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백의 국악가사 이야기

[이코노뉴스=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 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시조창으로 자주 부르는 황진이의 시조 중에 이런 것이 있다.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 내어

춘풍(春風) 이불 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룬님 오신 날 밤이어든 굽이굽이(펴리라)

동짓날 밤이 얼마나 긴가. 그 동짓날 밤 시간을 뚝 잘라다가 이불 아래 넣어두었다가, 어룬님 오신날 밤, 잘라놓은 밤을 다시 펴겠다는 내용이다. 동짓날 밤을 잘라다가 어룬님 오신 날 같이 보내면 밤이 더욱 길어질 것이 아닌가. 이 시조는 독수공방하는 여인네가 임과 함께 하는 긴 밤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 담겨있다. 그렇다면 ‘어룬님’은 무슨 뜻일까. 간단하게 말하면 ‘얼운 사람’, 즉 성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신라의 향가 <서동요>에,

선화공주님은

맛둥바을

남 그스지 얼어두고

라는 대목이 있다.

해석을 하면 “(신라의)선화공주님은 맛둥방(훗날의 백제 무왕)을 남 몰래 얼어두고”라는 뜻이 되는데, 이 때도 ‘얼어’는 성관계를 뜻하는 말이다. 요즘말로 하면 “선화공주님은 맛둥방과 남 몰래 통정(通情)을 하고” 정도가 된다. ‘얼우다’, ‘어루다’가 동사형이며 여기에 명사형 접미사 ‘이’가 붙으면 ‘어룬이’가 되고 이것이 변해 ‘어른’이 되는 것이다. 즉 ‘어른’이란 말은 어원적으로 성관계를 가진 사람이란 속뜻이 숨어 있다. 황진이와 어룬님이면서 그토록 애타게 황진이를 기다리게 했던 그 복많은 사나이는 누구였을까?

황진이의 시조는 은근하면서도 점잖고 아름답지만, 다음의 가곡 계면조 언편의 시조 한 수는 웃음을 자아내게 만든다.

백발(白髮)에 환양 노던 년이 젊은 서방을 맞초아 두고

센 머리에 먹칠하고 태산준령(泰山峻嶺)으로 허위허위 넘어가다가 과그른 소나기에 흰 동정 검어지고 검던 머리 희였고나

그를사 늙은이 소망(所望)이라 일락배락하더라

‘환양 노던 년’이란 ‘서방질하는 년’이라는 뜻이다. 머리가 흰 늙은 여자가 젊은 남자와 약속을 해 놓고 흰 머리에 염색을 하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마침 소나기를 만났다. 요즘처럼 염색약이 좋았으면 다행이련만, 먹을 사용해서 물이 빠져 저고리의 흰 동정은 검게 변하고 염색했던 검은 머리는 도로 백발로 변했다. 그래서 늙은 여자 소망이 좋았다 나빴다 했다는 것이다. 여자 입장에서 보면 낭패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이 시조는 늙은 여자의 성욕을 비난하면서 풍자하는 내용이지만 그 여인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어쩐지 좀 슬프다. 유전적으로 좀 일찍 머리가 세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고, 체질적으로 성욕이 강한 여자도 있게 마련인데, 그런 것이 조선시대의 상식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이다. 반면 남자의 경우는 아주 뻔뻔하다.

 

옥 같은 임을 잃고 임과 같은 자네를 보니

자네 긘지 긔 자네런지 아무긘 줄 내 몰라라

자네 긔나 긔 자네나 중(中)에 자고나 갈까 하노라

가곡 계면조 편수대엽 중의 한 수인데, 좀 상상력을 보태 설명을 하면 이런 내용이다.

한 남자가 아내 혹은 자신이 좋아하던 기생(첩)을 잃었다. 죽었는지 다른 곳으로 갔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든 옥 같은 임을 잃고 기생집으로 갔다. 그런데 새로 만난 기생을 보고 한 눈에 반했다. 그 기생에게 자네는 전번 그 여인과 너무 닮았다고, 그 여자가 환생한 것 같다고 너스레를 떨며 수작을 건다.

“자네가 그 사람인지, 그 사람이 자네인지 누가누구인지 나는 모르겠다”고 뻔한 수작을 건네는 것이다. 그리하여 자네이거나 그 사람이거나 누구이든지간에, 자신은 하룻밤 자고 가겠다는 것이다. 바람둥이 남자가 여자를 유혹할 때, 사용하는 전형적인 수법 중의 하나이다. 여자가 넘어갔을까?

▲ 지난 6월 서울 서대문구 봉원사 영산재도량에서 열린 '영산재와 함께하는 인류무형문화유산축제'에서 중요무형문화재 제30호 가곡 이수자 강권순과 가야금연주가 지애리가 공연하고 있다. /뉴시스 자료사진

가곡 우조 소용에는 더 재미있는 내용의 시조가 있다.

