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후각이야말로 죄 많은 감각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

우리 엄마 표현으로 “책보 메고 왔다 갔다만” 하던 시절이나 교포박(교수가 되기를 포기한 박사) 시절 도서관은 나의 출퇴근 ‘직장’이었다. 거기서 공부하고 먹고 졸고 놀고 남들 구경하고 그랬으니 직장이라기보다 생활공간이랄까.

언제부터인지 도서관에 늙수그레한 이들이 출몰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IMF 이후일까, 도서관 이용객의 평균 나이가 높아지고 열람실의 인구밀도도 높아졌다. 학습노동자들만의 게토에 여러 가지 다름이 들어오는 느낌? 아니면 (각종 자격증 시험을 위한) 전인구의 학습노동자화?

새로운 이용객들을 반기지는 않았다. 그들은 도서관 예절에 둔감한 비율이 원주민보다 높았다. 평소 데시벨 그대로 통화를 해대는, 기운 좋게 껌을 씹어 돌리며 월간지를 짝짝 넘기는, 아줌마.

반바지에 슬리퍼도 모자라 누래진 하얀 속옷을 여름 교복으로 삼는, 책으로 철옹성을 쌓고 그 안에 엎드려 코골며 자는, 칸막이 좌석을 누런 파일로 둘러 막아 사유지로 선언하고 살림살이 늘어놓는, 뭐가 거슬렸는지 도서관 직원에게 자기가 얼마나 방귀깨나 뀌는 인사인가 5분 넘게 소리 지르는, 아저씨.

여러 시각, 청각적 불편함에 더해 후각적 불편함도 의식되었다. 소리의 불편함은 지속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고 보기 불편한 것은 안 보면 되는데, 냄새는 ‘선’을 넘어 퍼져 도처에 존재(omnipresent)하고 막강하다(omnipotent).

아니 도대체 책 보러 오면서 왜 향수는 들어 부었는지 묻고 싶은 여성이 있다. 한 번도 안 빨았을 것 같은 운동화를 벗고 맨 발을 꼼지락 대는 남성이 있다. 전날 마신 술을 꾸준히 되새김질하는 이도 있다. 화장실 지린내가 배여 있는 열람실도 있다. 그런데 그런 것과 차원이 다른 냄새가 등장했다.

내가 드나든 양천 도서관이나 서대문 도서관 같은 공공도서관에 가끔 그런 이들이 온다. 한 눈에도 일정한 주거 없이 한뎃잠을 자는 것으로 보이는 사람. 그런 이들이 무사통과 했다는 것은 일단 위안이 되는 일.

<뉴욕 라이브러리에서>라는 영화에서 공공도서관에 홈리스들이 출입하는 문제를 다루는 부분이 나와 음악 배제 스펙터클 배제의 건조한 다큐를 보느라 지겹던 중 주목해서 봤다. 그들의 출입을 막을 이유란 없으며 어떻게 ‘일반’ 이용객과 그들의 조우를 매끄럽게 이끌 것인가 논의하더라. 우리나라 국회도서관에는 홈리스가 없다.

▲ 영화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포스터/네이버 캡처

그는 세금은 혹 안 냈을 수도 있지만 – 홈리스로 전락하기 전 냈을까?- 우리나라 국민이니 공공도서관에 드나들 자격이 있다. ‘주거취약계층’이라고 허구헌 날 ‘주거’만 찾아 다녀야 하나? 홈(home) 없다고 책도 못 읽나?

도서관에 무슨 드레스 코드가 있는 것도 아니고 옷이 ‘철부지’로 두껍고 치렁치렁한 것이 결격사유일 리 없다. 공격성? ‘일반’ 이용객이 더 공격적이다. 냄새 역시. 지난 24시간 이내에 목욕한 깨끗한 몸만 들어오세요, 이럴 수는 없다.

그런데 이 모든 원칙적인 생각을 나의 개별 몸뚱아리/‘개코’가 따라 주지 않는다. (신생아 돌보는 봉사를 하는데 나는 아기가 똥 누는 첫 순간에 냄새를 맡아 기저귀를 너무 일찍 펼쳐 누런 것이 뭉클뭉클 나오는 현장을 목격한 게 여러 번이다.)

내 옆에 한 사람이 와 앉는다. 고개를 들어 확인하지 않아도 냄새로 강하게 어필하는 한 명의 인간/몸/유기체. 나는 그의 인격을 모르며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다만 그를 우연히 가깝게 있게 된 타인으로 조우한다. 그 조우가 불편하다.

