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죽은 자에게 rest in peace 산 자에게 memento mori

[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나의 시누이가 죽었다. 말기 암이고 몇 달 못 산다며 수술도 안 해주던 것이 삼 년 전이고 고비를 몇 차례 넘겼으니 마음의 준비가 부족할 리 없건만 그 순간은 늘 그렇듯 급작스럽고 아연하다.

▲ 김미영 칼럼니스트

그 어떤 예감이 있었나. 며칠 전 다들 보러 오라고 청하여 구순 어머니까지 가서 봤다. 열이 있고 고개를 못 가누고 의사소통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초코우유 한통을 다 빨아먹고 사랑한다는 말을 귀에 속삭이자 나를 마주 안아주었던 터라 그래도 한 일주일 버티리라 여겼는데.

미용실 들어서는 순간 날아온 한낮의 부음. 서둘러 돌아와 허기진 속에 찰떡 두 개를 밀어 넣는다. 나 살아 있음을 자축하듯. 빈소 차리는 데 시간이 걸린다니 주저 앉는다. 돌연 일어나 끼고 있던 물건들을 훌훌 버린다. 나 역시 죽을 수 밖에 없음을 상기하며.

자축이 길면 어리석고 주변정리가 길면 신파다. 나는 박사논문 쓸 때 만들었던 독서 카드 수백장을 다소 비장한 마음으로 버리는 것으로 정리를 일단락한다.

그리고 시누를 생각한다. 신랄하면서 유머러스한 그 이. 대놓고 직격탄을 날리곤 하는 남편의 셋째 누나, 시월드의 오피니언 리더가 두렵고 싫었다. 그러나 아름답고 재미있는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고 그 많은 재능 펼치지 못한 채 생활에 치여 고생하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붓을 잡으면 좋을 손이 음식점 설거지통에 잠겨 있을 때마다 마음이 내려 앉던 기억.

대체의학에, 음식 조절과 걷기운동에 의거해 일 이년 잘 버텼는데 공기 좋은 시골이 좋을 거라고 연고도 없는 전남 구례로 떠난 것이 패착이었나. 외딴 곳에 남편과 살며 섭생이 너무 빈약해 기운이 소진된 것이 화근으로 보인다. 서둘러 상경해 여러 신약과 주사 그리고 항암치료를 번갈아 받으며 그럭저럭 삶을 유지했는데.

서너 달 전 항암치료가 어느 정도 효과를 발해 기운이 좀 돌았을 때 시누는 투병 기간 접었던 장사를 다시 시작한다고 고집해 여러 사람 기함 시켰다.

그 기운을 아껴 쓰며 가까운 데라도 살살 다니고 꽃구경하고 아들 며느리 공연 자주 보고 신앙생활하며 조용히 마지막을 지내기 모두들 바랬건만. 손 놓고 앉아 죽을 날만 기다리기 지겹다고, 나는 나의 일을 하겠다고 나서는데 말릴 도리가 없었다.

은행 대출까지 받아 실내 장식 모조리 다시 하고 거래선 복구하고 일할 팀 구성하여 가게를 재오픈한 것이 3월 초. 리모델링 업자와의 분쟁 등 저간의 사정은 가는 마당에 왜 저러냐고 모두가 혀를 찰 일.

한 사람의 열망은 그의 지난 삶이 결정하는 것일까? 가게를 열고, 손님 안 온다고 끌탕하고, 병원 갈 시간도 없이 고장난 데 잠깐씩 침 맞아 달래며 일 년 365일 영업하여 한 푼 두 푼 안달 복달하여 번 돈으로 은행 이자 물고 가게 세 물고 그러다 병들었는데. 몸이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했냐고 의사가 성을 냈다는데.

말기암으로 3년을 투병한 이 사람은 다시 또 가게를 열어 기대보다 적은 손님을 맞고 돈을 벌고 박리다매를 노리다 도리어 밑지고 은행 돈벌이만 시켜 주다 두 달만에 돌아갔다. 이걸 어떻게 봐야 할지 모르겠는 심정.

