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우남 이승만과 도산 안창호, 백범 김구 선생은 누가 더 나이가 많은가?

이승만 전 대통령이 1875년 황해도 평산 출생이니 도산보다 3살이 더 많다. 안창호는 1878년 평남도 강서 출생이다.

▲ 남영진 논설고문

안창호는 1938년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으로 옥사했고 이승만은 대통령 하야 후 망명지 하와이에서 65년 사망했으니 27년 뒤에 죽었다.

백범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났으니 이승만보다 한 살 어리고 도산보다는 2살 위다.

유관순 열사는 1902년 충남 천안에서 태어나 이화학당을 다니다 고향 병천 아우네에서 3.1만세시위운동을 주도했다. 시위 현장에서 일제 순사의 총검에 부모가 돌아가시는 것을 목격했고 공주감옥에서 또 오빠를 만나 옥중시위를 주도한다.

결국 서대문감옥으로 이감돼 옥중만세시위를 벌이다 장독으로 20년 옥사한다. 열사의 묘지는 독립기념관 근처인 고향에 있는 줄 알았다. 그런데 이화학당 외국인 교사들이 시신을 넘겨줄 것을 끈질기게 탄원해 이태원부 부근의 공동묘지에 묻었으나 이 지역에 큰 길이 나면서 멸실됐다 한다.

박근혜 대통령이 최근 기자간담회에서 안중근 의사의 묘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한 중국 하얼빈이라고 했다가 네티즌으로부터 보좌진이 무능하다며 호되게 욕을 먹었다.

안 의사는 저격 현장인 하얼빈역에서 체포돼 뤼순(旅順)감옥에서 총살됐다. 그 시신을 아직도 못 찾고 있다.

그나마 백범 김구 선생이 46년 중국에서 귀국할 때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셔와 효창공원에 삼의사묘를 조성할 때 유해가 없는 안 의사의 가묘인 공분(空墳)도 함께 꾸몄다. 묘에는 ‘이 곳은 안중근 의사의 유해가 봉환되면 모셔질 자리로 1946년에 조성된 가묘입니다’라고 뚜렷이 적혀있다.

우남과 백범, 도산이 비슷한 시대를 살았으나 도산이 좀 나이가 어린 줄 알았다. 우남은 구한말 독립협회활동을 했고 느릿한 음성과 대통령 때의 백발사진으로 기억돼 연배가 한참 위로 생각했다.

우남의 정적이면서 한복을 입고 뿔테안경을 썼던 백범이 비슷한 또래이고 도산은 한참 후배인줄 알았다.

▲ 도산 안창호 선생 순국 78주기 추모식이 열린 지난 3월 10일 서울 강남구 도산공원 내 선생 묘소에서 윤경로 도산학회 회장이 약전 봉독을 하고 있다./뉴시스 자료사진

더구나 내가 다니던 중고등학교가 기독교 계통이어서 예배 보는 대강당 앞에는 예수그림이 크게 걸렸고 도서관에는 도산 안창호의 양복사진과 ‘무실역행(務實力行)’이라는 휘호가 걸려 있었다. 젊을 때의 사진만 본 것이다.

1919년 상하이(上海) 임시정부 때의 초대 국무총리에 우남, 내무총장에 도산, 경무국장에 백범이 취임했다가 이승만이 상하이에 오지 않아 탄핵을 받고 도산이 23년 국무총리 대리를 맡는다.

백범이 내무총장을 이었고 도산에 이어 백범이 24년 국무총리 대리, 26년에는 국무령이 된다. 후에 주석제가 되면서 백범은 김구 주석으로 명칭이 굳어진다. 이승만은 48년 정부수립후 대통령으로 굳어졌지만 도산은 그 많은 직책을 맡았는데도 ‘안창호 선생’으로 불린다.

이번 한가위 연휴 때 지난 8.15특집 MBC ‘무한도전’에서 다루었던 ‘도산 안창호’가 생각났다. 때마침 며칠 전 집사람이 압구정동에 갔다가 도산공원에 들러 기념관 팸플릿을 가져와 호기심을 자극했다. 여기에는 기념관과 동상 외에도 도산 내외분의 큰 묘지가 있는 것을 보고 어떻게 합장되었는지가 궁금해 직접 찾아가 보기로 했다.

