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정성희 실학박물관 책임학예사] 실학박물관(관장 장덕호)은 9월 18일까지 ‘경기 청백리’ 특별전을 열고 있다.

이번 특별전에는 조선시대 청백리의 명단이 수록된 ‘청선고(淸選考)’ 등 41점이 전시되고 있다.

일정 액수 이상의 접대 및 선물을 금지하는 ‘김영란법’ 시행을 앞두고 논란이 뜨거운 요즘, 조선 시대 청백리의 삶이 우리에게 던지는 의미는 무엇일까 청백리 정신과 실태를 알아본다./편집자 주

청렴한 관료, 청백리

우리 역사에서 청렴하고 모범적인 관리들의 이야기는 삼국 시대나 고려 시대부터 있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백리가 관료상의 모범으로 부각된 것은 조선 시대에 와서였다.

▲ 대전 유성구 국립 대전현충원 내 보훈산책로 대나무 숲길에 조성된 청백리길/대전현충원 제공

조선시대에는 청렴하고 모범적인 관료의 표상으로 ‘청백리(淸白吏)’ 혹은 ‘염근리(廉謹吏)’를 선발하고 포상하는 제도를 운영하였다. 관리들의 부정부패를 방지하고 사회 기풍을 진작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였다.

조선 시대는 우리 역사에서 관료제도가 가장 발달한 시기였다. 때문에 관료제를 유지하고 타락을 막기 위한 여러 가지 장치들을 마련하였지만, 그 뿌리에는 유교적 수양과 윤리규범에 대한 강한 의식이 있었고, 또한 사회적으로 강요되고 있었다. 자발적이든 사회적 강제에 의한 것이든 관료들에게 요구되었던 윤리적 품성은 조선 시대 통치체제를 유지하는 무형의 힘이었다.

조선 시대 학자로서 고위 관직을 지냈던 율곡 이이(1536~1584)는 ‘격몽요결(擊蒙要訣)’ 처세(處世)에서 백성을 다스리는 관리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문은 청렴과 근면이라고 말했다.

조선시대 관료들의 윤리 규범은 청백리 포상제나 장리(贓吏·부패관리) 처벌법과 같이 제도적으로 권장되고 단속되기도 하였지만, 기본적으로는 관료 자신들의 학문적 수양과 윤리적 품성에 의해 가능한 것이었다.

제도나 처벌도 필요하지만 결국 사람들의 품성이 모든 것을 결정하는 것이다.

청렴을 해치는 부정이나 부패의 유형은 대체로 두 가지를 들 수 있다.

첫째는 위정자나 관리들이 그들에게 부여된 권한을 남용하여 백성들에게서 직접 수탈을 행하는 일 즉 가렴주구이며, 또 하나는 직무와 관련하여 불공정한 특혜를 준다든지 불법이나 비위를 묵인해 주고 이권에 개입하여 뇌물을 받아 사복을 채우는 일이다.

전근대 시대에는 통치나 행정에 법률이나 행정규범들이 완비되지 않아 관리들의 재량에 맡겨진 일들이 많았다. 법에 의한 통치라기보다 사람에 의해 통치되는 성격이 강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리들의 막대한 재량권에 비해 그들을 견제하는 장치는 미비하였기 때문에 위정자나 관료들의 개인적 인품 수양과 도덕성의 함양이 더욱 중시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청렴이 중요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지나치게 앞세워 조금의 융통성도 두지 않는 정치는 역시 비판을 받았다. 위정자로서 지나치게 엄격한 행동과 각박한 정사는 인정에 어긋나기 때문에 군자가 취할 정치 행태는 아니었다.

이 점에 대하여 다산(茶山) 정약용은 ‘목민심서(牧民心書)’에서 “관리가 탐욕스러우면 백성은 그래도 살 길이 있지만, 너무 각박하게 청렴하면 살길이 막힌다”는 고사를 인용하고, 이 때문에 청백리의 자손 중에는 잘 되는 사람이 드물다고도 하였다.

