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백의 국악가사 이야기

[이코노뉴스=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 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우리나라 노랫가락이 항간에서 듣는 일이 적어지면서 점차 국민들의 마음속에서 멀어지고 있는게 현실이다.

간혹 TV등을 통해 몇몇 전문 소리꾼을 통해 접하게 되지만 가락도 낯설고 가사도 어려운 국악을 흘러듣게 될 뿐이다.

현재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하응백 박사가 이처럼 박제화된 국악 사설들을 좀 더 친근하고 맛갈나게 변신시켜 대중들에게 전달하고자 한다. 하 이사장은 창악집성이라는 국악사설 해설집을 펴냈다. /편집자 주

 

 

'범벅타령'과 용감한 여인

우리 국악의 가사를 공부하다보면 그 주제의 대부분은 전통사회의 윤리의식을 강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별의 정한을 노래한다 하더라도 한 낭군에 대한 지고지순한 여인의 기다림이 대부분이고, 남자를 배반하는 내용은 거의 없다.

여러 상황을 전개하여 내용은 조금씩 달라지지만 충과 효라는 유교적 덕목을 기본으로 판을 짜고 있는 것이다. 충과 효를 기본으로 하는 조선적 질서 체계를 뒤흔들만한 혁명적 내용은 당시의 의식적, 무의식적 검열체계 하에서는 다루기가 힘들었을 것임이 자명하다. 그러나 19세기 후반 이후 개화기에 이르면 자못 색다른 사설 체계가 나타나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범벅타령’이다.

▲ 광주문화재단 전통문화관이 올해초 서석당에서 열리는 토요상설공연 '흥겨워라' 무대에서 '범벅타량'을 가야금병창으로 연주하는 모습.

'범벅타령’은 경기잡가에 해당하며, 소리꾼이 그리 많이 부르는 노래는 아니라도 무업에 종사했던 이들 사이에서는 자주 불렸던 듯하다.

‘범벅타령’의 내용이 흥미로운 것은 간통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범벅타령’의 처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어리야 둥글 범벅이야 둥글둥글 범벅이야 누구 잡술 범벅이야

이도령 잡술 범벅인가 김도령 잡술 범벅이지

이도령은 멥쌀 범벅 김도령은 찹쌀 범벅

이도량은 본낭군이요 김도령은 훗낭군

즉 한 여자가 두 낭군을 거느린다는 것인데 이는 전통 유교적 가치관에서는 도저히 허용될 수 없는 것이지만, 버젓이 노래 서두에 두 낭군의 존재를 드러내놓고 시작하는 것이다. 전통적 가치관에서 보자면 패륜적이어서 도저히 입에 담지 못할 것이지만, 19세기 말이나 개화기에 오면 전통적 가치관이 붕괴되어 나가는 상황을 바로 이 ‘범벅타령’이 보여준다고 하겠다.

이어 노래는 여인이 샛서방인 김도령과 만날 약속을 해 놓고 이도령을 멀리 보낼 계략을 꾸민다. 물 길러가다가 장님을 만나 신수점을 보았더니 외방에 가서 장사를 하면 운수대통한다고 하며 남편에게 먼 길을 떠나라고 종용한다. 남편 이도령은 이미 아내의 속셈을 알고 있기에 거짓으로 멀리 장사를 나가는 채 하고 뒷동산에 올라 사태를 관찰한다. 아니나 다를까 김도령은 남편이 없다고 생각하고 여인을 집으로 들어온다.

이제부터 노래는 신나는 한 판으로 변한다. 사랑하는 두 남녀가 만났으니 어찌 아니 놀아볼 쏘냐. 마치 ‘춘향전’에서 춘향이와 이도령이 사랑가를 부르듯이 범벅타령을 부르면서 신나게 논다. 월령가 형식으로 된 이 부분이 바로 ‘범벅타령’의 하이라이트이다.

“열두 가지 범벅을 골고루 개어 놓고 계집년과 김도령이 자미스럽게 노닐 적에” 갑자기 본남편인 이서방이 집으로 돌아 온다. 요즘 말로 하면 간통의 현장을 급습하는 것이다. 두 남녀는 어떻게 대처했을까. 김서방은 뒤주 안에 황급히 몸을 숨겼다. 이서방은 시치미를 떼며 장님이 말하기를 뒤주에 재구가 없어 장사가 안 된다며 뒤주를 불살라야 한다고 말한다.

애걸복걸하는 여자를 밀치고 뒤주를 뒷동산에 끌고 가 불태우려고 하다가 뒤주를 열어 김서방을 풀어주면 하는 말이 ‘너도 남의 집 귀동자고, 나도 남의 집 귀동자인데 어찌 죽일 수 있겠는가, 어서 빨리 도망가라고 풀어주고 난 뒤 뒤주를 불사른다. 샛서방이 불타죽은 줄 아는 여자는 김도령을 위한 삼우제를 지내게 된다.

이 장면에서 여인은 설피 울게 되는데, 이것이야 말로 듣는 이들에게 웃음을 자아내게 하는 해학의 장면이다. 즉 작중 인물 중 주인공 하나만 모르고 화자와 독자가 다 알면서 작중 인물을 놀리는 것이 풍자의 기본인데, 바로 이 장면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여인이 울고 난 뒤 이서방이 나타나 여인을 호되게 꾸짖으며 “죽여서 마땅하지만 나 또한 대장부라 더러워서 안 죽인다”라는 말을 남기고 길을 떠난다. 졸지에 두 낭군을 잃어버린 여인네는 개과천선 하겠다며 자진을 한다.

이상이 ‘범벅타령’의 내용이다. 현대 문학적 관점으로 보면 ‘범벅타령’의 여자 주인공은 사랑에 용감한 여인이며, 오히려 두 남자는 비겁하기까지 하다. 정말 아쉬운 것은 우리의 전통서사가 바로 이 지점에 머물러버렸다는 것이다. 그 다음의 이야기에 대해서는 우리는 김동인 등의 새로운 근대 작가들에게 들어야만 했다.

 

※ 하응백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은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에 당선돼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옥봉의 몽혼’(2009)등 20여 권의 편저서가 있으며 ‘창악집성’(2011)이라는 국악사설을 총망라한 국악사설 해설집을 펴내기도 했다. 2002년 ‘휴먼앤북스’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하 이사장은 경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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