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더워도 너무 덥다. 지구온난화로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변했다고 해도 별로 믿지 않았다.

“여름이면 덥고 겨울에는 추워야지”라고 말하곤 했다. 그런데 이번 여름 더위는 견디기 힘들었다.

▲ 남영진 논설고문

집에 에어컨은 있었지만, 에어컨 바람을 안 좋아한다. 그래서 8년 전 새 아파트로 입주할 때 에어컨을 설치한 뒤 그동안 거의 가동하지 않았다.

올해는 달랐다. 도저히 참지 못해 기술자를 불렀더니 ‘속의 가스가 말라서 가동할 수 없다’고 한다. 다시 손을 보려면 30만원이 든다는 말에 짜증이 났지만, ‘거금’을 줄 수밖에 없었다.

이내 후회했다. 기상청이 8월 중순을 넘기면 곧 더위가 꺾일 것이라 해 좀 더 버텨볼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양치기’ 기상예보를 다 믿지는 않았지만 개인적 경험으로도 8·15광복절을 지나면 더위는 힘을 잃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입추(立秋)인 지난 7일 낮 더위를 피해 저녁 6시께 강아지를 데리고 아파트 구내를 걷는데 살짝 가을을 알리는 실바람이 불었다. 그러면 그렇지. 가느다랗게 귀뚜라미 소리도 들렸다. 계절의 변화는 어쩔 수가 없구나했다.

웬걸! 착각이었다. 지난 21일 서울의 최고 기온은 36.5도로 올해 들어 가장 더웠다. 더위가 제 갈 곳으로 가리라 기대한 23일 처서(處暑) 때도 폭염은 만만치 않았다.

올해는 초복이 제헌절인 7월 17일, 중복이 10일후인 7월 27일 그리고 월복(越伏)을 해 말복은 입추를 9일이나 넘긴 8월 16일이었다. 그러니 복더위만 한 달이 넘었다. 진짜 월복때문인가?

보통은 초복과 중복, 말복 사이가 10일씩이니 복더위는 20일간이다. 월복은 윤달이니 윤년이니 하듯 몇 년에 한 번씩 오는 줄 알았다.

소서 대서 입추 처서 백로 추분 등 24절기가 태양력이고 6월 백중, 7월 7석, 8월 한가위 등이 음력이라 1년에 10일 정도 짧은 음력을 양력에 맞춘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더위와는 큰 관계없이 날짜 맞추기로 알았다.

그런데 윤년은 4년에 한번, 음력 윤달은 3년에 한번이라는 규칙이 있는 반면 월복은 일정한 법칙이 없는 거 같다. ‘말복은 반드시 입추(立秋) 뒤의 경일(庚日)이어야’ 한다는 원칙 외엔.

하지는 연중 태양의 고도가 가장 높은 날이다. 햇볕에 지표면이 가장 많이 노출되지만 땅이 데워져 최대 복사열을 내뿜으려면 한 달은 더 있어야 한다.

그래서 장마가 끝난 7월 하순과 8월 초순이 가장 덥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직장인들도 이때 ‘바캉스’ 연휴를 즐긴다.

올해는 7월 17일이 초복이라 중복이 27일, 10일후인 말복은 8월 6일이어야 한다. 그런데 입추가 7일이니 갑을병정으로 시작되는 천간(天干)으로 다음 경일(庚日)이 되는 16일이 말복이었다.

▲ 늦여름 더위가 물러가고 선선한 가을을 맞이한다는 처서를 하루 앞둔 22일 오후 서울 마포구 하늘공원에 해바라기가 활짝 피어 있다./뉴시스

태음력은 중국인들이 만들었다. 그러니 한나라 시대부터라면 촉(蜀) 지방(지금의 스촨·泗川)의 내륙 무더위를 겪었을 것이다. 해서 입추 뒤로 말복을 늦추는 ‘월복’제도를 두어 삼복 뒤에 폭서를 겪는 황당한 일을 막았던 것 같다.

