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코노뉴스=김미영 칼럼니스트] 내가 앤드루 솔로몬을 알게 된 것은 <한낮의 우울>을 통해서다. 우울이라 하면 두꺼운 커튼을 드리운, 아니 커튼조차 없는 어둑한 지하방에 웅크린 한 인간이 떠오르는데 백주 대낮의 우울이라니.

▲ 김미영 칼럼니스트

첫 소설이 출간되어 나쁘지 않은 평을 받고 멋진 새 집도 사고 3년 전의 어머니 죽음과 2년 전의 연인과의 결별도 탈 없이 받아들인 때, 절망의 구실이 소진된 시점에 우울증이 살금살금 다가왔다고 하니, 그래서 제목이 그런가 보다 했다.

우울증 투병기라 보기엔 녹록치 않은 심리학 지식도 펼쳐졌지만 읽지 못할 바는 아니었다. 그러나 700쪽 짜리 우울증 책을 다 읽어 내기엔 나의 정신 편력이 그다지 심오하지 않았다. 이런 책을 끼고 앉은 것이 우울증을 영접하는 것이여 하는 변명 같은 두려움도 생기고. 하여 70쪽 정도 읽고 덮었다.

연초에 <경험 수집가의 여행>이라는 책을 사면서 딱히 저자를 주목하지 않았다. (우울증과 여행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그 앤드류 솔로몬이라 생각하지 않으려 했던 것 같다.) 그저 지식인스러운 여행기, 그러니까 압도적인 교양과 지식을 말랑말랑한 여행담으로 녹여낸 재미난 책이기를 기대했다.

그런데 목차에서 저자가 다닌 곳을 일별하니 맙소사 1988년의 러시아, 1993년의 남아공, 2000년대의 아프가니스탄과 리비아, 그리고 르완다 등등이지 않은가. 세계 사정에 해박하지 않아도 지은이의 여행(?)이 한가로운 경험 수집의 투어는 아니라는 것쯤은 능히 알겠다. (원래 제목은 FAR AND AWAY)

게다가 미술잡지 특파원 자격으로 체제 전환기의 예술 활동을 탐사하는 것이 주된 내용인 것 같아 지레 포기하려는데 서문이 눈을 잡아챈다. 그는 유대인 집안 사람이다.

아버지가 홀로코스트를 알려 주었을 때 7살 그가 던진 질문은 “유대인들은 왜 상황이 나빠졌을 때 그냥 떠나 버리지 않았어요?” 아버지의 답 “아무 데도 갈 데가 없었거든.” 그 순간 그는 언제든 어딘가 갈 데가 있는 사람이 되겠다고 결심했단다. 참으로 처절한 동기의 역마살이로고.

700쪽이 넘는 종횡무진을 (심지어 자기와 이름이 같은 솔로몬 제도에도 간다. ㅋㅋ) 아는 것은 모처럼 다시 알고 모르는 것은 패스하고 송나라 때 보물이 장개석이 갖고 튀어서 대만에 다 있다는 걸 처음 알고, 어떤 것은 쌈박하게 정리해줘 고맙다는 식으로 발췌독을 하던 중 유난히 내 마음을 찌르고 들어오는 한 꼭지가 있었다. “나쁜 기억의 아이들 (르완다)” 편.

▲ 저자: 앤드루 솔로몬역자: 고기탁출판사: 열린책들

현대 전쟁은 태반이 종족 간 분쟁이고 그러니 상대의 씨를 말리려 든다. 그 동전의 양면같이 우리 씨를 뿌린다는 개념도 있다. (이 남성 중심적 언사를 용서하길.) 강간이 전쟁의 부수적 민간인 피해가 아니라 필수적인 전략 전술이 된 것이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는 둥 정치사회학 강의할 때 흥분하던 주제.

그런데 나는 전시 강간이 ‘화냥년’만 만드는 데 그치지 않고 ‘나쁜 기억의 아이들’도 만든다는 것을 주목하지 못했다. 강간으로 잉태된 아이를 낳아 기르는 엄마들! 생명의 소중함 어쩌고 때문은 아니고 죽지 못해 산 그녀의 대체로는 낙태 실패와 영아살해 실패인 것인데…

강간범의 얼굴을 한 자식, 매 순간 치욕스런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 엄마를 자기 종족으로부터 영원히 추방시키는 아이를 키우는 엄마의 심경과 고난이 오죽할까. 증오하고 학대하고 버리고 거둬들여 키우고 지 새끼이기도 하니 곱기도 하고 의지도 되고. (강간범의 자식이라고만 보는 것은 가부장적 발상이라고 하는 이도 있다.)

그 꼭지가 담긴 책이 <부모와 다른 아이들>이다. 솔로몬의 대표 저작으로 손꼽힌다고 한다. 원제가 Far from the Tree – A Dozen Kind of Love 이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1,2권 합해 1500쪽이 넘는다.

무려 8쪽에 이르는 ‘감사의 말’은 이렇게 시작한다. “이런 책은 절대로 혼자 해낼 수 없는 대규모 작업이고 나는 무엇보다 인터뷰를 허락하고 상당한 개인적인 희생을 감수하면서 고통스러운 경험담을 들려준 분들과 그들의 가족들에게 감사한다.”

