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쌈박하다. 큰 홀 정면에 ‘Jose FELICIANO'라는 이름의 전광판 장식이 전부다. 7월 16일, 17일 저녁 올림픽공원내 올림픽홀에서 있었던 그의 내한공연 모습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시절인 60,70년대 팝계를 주름잡던 그의 애절한 목소리만큼이나 심플하다.

▲ 남영진 논설고문

일요일인 17일 오후 5시 공연전에 공연장 앞에 모인 청중들도 대부분 60대였다. 2천여명이 모였지만 입구 앞에는 걸그룹이나 아이돌 공연의 흥분도 없었다. 4천원짜리 팜플렛을 파는 매장도 한산했다.

팜플렛 제목은 ‘호세 펠리치아노가 전하는 감미로운 사랑의 이야기’다. 위대한 팝아티스트 팝의 전설!’ ‘레이 찰스(RAY CHARLES), 스티브 원더(STEVE WONDER)와 더불어 세계 3대 시각장애인 팝아티스트 트로이카‘라는 제목이 붙어있다.

전에는 ’장님가수‘라 표현했는데 차별적 용어라고 해서 ‘시각장애인’으로 바꾼 것이다. 앞의 두 가수가 모두 흑인이어서 호세 펠리치아노도 흑인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호세’ 펠리치아노(Jose Feliciano)의 ‘호세’라는 이름을 보면 그가 라틴출신임을 알 수 있다.

미국 팝계에서 루이 암스트롱, 레이 찰스, 스티비 원더, 마이클 잭슨까지 아프로 아메리칸들이 백인들의 흑백차별을 견뎌내며 정상에 올랐다.

호세가 라틴 아메리카 출신으로 미국 음악계의 주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타고난 음성에다 하루 14시간씩의 끈질긴 기타 연습이 바탕이 됐다.

그에 이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도 미국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날의 공연에서도 비록 걷기에 불편한 몸이었지만 기타연주는 녹이 슬지 않았다.

오후 5시가 조금 넘어 30년 지기인 매니저의 손을 잡고 걸어 나와 통기타를 잡고 의자에 앉은 그는 ‘안녕하세요’라고 한국말로 인사했다. 연주는 5인조였다. 바로 뒤에는 베이스기타가, 양옆에는 나이가 든 피아노와 전자오르간 연주자가 자리잡았다.

뒤 높은 곳에는 젊은 드러머와 라틴계 특유의 봉고연주자가 스틱과 손으로 연주를 시작했다. 대형 밴드가 아닌 심플한 멤버였다.

호세는 영어 노래부터 시작했다. 마이클 잭슨이 특유의 ‘문워크’로 젊은 팬들을 열광시켰던 ‘빌리진’과 라틴계 이름인 ‘안젤라’를 포함해 4곳을 현란한 손가락 튀김을 자랑하며 불렀다.

영어노래는 ‘비내리는 오후의 그리움’을 전해주는 감미로움이 있었다. 한 신문기고자는 누이를 회상하며 “창밖에 빗소리가 가득하면 누이는 벽면 가득한 음반중 호세 펠리치아노의 레인(Rain)과 원스 데어 워즈 어 러스(Once there was a love)를 들려달라고 했다. 누이는 그의 애절한 목소리를 좋아했다. 지금도 이 곳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촉촉이 젖어 누이가 그립다”고 썼다.

그는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몇 곡을 더 했다. 역시 발라드풍인 영어노래보다 탱고풍인 라틴음악인 ‘퀘 사라(QUE SARA)' '라 밤바(LA BAMBA)' 등은 힘이 있었다.

▲ 호세 펠리치아노/뉴시스 자료사진

호세의 노래는 발라드의 부드러움과 락앤롤의 강력함이 합쳐져 청중을 집중시키는 호소력이 있다. 그는 스페인어 억양이 밴 영어로 자신이 미국의 식민지인 푸에르토리코에서 태어나 하루 14시간 이상 기타연습을 했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70년대 그의 음악으로 젊음의 시간을 향유했던 세대 등은 ‘Once There was a Love'를 들으며 사랑을 노래했고 'Rain'을 들으며 우수에 젖어들었다. 그의 대표적 영어노래다.

그러나 그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로 부른 'QUE SARA'가 64년 산레모가요제에서 입상하면서 세계적으로 알려졌다. 우리나라에도 시각장애인 가수인 이용복씨가 번역해 불러 인기를 얻었다. 이날 공연도 나이가 들어서인지 외국어인 영어노래보다 라틴노래가 자연스러웠다.

푸에르토리코는 카리브해의 쿠바위에 있는 섬이다. 푸에르토 출신의 백인이니 스페인 식민자의 후예일거다. 1945년 서인도제도의 푸에르토리코 힐타운에서 태어났으니 올해 우리나이로는 칠순을 넘긴 72살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앞을 보지 못했지만 9살 때부터 남의 기타연주를 들으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18살 때 뉴욕으로 진출해 스페니쉬 할렘에 있는 푸에르토리코 극장에서 첫 무대에 섰다. 1963년에 뉴욕의 포크 시티에 출연중 RCA 레코드사에 발탁돼 1964년에는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에 출연했다.

호세는 1965년 데뷔 앨범인 ‘더 보이스 앤드 기타 오브 호세 펠리치아노(The Voice And Guitar of Jose Feliciano)’를 내고 다음해 두 번째 앨범 ‘백 풀 오브 소울(Bag Full of Soul)’을 발표하면서 탁월한 자신의 기타 솜씨를 선보였다.

기타연주의 대가인 지미 핸드릭스에 버금간다는 평가를 들었다. 그는 68년 앨범 ‘Feliciano!’에 이미 도어스(Doors)가 발표하여 히트시켰던 ‘라이트 마이 파이어(Light My Fire)’를 삽입해 편곡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해 그래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남성 가수상과 최우수 신인 남성 가수상을 받았다. 이 앨범에 소울풍의 동양적 애수가 엿보이는 ‘Once There Was A Love’가 들어있다

이후 그는 팝계 최고인 그래미상에 무려 17차례에 노미네이트 됐고, 8번 그래미상을 받아 '팝의 전설'‘이 됐다. 이후 발매한 앨범 중 45개가 골드와 플래티넘을 기록했고 1996년에는 미국 최대 음악잡지인 빌보드지에서 평생 공로상을 수상했다.

그는 4년 전인 2012년 가을 부산CBS 초청으로 부산 시민회관에서 공연했다. 이날 공연 중간에도 이때 배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쏘주 맛있다’ 등 한국말을 써 친근감을 더했다. 앵콜 20분을 포함해 2시간동안 통기타와 전자기타를 번갈아가며 노래했다.

비록 나이가 들어 고음 처리에 어려움이 있었지만 마지막 내한공연으로 생각하는 듯 열심히 노래했다. 1970~80년대 한국의 거리와 라디오를 점령했던 호세의 명곡 ‘'Rain’과 ‘Once there was a love’, ‘Que Sara' 등 30여 곡의 노래와 연주곡이 110여 분동안 쉴새없이 울려퍼졌다. 진한 감동도 함께 메아리쳤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