다산은 지나치게 우직한 청렴보다는 행정에서의 명민한 판단과 융통성을 중시하였다.

남구만의 청백리 정의

청백리에서 ‘淸白’은 ‘청렴결백(淸廉潔白)’의 약칭으로 청백리는 곧 청렴한 관리를 일컫는다. 그러나 보다 정확하게 말하면, 조선 시대에 특별히 국가에서 선발되어 청백리안(淸白吏案)이라 불리는 청백리 관리대장에 명단이 올랐던 사람들을 지칭한다.

▲ 청선고(淸選考) 표지/실학박물관 제공

청백리 제도가 활성화된 것은 건국 초의 개혁적인 기풍이 점차 사라지고 관료들의 근무기강이 해이해지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1514년에 중종은 “청백리를 표창하고 상을 주어 관리들을 고무시킨다면 염치를 아는 기풍이 살아날 수 있을 것이다”라 하여 청백리 포상제를 본격적으로 운영할 뜻을 비쳤다.

선발은 의정부와 이조가 2품 이상의 관료들에게 청렴근검한 적격자 2명씩을 추천받고, 그 추천자들을 육조판서가 심사하여 국왕의 재가로 최종 확정되었다

청백리에 대한 개념이 명확해진 것은 숙종 때 영의정을 지낸 남구만(南九萬·1629~1711)에 의해서였다. 1694년(숙종 20)에 남구만이 청백리의 개념을 정리하면서 작고한 사람은 청백리, 산사람은 廉謹吏로 구분하여 지칭하였다.

청백리나 염근리로 선발된 사람은 승진이나 보직에 많은 특혜를 받았고, 죽은 후에도 자손들에게 벼슬을 주는 등 여러 가지 혜택이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는 관료로서의 큰 명예였으며, 가문을 빛내는 일이기도 하였다.

청백리에 대칭되는 이른바 부정부패한 관료는 탐관오리 혹은 ‘臟吏’라고 불렀다. 탐관오리로 지목되어 탄핵을 받았거나 처벌받은 관리들은 ‘臟吏案(탐관오리 관리대장)’에 수록되어 본인의 관직생활이 막히는 것은 물론 그 자손들이 과거를 보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그만큼 조선 시대에는 청백리와 탐관오리에 대한 관리제도가 엄격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태조 때 안성(安星) 등 5인을 청백리로 뽑은 이래 태종 때 8인, 세종 때 15인, 세조 때 8인, 성종 때 20인, 중종 때 34인, 명종 때 45인, 선조 때 26인, 인조 때 13인, 숙종 때 22인, 경종 때 6인, 영조 때 9인, 정조 때 2인, 순조 때 4인 등 모두 217인을 청백리 혹은 염근리로 선발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청백리 선발은 일정한 제도가 있어 정규적으로 선발하는 것은 아니어서 때로는 많이 뽑기도 하고 때로는 적게 뽑거나 아예 뽑지 않기도 하였다.

효종-현종 때를 비롯하여 조선 후기에는 한동안 청백리 선발이 중지된 때도 있었다. 또 ‘청백리’와 ‘염근리’의 분간이나 의미가 분명치 않은 것도 있고, 자료마다 명단이 다른 것도 있다.

비교적 잘 정리된 자료인 ‘淸選考’에는 186명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고, 1924년에 강효석(姜斅錫)이 발간한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218명의 청백리 명단을 확인할 수 있다.

책들마다 수록된 인물들이 들쭉날쭉하다 보니 자료에서 빠진 인물도 있었고, 비공식적으로 칭송된 청백리들도 있었다. 조선 시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로는 세종 때의 황희, 맹사성, 성종 때의 허종, 선조 때의 이원익 등을 들 수 있다.

그러나 태조 때의 심덕부처럼 청백리로 선발되지 않은 사람들 중에서도 당대에 칭송되던 청렴한 인물들이 많았다.

반대로 청백리에 선발되기는 하였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는 인물들도 없지 않다. 따라서 공식적으로 선발된 사람들만을 청백리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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