 ▲망우공원묘지의 안창호 선생 비석, 유해는 도산공원에 옮겼지만 선생의

" 공동묘지 태허 옆에 묻어달라"는 유언에 따라 비석은 남아 있다./뉴시스

1907년 이후 가족과 헤어져 살던 도산은 38년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가 강남개발 이후 도산대로와 도산공원이 생기면서 73년에야 이곳으로 이장됐다. 이때 자식들과 미국 로스앤젤레스(LA)에서 살다 69년 돌아가신 부인 이혜련 여사(1884-1969)의 유해도 함께 옮겨왔다고 한다.

도산 안창호는 일제의 압박이 심해지자 1902년 9월 가족과 함께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이민했다. 우연히 시장에서 조선인 인삼 상인들끼리 싸움하는 것을 목격한 후 동포 계몽과 조직운동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다음해 남가주의 리버사이드로 옮겨 한인사회를 발전시킨다. 그는 오렌지 농장에서 일하며 1905년 미국의 첫 독립운동단체인 공립협회를 창설했고, 1909년 하와이의 합성협회와 합동하여 국민회를 창립했다. 이 국민회는 1910년 대동보국회와 통합하여 대한인국민회로 통합된다.

그러나 그는 1905년 을사늑약 이후 일제의 조선침략 야욕이 가속화되자 다시 귀국해 1907년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를 조직한다.

부인 이 여사는 도산이 독립운동을 위해 1907년부터 국내와 만주, 중국 등을 전전할 때 혼자 다섯 자녀를 데리고 세 곳을 떠돌다 30년대 LA에 정착했다.

그들이 1930~50년대 살았던 집이 LA의 남가주대(USC)캠퍼스안 ‘한국학연구소’로 남아 있다. 이곳서 유학한 내 딸에 의하면 명절 때 떡, 송편, 김밥 등으로 우리 음식 잔치를 열어줘 지금도 교수연구실과 한국 유학생들의 쉼터로 이용되고 있다 한다.

도산이 샌프란시스코에서 처음으로 이사 갔던 캘리포니아 동부 리버사이드시 시청 앞에는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와 마틴 루터 킹, 도산 안창호의 동상이 함께 세워져 있다. 도산을 간디나 킹 목사와 비견되는 위대한 인물로 본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시도 1991년 일제시대 한국의 지도자로서 한인사회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공로를 기념해 대한인국민회관의 앞길을 ‘Dosan Ahn Chang Ho Square’로 명명했다.

그는 1913년 인재 양성을 위해 흥사단을 설립했고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까지 중심 역할을 했다. 미국에서 모금한 3만0,600달러(현재 5억원 상당)를 상하이 임시정부 청사를 마련하는데 쾌척했다.

도산은 미주를 돌며 오렌지와 사탕수수 농장 등에서 피와 땀으로 번 교포들의 헌금으로 ‘우리 정부’를 만든 것이다. 이 위대한 독립자금이 대한민국 역사의 시발이다. 건국절 논쟁은 ‘위헌’이며 이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 이봉창 의사

부인 이 여사도 삯바느질을 하면서 남편의 독립운동을 적극 도왔고 부인회를 조직해 자금 모금에도 나섰다. 큰 태극기와 흥사단, 대한독립 깃발을 직접 만들었던 그녀는 안중근 의사의 어머니, 백범의 어머니와 함께 독립운동가 집안의 내조가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게 해준다.

도산은 이봉창 의사가 1932년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에서 폭탄을 투척, 일본군 시라가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을 죽인 사건의 배후로 지목돼 국내에서 또 체포돼 서대문형무소에서 고문을 받다가 병으로 경성제대병원에서 숨져 1938년 망우리 공동묘지에 묻혔다. 당시 망우리 독립운동가 묘역에는 만해 한용운, 위창 오세창, 호암 문일평, 소파 방정환 등도 함께 묻혔다.

"역사에 다소 관용하는 것은 관용이 아니요 무책임이니, 관용하는 자가 잘못하는 자보다 더 죄가 크다." 안창호 선생의 말씀이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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