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응백의 국악 가사 이야기

[이코노뉴스=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시장]

▲ 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소리(성악곡)는 연습할 때는 혼자 하겠지만 그것이 가창(歌唱)될 때는 청중을 필요로 한다. 기악이 음률과 음색으로 청중에게 다가간다면 성악(聲樂)은 가사(사설), 즉 의미(뜻)라는 전달 매체가 하나 더 있다. 성악은 가사의 의미가 정확히 전달될 때 그 소리의 본질이 가창자(소리꾼)로부터 청중에게 감동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를테면 ‘춘향가’에서 ‘쑥대머리’를 부른다고 하자. “쑥대머리 귀신형용 적막옥방에 찬 자리여 생각나는 것은 임뿐이라 보고지고 보고지고 보고지고” 하는 부분이 있다. 이 부분은 춘향이가 죽음을 앞두고 목에는 칼을 쓰고 머리는 산발이 된 채 귀신과 같은 형상을 하고 아무도 없는 찬 바닥 옥중에서 이도령을 생각하며 부르는 노래다.

이 노래를 부를 때, 만약 ‘쑥대머리’나 ‘귀신형용’이나 ‘적막옥방’ 같은 가사가 다르게 전달되거나, 전달된다고 해도 청중이 그 뜻을 모른다면, 춘향이의 애절하고 절절한 그 심정을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즉 이 대목은 임방울이나 김소희와 같은 명창이 부르고 청중이 춘향이 처한 배경과 그 가사의 정확한 뜻을 알면, 모골이 송연해지며 머리카락이 곤두 서는 느낌을 받는 대목이며 아무리 목석같은 사람일지라도 눈물을 아니 흘릴 수 없는 장면이다. 하지만 청중이 가사의 뜻을 모른다면 그 감동은 반감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국악 가사는 부르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정확하게 이해를 하고 부르고 들을 때 국악 성악곡은 더욱 심도 있게 다가설 것이다. 하지만 국악 가사는 고어투거나 한문이 많이 섞여 있어 현실적으로 21세기를 살아가는 현대인이 알기 힘든 요소가 많이 있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은 교육과 공부를 통해 국악 가사에 다가가는 길밖에 없다. 특히 젊은 세대일수록 그렇다. 이 연재는 국악 가사를 보다 쉽고 재미있게 이해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 박귀희 명창의 업적을 기리고 가야금 저변 확대를 위해 열린 ‘칠곡 가야금 병창 전국대회’에서 국악인들이 가야금 병창을 하고 있다. /뉴시스 자료사진

가야금병창으로 부르는 ‘청석령 지나갈 제’라는 노래가 있다. 박귀희 명창이 잘 불렀다는 노래의 가사(사설)는 다음과 같다.

청석령 지나갈 제 초하구가 어디메뇨

호풍도 참도찰사 구진 비는 무삼일고

뉘랴 내 형상 그려다 님계신 곳 전해주리

부귀와 공명을 하직허고 가다가 아무데나

기산대하천 명당을 가리고서 오관팔작으로 황학루만큼 집을 짓고

앞내물 백조 한 배로 벗님네를 거나리고 옛노래를 한 연후에

내 나이 팔십이 넘으면 승피백운하야 옥경에 올라가

제방투호 다홍열을 나 혼자 임자가 되어서 늙어 노락허오리다(박귀희 사설)

이 사설에서 앞부분은 병자호란 이후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이 지은 시조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청구영언’에 실린 원문은 이렇다

청석령(靑石嶺) 지나거냐 초하구(草河口) 어듸메오

호풍(胡風)도 참도 찰샤 구즌비는 무스 일고

뉘랴셔 내 행색(行色) 그려내여 님 계신듸 드릴고

이 시조는 봉림대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잡혀가면서 한스러운 심정을 표현하고 있다. 북쪽의 청석령과 초하구를 지나니 오랑캐 땅의 바람은 너무나 찬데 궂은 비까지 내리고 볼모로 끌려가는 자신의 행색이 너무도 비참하다. 이 처참한 상황을 누가 그려서 한양에 있는 인조임금께 전해줄까 하는 내용이다. 여기까지 사설은 박귀희의 가야금병창 가사와 조금 다르긴 하지만 크게 달라진 것은 없어 이해하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그러나 그 다음 사설에 나오는 ‘기산대하천’, ‘오관팔작’, ‘백조 한 배로’, ‘다홍열’ 등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 필자도 이 부분이 해석이 안 되어 고민을 거듭했다. 역시 해답은 고전에서 나오는 법. ‘청구영언’을 뒤적거리다가 다음과 같은 작자 미상의 사설시조를 발견하고 무릎을 탁 쳤다.