▲ 뉴시스 자료사진

서울예대를 나와 연극을 한 그 이. 극의 해석을 놓고 감독과 벌인 설전을 추억처럼 얘기하던 그 이. 대학원생 막내 동생과 하버마스와 푸코를 논하고, 그림도 잘 그리고, 자신을 유머의 대상으로 삼을 줄 안 지성적인 여인. 그를 쌍방울 사장, 피자집 사장, 한우마을 음식점 사장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얼마나 부당한가.

그 날카로운 지성을 끌어모아 뭔가 다른 마지막 몇 달을 살 수는 없었을까. 돈돈, 손님손님, 이자이자 하며 보내기엔 죽음은 너무 구체적이고 살 날은 한시적이었는데. 돈과 손님과 이자는 마지막을 장식하기엔 지나치게 리얼한, 그래서 ‘돌아감’의 초탈과 별 상관없는 단어들 아닌가.

누나의 인생을 어떻게 의미화할 것인가, 나의 남편은 이랬다. 신혼 초 당신은 시집 식구들과 외식하면 음식 얘기는 간단히 패스하고 여기 평수가 어떻고 종업원이 몇 명이고 손님은 얼마 만에 회전하고 그럼 몇 명이 와야 수지가 맞을 것인지 진지하게 의견 내고 반박하고 토론하더라고, 신기하다고 했지. 가족 간의 문화충격.

우리 집은 장삿꾼, 사업가 집안. 그 가풍의 영향력이 자식들께 스며들기 마련. 예술적 재능은, 글쎄 탁월하진 않았으리. 아니면 의미를 덜 부여했던가. 외려 자기가 주도하여 뭔가를 기획하고 실행하고 키워 나가는 것에 재능이 있고 더 즐기지는 않았을까. 그것이 장사였고 그래서 장사가 직업이고 아이덴티티였던 것이지.

방 한 칸 없이 시작하여 파주 헤이리의 주택과 인근의 고깃집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성장이고 성공이고 성취이다. 너무 일을 많이 하여 몸이 부서진 것은, 그래서 요즘 기준으로 턱없이 덜 산 66세에 돌아간 것은 애석한 일이나 그의 인생이 진짜 하고 싶은 일을 접고 그렇게 만든 환경에 분노하고 윤택한 삶을 추구한 것이 아님을 그의 마지막 선택은 웅변한다.

활기찬 성정 그대로, 주체적으로 불꽃같이 살았다. 그것이 반드시 때깔 나는 예술 분야여야 할 이유는 없다. 좌절한 예술가가 아니라 당당한 여성 사업가, 시집을 잘못 가 고생한 여성이 아니라 반대를 무릅쓰고 자기 뜻을 관철해 자기 살고 싶은대로 열렬히 한 세상 살다 간 사람.

이렇게 정리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진다. 죽음은 인간의, 인간 육신의 고립과 단절을 극화한다. 자식이 죽어도 배는 고프다니. 나 역시 한 치 걸러 두 치인 시누이의 죽음을 애통해 한들 얼마나 가겠나.

다만 나의 살아 있음을 조금 자축하고 나도 죽을 수밖에 없음을 엄중히 받아들일밖에. 갈 날을 선고받지 않아 남은 날이 얼마인지 알 수 없는 나는 조금 고민한다. 무엇을 할 것인가. 무엇을 하며 죽음을 맞을 것인가.

어릴 때는 나 커서 뭐 되지 고민했는데, 이제 나이들어 나 죽을 때 뭐 하다 죽을까를 고민하고 있으니 인생이 고민이라.

죽은 자에게는 삼가 '레스트 인 피스'(rest in peace·평화롭게 잠들라) 산 자에게는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죽음을 기억하라)

※ 김미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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