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8월 15일 일본 도쿄의 중심지 부도칸(武道館)에서 열린 제2차 세계대전 종전 71주년 전국전몰자 추도식에 아키히토(明仁) 일본왕 부부가 참석했다.

1주일 전인 지난 8일 아키히토 일왕이 생전퇴위(生前退位) 의사를 밝힌 뒤 처음으로 공식행사에 나타나 관심을 끌었다. 일왕은 이날 추도사에서 “과거를 돌아보며 깊은 반성과 함께 전쟁의 참화가 다시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며 지난해에 이어 같은 수준의 반성의 뜻을 표했다.

▲ 남영진 논설고문

같은 자리에서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일본의 전쟁 가해사실은 언급치 않고 “전쟁의 참화를 반복하지 않겠다”고만 밝혀 대조를 보였다.

일본 매스컴들이 관심을 보인 것은 일왕의 생전퇴위 발표를 둘러싼 일왕가와 총리실의 갈등이었다. 이날 식장에는 전사자 유족 7명을 포함한 7천명이 참석해 군인, 군무원 사망자 230만명과 민간인 희생자 80만명 등 310만명의 전몰자를 추도했다.

82세의 일왕이 ‘노령과 건강’을 이유로 생전퇴위 의사를 밝혔지만 일본 언론들은 표면적인 이유 외에 아베 총리의 군국주의 회귀 움직임에 반격을 가하려는 의도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지난달 이미 공영방송 NHK가 일왕의 ‘생전퇴위 희망’을 보도해 국민과 정계에 파문을 일으켰고 노령인 일왕이 국민에 직접 보낸 메시지에 많은 사람이 공감을 표하기도 했다.

일부 언론은 ‘천황’의 고령에 대처하지 못한 정부의 책임을 꾸짖기도 했다.

대장과 심장 두 곳의 대수술을 받고도 외빈을 맞이하는 등 ‘상징(象徵)천황’으로서의 공무에 시달린 ‘노인’으로서의 여러 고민을 11분간의 녹화메시지로 직접 국민에 호소했기 때문이다.

88~89년 일본 게이오대학 신문연구소에서 연수하는 동안 두 가지 특별한 경험을 했다.

하나는 서울올림픽을 일본에서 TV로 봤기 때문에 일본인들의 한국관을 곁에서 직접 볼 수 있었다. 또한 88년 봄부터 히로히토(裕仁) 일왕이 노환으로 거의 1년간 병상에 누워있다 사망하고 아키히토 일왕이 즉위하면서 벌어진 여러 논의와 분위기로 일본인들의 ‘텐노’(천황)에 대한 인식을 느낄 수 있었다.

88년의 일본 매스컴은 한국특집으로 도배했다. 88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신문은 물론 후지 TBS 요미우리TV 등 상업 방송들이 한국으로 몰려가 전국의 명승지나 맛집, 먹을 거리 등 전천후 르포를 타전했다.

태백선의 통리, 전라선의 곡성 등 열차를 타고 다니며 ‘한국의 간이역을 연구하는 회’가 있는가하면 한국가요 모음집이 일본 책방에서 팔렸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86년 서울아시안게임때 이러한 르포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어 일본인의 한국 관광이 급증했다.

▲ 아키히토(明仁) 일왕이 지난 8일 NHK 등이 방송한 사전녹화 영상에서 생전퇴위와 관련한 대국민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일본 NHK 방송 캡처

당시 일본은 건국 이후 최대의 호황을 누리던 때였다. 일본 기업이 미국 로스앤젤레스(LA)의 유니버설스튜디오를 사들이고 웬만한 부자들이 화와이 와이키키 해변의 별장을 사두는 호황이었다.

오죽하면 서민들의 농담 중에 “도쿄의 작은 아파트를 팔아 독일 라인강가 고성을 사자”라고 할 정도로 일본돈이 전세계를 휩쓸 때였다.

도요타가 세계자동차의 대표 브랜드고 미국의 젊은이들이 소니의 워크맨을 끼고 조깅을 하는 광고가 유행할 정도여서 일본제라면 신뢰의 상징이었다.

일본은 1867년 에도(江戸) 막부를 무너뜨리고 메이지(明治) 유신을 통해 왕정복고를 한 뒤 서구 근대문물을 받아들여 급속히 산업혁명에 성공했다.

이 근대식 무기로 청일전쟁과 노일전쟁에 승리해 1905년 을사늑약을 통해 조선왕조의 외교권을 빼앗고 1910년 대한제국을 불법적으로 병탄했다.