나는 예의바른 무관심(civil indifference)을 애써 발휘하지만 이미 책은 읽히지 않는다. 냄새는 곧 익숙해져 못 느낀다는데 나는 이제 머리까지 아파온다.

어느 정도의 시간 간격이 무례하지 않은 걸까? 그 사람 때문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는 것이 아님을 연출하려면 얼마를 참아야 하나? 견딜 만큼 견딘 후 괜히 시계 한 번 더 돌아보고 아주 심상한 표정을 지으며 책보를 꾸려 도서관에서 나온다. 무례하게 굴지 않았다고 자부하면서 나, 좀 착한 듯. 그러다가.

이른 시간에 ‘퇴근’하려니 짜증난다. 오늘 읽었어야 할 쪽수를 계산하며 ‘하필 왜 내 옆에’ 어쩌고 하는 심사가 일어난다. 그런 게 싫으면 멤버십이 있는 대학도서관엘 가던가 개인 연구실을 마련하던가,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야지 또 하나의 내가 야단친다. 이렇게 떠나고 있잖아, 툴툴댄다. 아무렇지 않게 자리를 지키던 옆옆 사람에게 열등감을 느낀다. 그런데.

그런데 책보고 싶어 도서관 간 홈리스는 어떨까. 근처에 앉았던 사람들이 소리 없이 한 명씩 사라져 자기 주위가 텅 빈다면 그는 어떤 마음이 될까. 그걸 생각하면 좀 슬프다. 내가 밉다. 참으로 죄 많은 감각기관이로고.

나도 냄새 때문에 대놓고 모욕당한 적이 있는데 말이지. 동네 피트니스에서 두어시간 뛰고 땀에 절어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그 건물의 입시학원에서 나온 고딩들이 탔다. 땀냄새 말고 다른 냄새 어쩌고 하며 아주 경멸하던데, 그 공격적인 적대감이 무서웠다. 샤워 시설 갖추고 운동복 제공하는 비싼 피트니스 다녀라? 운동 하는 김에 11층 걸어 가시죠?

▲ 영화 '기생충'/CJ엔터테인먼트 제공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에 “외모지상주의에 관한 소고: 다큐먼터리” 꼭지가 있다. 한 대학에서 ‘칼리’를 의무화할 것인가 투표를 앞두고 찬반 논쟁을 하는 이야기. 칼리는 렌즈 끼는 것보다 더 간단하게 착용하고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것으로 시각을 해치지 않고 안면인식장애를 만들지도 않으며 보이던 것 다 그대로 보는데 다만 그걸 아름답다 추하다 판단하지 못하게 하는 장치다.

미추에 따른 차별과 억압(lookism)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름다움의 기준이 문화마다 다양하다는 것은 소문에 불과하다. 피부가 깨끗할 것, 얼굴에 균형을 이룰 것, 좌우 대칭이 완벽할 것. 이런 보편적인 미의 기준이 엄존하며 철모르는 아기들도 아름다운 얼굴에 더 잘 반응한다. 젊고 건강하고 생식력 좋을 것, 진화의 지상명령이 구현되는 것이 아름다움이다.

성형이건 뭐건 기술을 동원해 다 예뻐지면 되나? 나이에 따른 한계가 있을 것이다. 예쁘고 싶지 않은 사람, 생긴대로 살고 싶은 이도 있을 것이다. 그로테스크 미학 등등 보편적 미의 기준을 부정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얼굴을 뜯어 고치지 말고 우리 눈을, 생각을 고치자고, 보긴 보되 예쁘다는 것을 모르게 하면 된다고 하는 해결이 저 ‘칼리그노시아’의 취지. 외모상의 평등주의 추구.

그게 기술적으로 가능하냐는 반론도 가능하지만 기술적으로 가능하면 다 해야 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으니 그런 반론은 논외로 해도 될 것. 아름다움, 추함의 판단 없이 그냥 ‘사심없이 공평무사하게 봄’이 가능하다면 그렇게 할까?

▲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영화 '기생충' 봉준호 감독이 지난달 28일 오후 서울 이촌동 CGV용산아이파크몰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뉴시스

외모 덕 본 일도 없고 외모 탓에 억울한 적도 없는 나로서는, 심술궂은 양서류 상이 된 전직 영부인을 보며 잘 늙어야 할 텐데 걱정도 하고, 눈이 반짝반짝한 한지민이 좋고 퇴폐미학 김재욱의 의외로 선량한 미소에 혹하는 나로서는, 아름다움에 맹목이 되고 싶지 않다.

아름다운 것을 보고 향유하고 선망하는 것도 우리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가치이다. 그렇다고 거기 결부된 과도한 사회적 프리미엄을 그대로 두자는 것은 아니다. 여성억압적이지 않은 아름다움 개념도 필요하다.

