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경술국치(庚戌國恥). 1910년 8월 29일 일본에 주권을 뺏긴 날이다.

이번 8월 15일 광복절기념식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광복 71주년이자 건국 68주년’이라고 말해 ‘건국절’ 논란이 일었다. 1948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됐다는 것은 헌법 전문에 나와 있는 1919년 상해임시정부로부터 내려온 국가의 적통을 부인하는 셈이다. 더불어 경술국치일의 의미도 되새겨졌다.

▲ 남영진 논설고문

이런 ‘건국절’ 논란에 반대한 데는 지난 8월 29일 남산 조선통감부 건물터에 나라를 빼앗긴 뒤 일제식민지 시절의 치욕인 일본군 위안부를 잊지 말자는 ‘기억의 터’ 제막식이 한 몫 했다. 서울특별시가 부지를 제공하고 조성추진위원회(위원장 최영희)와 1만9,755명의 참여로 기념터와 공원을 마련한 것이다.

이날 오후 1시에 남산 교통방송국에서 유스호스텔 쪽으로 올라가는 언덕에 임옥상 화가가 디자인한 기념비가 제막됐다.

휠체어를 타고 온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는 “일본 정부가 잘못을 시인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데 1억원의 위로금이나 받자고 싸워온 게 아니다”고 말했다. ‘소녀상 철거’를 전제조건(?)으로 일본에서 건너온 10억엔으로 ‘화해 치유재단’을 만들어 위안부 문제를 해결하려는 한일 양국 정부의 움직임에 반대의사를 분명히 했다.

서울시가 시민단체들의 발의를 받아들여 ‘기억의 터’를 만들어준 데 대해 감사를 표했다. 이날 박원순 서울시장과 양준욱 서울시의회 의장이 축사를 하고 정치권에서는 우상호 민주당 원내대표 등이 참석했다.

기억의 터에는 위안부 할머니 247명의 이름과 증언을 새긴 '통곡의 벽'을 비롯해 '대지의 눈' '세상의 배꼽' 등 조형물로 꾸며져 있다. '세상의 배꼽' 에는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되풀이 된다'라는 문장이 한글 영어 일본어 중국어로 쓰여 있다.

반원형의 ‘통곡의 벽’에는 ‘우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이 아픈 역사가 잊혀지는 것입니다’라는 제목으로 ‘이렇게 끌려갔다’ ‘너무 험한 악몽이다’ ‘해방 후 귀국귀향’ ‘반세기의 침묵을 깨다’ ‘수요시위와 소녀상’ 등 위안부에 대한 간단한 역사적 사실이 적혀있다.

또 일본 정부로부터 책임 시인과 사과를 받아내려는 그간의 끈질긴 운동과 최근의 위로기금 등에 관한 내용도 담았다. 조선통감과 총독이 살았던 그 자리를 위안부를 기억하는 터로 덮은 셈이다.

▲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중구 남산공원 통감관저터에서 열린 일본군 위안부 ‘기억의 터’ 제막식에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김복동, 길원옥 할머니를 비롯한 참석자들이 가림막을 걷어내고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뉴시스

이 장소는 우리로서는 치욕의 장소다. 일제는 1905년 7월 17일 덕수궁 중명전에서 고종을 겁박해 을사늑약을 체결한 뒤 조선통감부를 여기에 설치했다. 이곳은 1910년부터 39년까지는 조선총독 관저로 쓰였다.

광화문을 헐고 총독부 건물을 완성한 뒤 총독관저는 지금의 청와대로 옮겼다. 45년까지는 통감과 총독의 업적을 기리는 시정기념관으로 활용됐다. 해방 후엔 국립민족박물관, 국립박물관 남산분관, 연합참모본부 청사 등으로 사용되다 철거됐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 일제 잔재의 상징으로 정부의 총리실로 쓰이던 총독부 건물은 해체돼 돔 부분만 충남 천안의 독립기념관 마당으로 옮겼다.

당시 국민들로부터 박수를 받았다. 청와대 터는 일제가 39년부터 경복궁 후원에다 총독 관저 건물을 지은 곳이다.

이 관저 건물을 없애고 그 자리에 지금의 청와대 건물을 다시 지었다. 이 곳은 해방 후 3년간 미군정 장관 관저, 48년 이후 이승만 대통령이 경무대로 명명했고, 윤보선 대통령 때부터 청와대로 개칭됐다.

일제는 청일전쟁,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의 지휘 아래 1900년부터 8년간 주한 일본공사를 지낸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를 내세워 을사조약을 체결했다.

▲ 한국의 독립국가 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에 상륙한 미군들이 1945년 9월 9일 일본의 항복문서를 받아낸 뒤 조선총독부 청사에서 일장기를 내리고 있다./월드피스자유연합=뉴시스 제공

일본은 1904년 5월 내각회의에서 한국에 대한 ‘보호권’ 확립 방침을 결정했다. 이 방침은 1905년 4월, 10월 다시 확인됐다. 11월 9일 서울에 도착한 이토는 11월 17일 외무대신 박제순(朴齊純)과 일본의 하야시에게 5개 항의 제2차 한일협약을 강제 체결케 했다.

이완용을 비롯, 박제순 등 ‘을사오적’의 배신으로 한국의 외교권은 일본에 박탈당하고 통감부 통감이 외교 사무를 대행했다. 사실상 대한제국의 주권은 상실됐다.

이에 1905년 11월에서 1906년 3월 사이에 청국·영국·미국·독일·프랑스·이탈리아 등의 주한외국 공관이 한국에서 철수해 영사관으로 대체됐다. 뒤이어 12월 15일자로 한국의 재외공관마저 폐쇄시켰다. 이로써 모든 외교적 방법이 단절되어 한국은 국제적으로 완전히 고립됐다. 1906년 2월 1일에 통감부가 서울에 설치되고 초대 통감으로 이토가 부임했다.

또한 이 곳에서 국제법상 ‘원천무효’인 한일합방조약이 체결됐다. 1909년 8월 22일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가 한일합병조약을 만든 곳이다. 이날 어전회의에서 이완용이 한일병탄조약의 전권위원으로 나서 순종의 황후 윤씨가 치마폭에 감춘 옥새를 빼앗아 위임장에 옥새를 찍었다.

이완용은 위임장을 들고 가 조선통감 데라우치와 함께 한일합병늑약에 서명했다. 매국 공작의 실무를 맡았던 사람이 신소설 ‘혈의 누’를 썼던 이인직이다. 그는 이완용의 비서였다.

일제는 1936년 이 곳에 을사늑약 공로자인 하야시를 위해 ‘남작 하야시 곤스케君像(군상)’이라는 동상까지 세워줬다.

한국전쟁 이후 이곳의 흔적은 감쪽같이 없어졌다. 2010년에야 '통감관저 터'란 표석이 생겼다. 2015년 뜻있는 사람들이 하야시 동상을 찾아내 ‘거꾸로 세운 동상’을 세웠다.

광복 70주년이었던 지난해 합병조약에 서명했던 8월 22일 이곳에다 ‘흩어진 동상 잔해를 모아 거꾸로 세워 욕스러움을 기린다’고 새겼다. 치욕스럽지만 잊지 말자는 움직임이 지난해 ‘거꾸로 동상’에 이어 올해 ‘기억의 터’로 이어진 것이다. 가끔 가봐야겠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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