태양의 길인 황도(黃道)를 쪼개어 정한 양력 24절기중 하나인 ‘입추 이후’라야 더위가 가셨나 보다. 월복은 옛사람들이 음력을 고집하면서도 날짜를 최대한 계절에 맞추려고 도입한 장치인 셈이다.

그래서 초복은 보통 하지 다음 절기인 소서(양력 7월 7~8일)에서 대서(7월 23~24일)사이에 들고 중복이 7월말, 그리고 말복은 입추(8월 7~8일)와 처서(8월 22~23일) 사이에 들게 된다.

여름에 덥다고 하면 돌아가신 장모님은 “월복 있는 해는 덥다”고 말하시곤 했다. 첫딸을 낳은 84년 여름 무더위를 피해 에어컨이 있던 서울 마장동 처가에 가서 들은 말이었다.

그해도 아기가 땀띠가 날 정도로 더위가 기승이었다. 술 취해 처가에 들어가면서 쑥스러워 덥다고 너스레를 떨면 ‘월복’더위라며 마누라의 핀잔을 막아주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더웠던 기억은 10년 후인 94년 여름이었다. 그해 동아, 중앙일보가 석간에서 조간으로 바꾸어 신문사간 독자 뺏기에 피말리는 전쟁을 벌일 때다.

구독경품을 자전거, 선풍기는 물론 현금까지 주면서 신문사간 ‘무한경쟁’이 붙었다. 4대지 중 재정형편이 가장 좋지 못했던 한국일보는 경품경쟁은 못하고 조석간 발행으로 ‘옥쇄’작전을 폈다. 92년 한국일보 노조위원장으로 파업을 하고 편집국 외신부로 복귀한 나는 석간데스크를 맡았다.

새벽 6시 출근해 기사를 보고 있으면 편집국이 동향에 유리창이라 해가 뜨면서 곧바로 데스크 좌석이 후끈후끈 달아올랐다.

할 수 없이 외신 텔렉스실로 들어가면 에어컨이 시원했다. 후배와 “신문사에서는 사람보다 기계가 더 대접을 받는다”며 농담을 하곤 했다.

오전 10시쯤 기사를 마감하고 11시쯤 신문이 나오면 편집회의하고 12시부터는 프리다. 메인이 조간이라 다른 부는 기사취재에 바쁠 때 편집부 외신부 후배들과 점심때 소주와 맥주를 섞은 ‘쏘폭’과 보양탕을 즐겼다. 예의 ‘이열치열’이라며.

▲ 말복인 1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삼계탕 전문점에서 시민들이 ‘보양식’을 먹기 위해 줄지어 기다리고 있다./뉴시스

삼복의 복(伏)은 사람(人)과 개(犬)의 합자로, 너무 더워서 사람도 개처럼 엎드린 채 헐떡인다는 뜻이란다. 삼복은 고대 중국에서 유래됐겠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여름철에 허약해진 몸을 보양한다는 개고기를 먹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 개장국 삼계탕 추어탕 민어내장탕 등 다양한 보양식으로 더위를 이길 힘을 보충했다.

옛날 먹을 게 없었던 시절 단백질과 지방을 보충하기위해 개고기만큼 구하기 쉽고 몸에 좋은 음식이 더 있었을까. 지금은 야만이니 동물학대니 하지만 그 시절 ‘절대기아’에 허덕이던 시절엔 먹고 죽지만 않으면 뭐든 먹으려 했을 것이다.

‘살인더위’다. ‘폭염피로’로 온열병 환자가 1천명이 넘고 사망자만 수십 명이란다. 도심엔 에어컨 방열과 자동차 배기가스로 2~3도 더 높아 아스팔트가 녹아내린다.

개 닭 오리 돼지 등과 물속에 사는 물고기마저 떼죽음을 당한다. 몇 년째 장마와 태풍다운 태풍도 없다. 인명과 재산피해를 입는 태풍이 오히려 기다려지는 폭염이다. ‘월복’이니까 이번 더위도 일상적인 자연현상이라 여기고 싶다. 내년에는 좀 나아지려나.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