냄새는 어떤가. 우리가 단백질 덩어리라 움직이고 살아있는 것만으로 ‘육수’ 등의 갖가지 부산물이 분비되며, 우리가 소모되는 단백질 덩어리라 끊임없이 먹어줘야 하는데 잡식성으로 진화한 터라 죽은 짐승의 살과 내장에서부터 안 먹히려 악취 풍기는 것들까지 먹는다는 등등으로 인해 모든 인간은 냄새가 난다.

사실 이 사실만 잘 유념해도 서로의 냄새를 대하는 자세가 결정적인 순간에 힘없이 무너지는 가소로운 에티켓이 아니라 같은 인간 종에 대한 예의와 동감의 차원에서 교육되어야 할 것으로 인정될 것이다. 늙은이 냄새가 역겨우냐, 나는 슬프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냄새에도 구별이 개입한다. 저마다 다른 노동의 냄새, 저마다 다른 환경의 냄새, 그로 인한 계급 판별. 이튼 스쿨에서 탄광 노동자와 대도시 부랑자, 나아가 식민지 버마인들에 이르는 광범한 계급/인종 스펙트럼을 온몸으로 겪어낸 조지 오웰이 냄새의 계급성을 한탄했다. 영어의 억양과 행동거지, 그것을 넘는 냄새, 즉각적인 계급 판별의 바로미터. 인종 차별과 얽혀 있는 인종의 냄새 역시.

좋은 냄새는 향기라고 한다. 꽃향기, 커피 향기 등등. 냄새를 향기로 바꾸려는 것이 향수고 **리즈고 향신료일 것.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기는커녕 냄새를 냄새로 덮어 더 역겹게 할 때도 많다. 씻어도 잘 없어지지 않는 냄새.

그러지 말고 생각을 바꿔 ‘지하철 타는 사람들의 냄새’를 노동의 냄새, 생활의 향기라고 추앙할까. 아니면 냄새 분야의 ‘칼리’를 개발할까.

<기생충>의 세련된 부르주아는 무슨 잘못을 저질렀던가. 당대에 부를 일군 벼락부자라서 대대로 잘 사는 이들의 네트워크에 끼지 못해 부당취업자를 거르지 못함? 나는 저런 막돼먹은 재벌가가 아니고 다만 선만 지키면 된다고 나댐? 그러면서 네 명이 다 벌어도 생활이 별로 나아지지 않게 그들을 헐값에 고용함? 그들의 노동에 기생함?

자기네 운전 기사가 지난 밤 어떤 일을 겪고 고단한 몸 어디에 뉘였는지 알지 못한, 알려 하지 않은 것? 제 새끼 생신잔치에 넋이 빠져 고용인들 기분이 영 별로라는 걸 눈치채지 못한 것? 눈치 채고도 눙친 것? 기왕에 착한 척 했으면 끝까지 하지, 결정적인 순간에 본색을 드러낸 것? 켜켜이 쌓인 모욕이 사람을 획 돌게 한다는 걸 모른 것? 아니, 그게 모욕적인 상황이고 태도라는 것 자체를 모른 것?

계급 간의 조우가 비극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만남의 태도, 예절도 중요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다. 교양과 품위를 장착해도 생물학은 힘세다. 만나는 다른 몸들이 실제로 덜 달라야 한다.

▲ 영화 '기생충'/CJ엔터테인먼트 제공

배달노동자, 건설노동자 샤워 시설을 확충하는 것도 세세한 하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반지하, 지하 같은 선진국에선 사람 살 수 없는 곳이라 보아 창고로만 쓰게 한다는 그곳을 건축주가 세금 안 내는 주거시설로 인정하는 제도를 고치는 것도. 그리고, 그리고.

봉준호가 켄 로치 같은 영화도 만들고 싶다 했으니 그걸 기다리나? 그건 보는 데 정신적 에너지가 좀 덜 드는 영화가 될 것이다. 현실을 재기발랄하게 재현하는 것보다 가능한 변화를 설득력 있게 그리는 게 몇 배 더 어렵겠지만, 보는 이로서야 편하지 않을까.

여담인데, ‘지하철 타는 사람들’끼린 좀 덜 까칠했으면 좋겠다. (양갈비 집을 며칠 전 갔는데 젊은 화이트칼라들이 일제히 겉옷을 벗어 두꺼운 양복 걸이 안에 넣어 밀봉하고 고기를 굽는 진풍경이 펼쳐지더라. 이렇게 서로 조심하며 사는데 말이지.)

※ 김미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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