어흠아 그 뉘 오신고 건너 불당(佛堂)에 동령(動令)중이 내 올러니

홀거사(居士) 홀로 자시는 방안에 무스것하러 와 계신고

홀거사(居士) 노감탁이 벗어 거는 말 곁에 내 고깔 벗어 걸러 왔음네

이 시조의 상황을 재구성 해보자.

깊은 산 조용한 절간에 밤이 왔다. 요사체에는 남자 거사가 혼자 머물고 있다. 건너 불당에는 동냥을 다니는 여승이 혼자 있다. 밤이 깊어지고, 싱숭생숭해진 여승이 거사의 방 앞에 와서, ‘어흠’하고 기척을 한다. 거사가 묻는다.

“누구신가?”

“저예요, 건너 방에.”

“남자 혼자 있는데 이 밤중에 무슨 일로 오셨는가?”

“거사님 탕건 거는 곳에 내 고깔도 벗어 걸려구요.”

여기에 다른 말이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그들은 그날 밤, 한 숨도 못 잤다.

 

 

[이코노뉴스=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12세기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고려 예종 때 김황원(金黃元)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 한림학사(翰林學士)등을 지냈다. 학문에 힘써 고시(古詩)로 이름을 떨쳐 해동제일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다고 하며, 청직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예종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요나라에 가는 길에 대기근이 있는 북부지방에서 주군(州郡)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귀국 후 예부시랑 · 국자제주(國子祭酒) · 한림학사 ·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역임했다. 그는 임금이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어 물으면 대답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청직한 성격 때문에 남의 모함도 많이 받았다. 시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일화 한 편이 있다.

요즘도 그렇지만 경치가 좋은 누각에 가면 그곳 산천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이 누각 안쪽에 판각을 해서 많이 걸려 있다. 고려시대 평양 부벽루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랐다. 그런데 김황원이 보기에 그 시들은 하나같이 졸작이었다. 김황원은 그 시들을 모두 떼어 불태워 버렸다. 내심 그 시들보다 훨씬 뛰어난 후세에 길이 남을 시 한편을 써서 걸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김황원은 시상을 떠올리며 하루 종일 경치를 보다가 드디어 시 두 구절을 얻었다.

 

긴 성벽 한편으로는 넘쳐넘쳐 흐르는 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들 동쪽에는 한점한점 산이로다(大野東頭點鮎山)

 

하지만 그 뒤를 지을 수가 없었다. 7언 절구란 뒤에 두 구가 있어야 완성되는데, 아무리해도 뒤의 두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김황원이 해가 지고서야 통곡을 하면서 자신의 시재(詩才)의 모자람을 한탄하면서 부벽루를 내려왔다고 한다. 김황원은 통곡을 하고 내려왔지만, 이 시 두 구절로도 썩 훌륭하여 후대 사람들이 널리 기억하였다.

국악가사에도 이 시 구절이 가끔 등장한다. 다음의 ‘사설 지름’이 이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백구(白鷗)는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오 장송(長松)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라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에 석양(夕陽)은 비꼈는데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에 일엽어정(一葉漁艇) 흘리저어

대취(大醉)코 재기수파(載妓隨波)하야 금수능라(錦繡綾羅)로 임거래(任去來)를

 

“갈매기 훨훨 대동강 위를 날고, 낙낙장송은 청류벽 위에 푸르도다. 넓은 들판 점점 산은 석양에 비끼고, 긴 성벽 한편 흐르는 물에 배 한 척 띄워, 크게 취해 기생을 실은 채로 물결 따라 흘러가니 금수산 능라도로 흘러 들어가네”라는 의미다. 김황원의 시구를 인용했지만, 김황원의 시구에 비하면 훨씬 졸작이며 천박하기까지 하다.

▲ 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이 지난 2012년 7월 서울 중구 국립극장 내 하늘극장에서 열린 '통일기원 이북 5도 무형문화재 축제-두고 온 우리 춤, 소리, 굿!'공연에서 황해도의 ‘놀량사거리’ 등을 공연을 하고 있다. /뉴시스 자료사진

놀량사거리의 ‘사거리’에도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백구(白鷗)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하고

장송(長松)은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라 아하아

*장성일면(長城一面)은 용용수(溶溶水)요

대야동두(大野東頭)는 점점산(點點山)이라

 

즉, 김황원이 처음 시를 지었고, 그 다음 누군가가 이를 인용하여 사설 시조를 지었고, 이 시조를 다시 ‘놀량사거리’가 차용한 것이다. 70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도 김황원의 시는 민중들의 노래 속에 살아있게 된 것이다. 이는 훌륭한 예술의 이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완의 세계에 대한 후대인들의 아쉬움이기도 할 것이다.

 

※ 하응백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은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에 당선돼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옥봉의 몽혼’(2009)등 20여 권의 편저서가 있으며 ‘창악집성’(2011)이라는 국악사설을 총망라한 국악사설 해설집을 펴내기도 했다. 2002년 ‘휴먼앤북스’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하 이사장은 경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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