2년 뒤인 1912년 메이지에 이어 왕위에 오른 요시히토(嘉仁)는 건강이 나빠 전왕같은 카리스마가 없어 오히려 정당정치가 활성화되는 ‘다이쇼(大正)데모크라시’시대를 열었다.

3.1만세시위가 일었던 1919년부터 왕세자로 왕의 섭정을 했던 히로히토는 1926년 즉위해 ‘쇼와’(昭和) 연호를 쓰면서 1차대전 승전국으로 행세하며 30년대부터 만주국을 세워 중국침략의 전초기지로 삼았다.

▲ 히로히토 일왕/위키피디아 이미지 캡처

이때부터 일본은 ‘대동아공영론’을 내세워 구미국의 아시아 식민지 해방을 주장하며 아시아의 맹주로서의 지위를 굳히다 결국 독일 이탈리아와 3국동맹을 맺어 1941년 12월 진주만공습으로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히로히토는 1945년 8월 15일 라디오를 통해 항복을 발표하고 신의 지위에서 내려왔다. 그는 인간으로 44년 더 살다가 89년 봄 죽었다.

전쟁 책임은 총리 도조 히데키(東條英機)를 필두로 한 군인들이 지고 국제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일본은 운이 좋았다. 패전 후 곧바로 중국에서는 마오쩌둥(毛澤東) 군대가 장제스(蔣介石) 군대를 대만으로 쫒아내고 49년 본토를 통일하자 미국이 다급해졌다. 이어 50년 김일성의 남침으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을 군수보급기지로 삼았다.

한국전쟁중인 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일본의 전쟁책임을 면해주어 독도 문제의 빌미를 제공했다. 한국전쟁과 60년대 베트남전 특수를 통해 곧바로 국민소득이 2만달러를 넘어섰다.

패전의 우울을 딛고 64년 도쿄올림픽에서 일본의 재기를 전 세계에 과시했다. 정치적으로는 미국과의 상호방위조약으로 핵우산 속에서 국방비를 늘이지 않고 종합상사들을 통해 미국 유럽에는 자동차와 가전제품, 아시아 아프리카에는 오토바이와 농기구, 카메라 음향기기 등 전자기기들을 팔아 치웠다.

패전후 46년 1월 1일 ‘인간선언’을 한 히로히토는 전후 ‘맥아더헌법’에서도 ‘국가의 원수’라는 상징적인 권한을 갖고 있었지만 실제 정치는 전혀 관여하지 않고 식물학자로 살았다.

그러나 일본 국민들의 ‘천황가’에 대한 관심이 지대해 도쿄에 있는 황궁 앞을 참배하는 모습이 매스컴에 수시로 보도되곤 했다.

89년부터 지금의 아키히토가 왕이 돼 ‘헤이세이’(平成)시대가 시작됐다. 그는 자신이 백제 무령왕의 후손이라고 밝히고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를 침략한 일본의 전쟁책임을 인정했다.

88년 히로히토 일왕이 병상에 눕게 되자 여름 내내 정부는 물론 공공기관, 매스컴 등은 자숙분위기가 이어지더니 급기야 술집에서도 크게 웃지도 못하는 음울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긴자, 아카사카 등 유흥가도 겉으로는 썰렁했다. 일본에 진출해있던 한국 기업들도 개업축하식을 치루지 않을 정도로 ‘자숙’분위기가 심각했다.

88년 2학기 개학 후 후지산록의 별장에서 있었던 이토(伊藤)교수의 '국제커뮤니케이션론‘세미나에 참석한 학생들은 저녁 식사 후 자유롭게 술자리를 벌이다 ’천황제‘에 대한 토론이 벌어졌다.

20여명의 토론자 중 2명 정도가 천황제를 폐지해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그런데 찬성론자중 하나가 벌떡 술자리에서 일어나 그 친구를 보고 “너는 일본 국민이 아니냐”며 일갈해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지난 27년의 헤이세이 시대는 경제적으로는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에 해당된다. 정치적으로는 ‘평화를 이룬다’는 평성시대였지만 89년이 일본 고도경제성장의 정점이었다.

세계경제 침체와 부동산 가격 하락으로 인한 금융기관 부실이 이어져 20여년이 지났다.

200년만의 생전퇴위 인정여부, 여성 일왕의 즉위 여부 등 일왕제가 어떻게 전개될까에 대해서도 관심이 쏠린다.

침략전쟁을 포기한 헌법7조를 개정해 ‘보통국가’로 만들겠다는 아베 정권의 군국주의 회귀움직임을 어릴 때부터 전쟁의 비참함을 겪었던 아키히토 일왕이 얼마나 견제할 수 있을까?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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