공명(功名)과 부귀(富貴)과란 세상(世上) 사람 다 맛기고

가다가 아모데나 의산대해처(依山帶海處) 에 명당(明堂)을 갈외셔 오간팔작(五間八作)으로 황학루(黃鶴樓) 맛치 집을 짓고 벗님네 다리고 주야(晝夜)로 노니다가 압 내예 물 지거든 백주(白酒) 황계(黃鷄)로 내 노리 가잇다가

내 나이 팔십이 넘거드란 승피백운(乘彼白雲)하고 하날에 올나 가셔 제방투호(帝傍投壺) 다옥녀(多玉女)를 내 혼쟈 님자되어 늙을 뉘를 모로리라

이 시조와 가야금 병창 ‘청석령 지나갈 제’의 중간 사설을 비교해 보면 단번에 이 시조가 원본(原本)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작자 미상의 시조란 조금씩 달리 부를 수도 있다.

예컨대 ‘청석령 지나갈 제’에서 ‘기산대하천(奇山大河川)’으로 풀이 해 ‘기이한 산과 큰 하천’에 명당을 가린다고 해도 뜻은 통한다. ‘오간팔작’이 ‘오관팔작’으로 변한 것은 소리할 때 발음상 편의를 위해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청석령 지나갈 제’에서 ‘백조 한 배로’와 ‘다홍열’은 위의 시조를 찾지 못하면 도저히 그 뜻을 알 수 없게 와음(訛音)이 많이 진행된 것이다(와음이란 소리가 여러 이유로 인해 변한 것을 말한다). ‘백조 한 배로’의 원래 음과 뜻은 ‘백주(白酒) 황계(黃鷄)로’, 즉 ‘막걸리와 누런 닭으로’가 된다. 마찬가지로 ‘다홍열’도 ‘다옥녀(多玉女)’가 되어야 비로소 그 전체적인 뜻을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전체적인 내용은 부귀공명을 버리고 경치좋은 곳에 집을 짓고 벗들과 술이나 마시다가 팔십까지 살다가 죽으면 구름을 타고 하늘로 가서 미인들을 독차지 하고 살고 싶다는 것이다. 남자들이라면 누구나 그러고 싶을 것이다. 참 욕심도 많다.

‘청석령 지나갈 제’는 이처럼 서로 연관이 없는, 혹은 처참함의 주인공이 부르는 소리와 행복함의 주인공이 부르는, 즉 상호 이질적인 내용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즉 봉림대군의 시조와 작자미상의 사설시조 하나가 조합해서 이루어진 특이한 사설인 것이다.

현재 이 가야금병창을 부른 사람들도 박귀희 사설 그대로 부르고 있는데, 특히 앞으로 이 노래를 가야금병창으로 부르는 분들은 ‘백주 한 배로’를 ‘백주 황계로’ ‘다홍열’은 ‘다옥녀’로 고쳐 불렀으면 한다. 그래야 최소한의 뜻이 통한다.

 

[이코노뉴스=하응백 서도소리진흥회 이사장]

12세기 초,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900년 전 고려 예종 때 김황원(金黃元)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郞) · 한림학사(翰林學士)등을 지냈다. 학문에 힘써 고시(古詩)로 이름을 떨쳐 해동제일이라는 일컬음을 받았다고 하며, 청직하여 권세에 아부하지 않았다.

예종 때 중서사인(中書舍人)으로 요나라에 가는 길에 대기근이 있는 북부지방에서 주군(州郡)의 창고를 열어 백성을 구했다. 귀국 후 예부시랑 · 국자제주(國子祭酒) · 한림학사 ·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를 역임했다. 그는 임금이 책을 보다가 의심나는 것이 있어 물으면 대답할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었으나, 청직한 성격 때문에 남의 모함도 많이 받았다. 시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일화 한 편이 있다.

