렵습니다. 따라서 길가의 가로수 나뭇잎 한장까지 화폐적 숫자로 표기가능한 오늘 날 이 진리를 추구하여 덕을 밝힌다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인지 많은 분들이 의구심을 품을 수 밖에 없는 시절이 요즘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그런 질문이 나옵니다. "너 그거해서 뭐할래?" "스스로 너를 밝혀서 뭘 할래?" "왜 그걸 해야 하는데?"

여기에서 우리는 다시 행복을 생각해 보게 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과연 '보다 많은 돈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전세계적으로 진행중인 경제적 양극화는 가진 자는 너무 많이 가져서 부담스럽고, 못 가진 자는 너무 결핍되어서 많은 문제들을 낳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것을 강제적으로 혹은 제도적으로 보완하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많은 부작용을 낳는 것을 보기도 해서 참으로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렇다고 마음의 행복만을 이야기한다면 이것처럼 허망한 것이 없어서, 과연 보다 나은 세계로의 진화라는 것은 포기해야 하는가란 문제가 또 생깁니다.

이런 문제는 수세기동안 많은 선지식들이 고민했고, 해결책을 찾으려 노력해 왔지만 마땅하게 답을 못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근본적인 존재론과 가치론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이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입니다. 바로 누구나 다 죽는다는 절대성이 녹아든 이 질문에 행복으로 가는 길이 숨어있지 않나 싶습니다.

오늘까지 본 <대학>의 전(傳) 1장은 그 답이 스스로 밝은 덕을 밝히는 명명덕(明明德)에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즉, 우리는 하늘의 밝은 지혜로부터 왔고, 그것이 우리 존재의 원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면서 가장 가치있는 노력은 그 하늘의 밝은 지혜와 하나되는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바꿔말하면 우리는 진화하기 위해 태어났고, 그 진화의 원형은 하나님이라는 말이 됩니다. 거기에 도달하기 위해 극(克)하는 과정이 힘들고 괴롭고, 때로는 회의가 들더라도 그 하늘의 씨앗은 누구에게나 들어 있기에 스스로 밝힐 수 있다는 말이 가능하겠지요.

우리는 홀로 존재하는 외로운 존재가 아니고 하늘과 이어져서 끊임없이 커뮤니케이션하며 원형을 찾아가고 있는 생명들이란 말이 됩니다. 그런 진화가 바로 원형의 회복이라면 훨씬 희망 자체가 피로감이 덜하고 많은 위안을 줍니다.

낙엽지는 가을날 불현듯 뭔가 결핍이 심하고, 의미로움에 대해 회의가 들 때는 하늘에 기도합시다. 그것이 바로 스스로 시작하는 첫걸음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샬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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