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판소리에 ‘성조가’(成造歌)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지난해 배수지, 류승용 주연의 ‘도리화가’(桃李花歌)라는 영화는 판소리를 집대성한 전북 고창의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와 그의 애제자인 진채선(陳彩仙), 그리고 흥선 대원군간의 이야기를 다루어 화제가 된 바 있다.

▲ 남영진 논설고문

여자는 판소리를 할 수 없던 시대에 신재효는 무당의 딸인 진채선을 여자 소리꾼으로 키웠다. 흥선 대원군이 1867년 개최한 경복궁 경회루 낙성연에 신재효가 채선에게 남장을 시켜 자작인 ‘성조가’와 ‘방아타령’을 부르게 했다는 실화다.

판소리하면 신재효와 그의 고향 고창을 바로 떠올린다. 대원군이 안동 김씨의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시중의 왈패들과 어울려 파락호(破落戶)생활을 할 때 틈틈이 난(蘭)을 치기도 하고 신재효 등과 함께 서민의 노래인 판소리를 즐겼다 한다.

대원군은 아들인 고종이 임금이 되자 실권자로 경복궁을 중건한 뒤 경회루 낙성연에 중국풍의 아악(雅樂)이 아닌 서민의 소리인 ‘판소리’를 부르게 했다. 그것 자체가 파격이다.

대원군의 부탁인지는 정확치 않으나 성조가는 신재효의 창작 판소리다. 창인 ‘성주풀이’와 같이 집을 지켜준다는 성조신과 성조부인(成造婦人)을 소리로 표현한 것인데 “청유리라 황유리라 화장양 세계온 부진각시 리옵셔 셜셜리 노르옵쇼셔. 쳥졔올손 가즁황제 젹졔올손 가즁황제 졔와 흑졔로다 …”로 시작한다.

신재효는 채선을 17세부터 첫 여성소리꾼으로 키웠다. 채선이 성조가로 대원군의 눈에 들어 첩이 돼 궁으로 들어가자 동리는 채선을 그리워하는 마음에 ‘도리화가’를 지었다.

신재효가 중병에 걸리자 채선은 고향인 고창으로 돌아와 스승의 임종을 지키다 사후 행방을 감췄다 한다.

영화에는 수지를 내세워 채선을 미인으로 묘사했으나 실제로는 박색이었다 한다. 그녀의 재주를 알아본 스승이나 그의 소리를 높이 사서 국창(國唱)으로 삼은 대원군의 풍류 안목을 짐작케 한다.

지난 9월 24일 토요일 오후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과 내문인 흥례문 사이의 광장에서 한국판소리보존회와 동리문화사업회가 공동으로 150여년 만에 이 ‘성조가’를 신나게 불렀다.

이날 대한민국판소리축제 행사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로 국민들에게 남도민요를 알렸던 오정혜와 정회천의 남녀 사회로 시작했다. 금은빛 나는 한복으로 성장한 오정혜의 맵시와 미모가 500여 관중의 눈을 사로잡았다.

2시간 반의 판소리 한판무대는 박송희 신영희 이난초 안숙선 송순섭 김일구 등 20여명의 한국 대표적 명창들이 총망라됐다.

▲ 배우 수지가 영화 ‘도리화가’에서 조선 최초의 여류소리꾼 진채선을 연기하고 있다./뉴시스

제1부를 ‘경복궁 열린 날’로 이름짓고 성조가 발굴기념으로 여는 춤을 제천무로, 여는 소리로는 최근 발굴한 신재효의 성조가를 초연낭독했다. ‘다지는 소리’로 경북궁 중건때 신재효가 지었다는 ‘방아타령’으로 마무리했다.

제2부는 천하명창열전이라 하여 세계문화유산인 판소리 각 유파의 대전으로 올랐다. 춘향가는 여성창극팀의 박계향, 신영희, 정순임, 강정자, 정의진, 김수연, 이난초 등이 불렀고 흥보가(박송희) 수궁가(남해성) 적벽가(송순섭)가 이어졌고 심청가는 창극 ‘심황후 황성상봉’ 대목만 성창순, 김일구, 안숙선 명창이 함께 불렀다. 끝으로 관객들과 함께 ‘에라~만수 대신이야’의 성주풀이 등 남도민요와 50여명의 명창과 흑,백인 등 외국인 제자들을 포함한 관계자들이 모두 무대에 올라 ‘강강술래’로 대미를 장식했다.

1812년생인 동리(桐里)는 경기도 고양 사람인 아버지가 한성부에서 직장(直長)을 지내다가 고창현서 경주인(京主人)을 했던 선대의 인연으로 고창에 내려와 관약방(官藥房)을 하여 재산을 모았다.

신재효는 이름대로 효성이 지극했다. 어려서 아버지에게 학문을 배워 40이 넘어서 부근에 살던 대석학과 학문을 의논할 정도였다고 한다. 고창현의 향리와 서민들과 폭넓은 교유를 맺고 35세때 이방이 되었다가 나중에 호장(戶長)에 올랐다.

59세때인 1871년 대원군의 첩이된 24세의 애제자 채선을 그려 도리화가를 지을 정도로 이미 판소리와 창에 일가를 이루었다.

1876년에 삼남(三南)에 기근이 들어 이재민을 구제한 공으로 정3품 통정대부, 이어 절충장군을 거쳐 가선대부, 호조참판으로 동지중추부사를 겸했다. 물론 명예직이지만 향리로서는 최고직까지 신분이 상승됐는데도 판소리 연구에 몰두했다.

70세가 넘어 넉넉한 재력을 이용해 판소리 광대를 모아 판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해 1890년대에 지금 남은 판소리 여섯마당을 집대성했다.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토별가’ ‘적벽가’ ‘변강쇠가’ 등 여섯 마당을 골라 비속어를 많이 고쳐 개작했다. 하층의 투박한 말투가 약화됐지만 사실적 묘사와 남녀관계의 통속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 판소리가 신분을 넘어선 민족문학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제공했다.

▲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

판소리 외에도 30여편의 단가 또는 '허두가(歔頭歌)'라는 노래도 지었다.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다룬 ‘치산가’(治産歌), 서양의 침입을 걱정한 ‘십보가’(十步歌)와 ‘괫심한 서양(西洋)되놈’ 그리고 ‘방아타령’과 채선을 위해 지은 ‘도리화가’가 그것이다.

이날 꽉 찬 500여석의 객석 앞줄에는 재경 고창군민회 가족들이 자리를 잡았고 왼쪽 앞줄에는 외국인을 위한 50여석도 마련됐다.

때마침 종로구청이 광화문광장에서 주최한 한복축제를 보러 한복입은 여고생들이 많이 모였고 정독도서관에서 광화문광장까지 이어진 한복 행렬이 우리나라 최대의 판소리축제와 어울려 경복궁 앞은 ‘태평성대’의 축제판이었다.

판소리에 앞서 거행된 수문장 교대의식을 참관한 외국인 관광객들도 특이한 판소리 고음에 신기해 카메라를 들이댔다.

판소리를 공부한지 5년 됐다는 고창 옆 동네 부안 출신인 60대 중반의 김현수씨는 “소리를 들으러 여러 곳을 다녔지만 이름만 들어본 전국의 명창들이 모두 모인 이런 판은 처음”이라며 매년 개최되기를 희망했다.

조상현 명창의 제자인 판소리보존회 김한규 운영위원은 “신재효 선생의 성조가를 발굴한 것이 기적이지만 150여년 만에 같은 장소에서 재연된 것도 기적”이라며 판소리가 국악의 큰 뿌리로 자리 잡았다고 기뻐했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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