요즘도 그렇지만 경치가 좋은 누각에 가면 그곳 산천 풍경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들이 누각 안쪽에 판각을 해서 많이 걸려 있다. 고려시대 평양 부벽루도 그러했던 모양이다. 하루는 김황원이 부벽루에 올랐다. 그런데 김황원이 보기에 그 시들은 하나같이 졸작이었다. 김황원은 그 시들을 모두 떼어 불태워 버렸다. 내심 그 시들보다 훨씬 뛰어난 후세에 길이 남을 시 한편을 써서 걸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김황원은 시상을 떠올리며 하루 종일 경치를 보다가 드디어 시 두 구절을 얻었다.

 

긴 성벽 한편으로는 넘쳐넘쳐 흐르는 물이요(長城一面溶溶水)

넓은 들 동쪽에는 한점한점 산이로다(大野東頭點鮎山)

 

하지만 그 뒤를 지을 수가 없었다. 7언 절구란 뒤에 두 구가 있어야 완성되는데, 아무리해도 뒤의 두 구절이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김황원이 해가 지고서야 통곡을 하면서 자신의 시재(詩才)의 모자람을 한탄하면서 부벽루를 내려왔다고 한다. 김황원은 통곡을 하고 내려왔지만, 이 시 두 구절로도 썩 훌륭하여 후대 사람들이 널리 기억하였다.

국악가사에도 이 시 구절이 가끔 등장한다. 다음의 ‘사설 지름’이 이 시구를 인용하고 있다.

 

백구(白鷗)는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오 장송(長松)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라

대야동두점점산(大野東頭點點山)에 석양(夕陽)은 비꼈는데 장성일면용용수(長城一面溶溶水)에 일엽어정(一葉漁艇) 흘리저어

대취(大醉)코 재기수파(載妓隨波)하야 금수능라(錦繡綾羅)로 임거래(任去來)를

 

“갈매기 훨훨 대동강 위를 날고, 낙낙장송은 청류벽 위에 푸르도다. 넓은 들판 점점 산은 석양에 비끼고, 긴 성벽 한편 흐르는 물에 배 한 척 띄워, 크게 취해 기생을 실은 채로 물결 따라 흘러가니 금수산 능라도로 흘러 들어가네”라는 의미다. 김황원의 시구를 인용했지만, 김황원의 시구에 비하면 훨씬 졸작이며 천박하기까지 하다.

▲ 무형문화재 전승자들이 지난 2012년 7월 서울 중구 국립극장 내 하늘극장에서 열린 '통일기원 이북 5도 무형문화재 축제-두고 온 우리 춤, 소리, 굿!'공연에서 황해도의 ‘놀량사거리’ 등을 공연을 하고 있다. /뉴시스 자료사진

놀량사거리의 ‘사거리’에도 다음과 같은 가사가 있다.

 

백구(白鷗) 편편(翩翩) 대동강상비(大同江上飛)하고

장송(長松)은 낙락(落落) 청류벽상취(淸流壁上翠)라 아하아

*장성일면(長城一面)은 용용수(溶溶水)요

대야동두(大野東頭)는 점점산(點點山)이라

 

즉, 김황원이 처음 시를 지었고, 그 다음 누군가가 이를 인용하여 사설 시조를 지었고, 이 시조를 다시 ‘놀량사거리’가 차용한 것이다. 700년 정도의 세월이 지나면서도 김황원의 시는 민중들의 노래 속에 살아있게 된 것이다. 이는 훌륭한 예술의 이어짐을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미완의 세계에 대한 후대인들의 아쉬움이기도 할 것이다.

 

※ 하응백 서도소리 진흥회 이사장은 199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문학평론에 당선돼 문학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이옥봉의 몽혼’(2009)등 20여 권의 편저서가 있으며 ‘창악집성’(2011)이라는 국악사설을 총망라한 국악사설 해설집을 펴내기도 했다. 2002년 ‘휴먼앤북스’라는 출판사를 설립하여 운영하고 있는 하 이사장은 경희대 국어국문과를 졸업하고 문학박사를 취득했으며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교수, 국민대학교 문창대학원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편집자 주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