▲ 지난 7일(현지시간) 르완다 수도 키갈리 아마호로 스타디움에서 르완다 대학살 25주기 추모 행사가 열려 참가 시민들이 추모 촛불을 밝히고 있다. 【키갈리(르완다)=AP/뉴시스】

때로는 폐쇄적일 해당 커뮤니티로 들어가게 도와준 안내자들, 인터뷰를 주선하고 통역해준 이들, 방대한 리서치 팀 등등이 있었다. (이런 작업을 해내는 한 사회의 지적 용량 capacity이 부러워서 하는 얘기다.)

청각 장애, 소인증, 다운증후군, 자폐증, 정신분열증, 장애(중대한 복합장애:multiple severe disability), 신동, 강간, 범죄, 트랜스젠더 등이 다름의 면면이다. 부모와 다르다고 하지만 부모와 다른 게 핵심이 아니라 다른 게 핵심이다.

그러나 부모가 언급되어야 하는 것은 이 다름에 대한 솔로몬의 대응이 다양성, 똘레랑스, 다문화주의가 아니라 사랑(부모의 자식 사랑)을 키워드로 삼기 때문이다. 사랑하므로 돌보지만 돌보아서 사랑하기도 하는. 그러면서 자녀를 변화시키고 또 지지하는. 일도양단의 이론이 아니라 이러저러한 가족들의 경험과 저마다의 생각을 이야기해 주는.

여담부터. 한국인으로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이런 목록에 신동이 들어갔다는 것이다. 우린 얼마나 선망하고 기대하는가? 그것이 장애, 범죄와 함께 등장하다니.

서두에서 도입하는 구분이 있다. 수직적 정체성과 수평적 정체성. 전자는 보통 생각하는 정체성이고 후자는 “부모와 다른, 선천적 후천적 특징을 갖고 태어나서 동류집단에서 정체성을 찾아야 하는 아이들이” 가족이 아닌 여타 하위문화에 동참함으로써 정체성을 습득하는 것을 말한다. 예컨대 아시아인임은 수직적 정체성, 게이임은 수평적 정체성.

정체성으로 본다는 것이 뜻하는 바는? 옛날에 동성애는 처벌되는 범죄였다. (가장 유명한 케이스는 오스카 와일드의 재판.) 좀 지나면 외과수술로, 정신치료로, 콘플레이크로 고쳐 보려고 했다. 병이라는 것이다. 이제 동성애는 이성애와 동일 선상의 성적 정체성이다. 스티그마였던 것을 외려 긍지를 갖고 천명하여 정체성 정치학을 만들어낸다.

게이 프라이드, 매드프라이드(mad pride), 농인 인권 운동, 신경다양성운동 등등. 거기에는 범주마다 정도는 다르지만 그 어떤 난점이 존재한다. 무엇이 정체성이고 무엇이 질병인가? 솔로몬 자신은 난독증은 질병이고 게이임은 정체성이라는데.

나아가 낙인을 찍는 것도 나쁘지만 낭만화하는 것도 나쁘다. <긍정의 배신>이 떠오른다. 유방암 환자들이 병을 긍정하다못해 축복이라고까지 한다고 에렌라이크는 통탄했다.

청각장애 경우를 보자. ‘장애’가 들어간 이 말을 안 쓰려면 어째야 하나, 비건청인? 농인? 들을 수 없다는 것은 의학적 문제 아닌가? 만족스럽지는 않지만 보청기나 인공와우이식수술이라는 치료 방법이 있고 의학이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그런데 정체성 정치학이라니. 청각장애는 청능의 부재가 아니라 청각 장애의 존재이다. 농인을 장애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 나름의 언어를 가진 하나의 인종집단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수화를 어떻게 보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들리지 않으니 말을 못하는 것일 뿐 훈련하면 말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 구화 옹호론이다. 그들 보기에 수화는 유치한 애들 말이다.

반대 입장에서는 수화가 하나의 구조화된 언어(language)여서 아주 복잡하고 세련된 의사소통이 가능하며 사투리처럼 지역색을 띠기도 하고 어휘가 계속 발전한다고 한다. “농문화(Deaf culture)는 하나의 문화이고 삶이며, 언어면서 미학적 특징이고 신체적 특징이자 다른 이와 구분되는 지식이다. 몸과 마음의 긴밀한 조화가 중요. 언어가 단지 혀와 후두의 제한된 구조가 아니라 여러 근육 조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물이기 때문이다.”(119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하려 들면 가부장적이고 자기 집단 중심이고 사이보그 생산이고 나아가 학살이라는 것.

 

▲ 영화 레인맨/네이버 이미지 캡처

그 인구가 급증한다는 자폐증의 경우는 어떤가. ‘사회적 신경 전형인’(498쪽)과 다른 이를 ‘자폐증이 있는 사람’ 나아가 ‘자폐인’으로 보며 나아가 ‘신경 다양성 운동’을 하는 이들이 있다. 낙인을 찍고 중구난방의 치료법으로 괴롭히고(효과 없이) 자폐가 학대의 결과라며 가족을 비난하는 것을 불식시키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자폐증의 진정한 실체를 하찮아 보이게 만들지 않는” 것도 중요하다. “낙인이 없어져도 고통은 남기” 때문이다.

자폐 하면 많은 이가 영화 <레인맨>을 연상할 것이다. 더스틴 호프만이 연기한 그 자폐인은 숫자에 능해 돈이 궁한 동생을 기쁘게 한다. “의사소통을 할 수 없고, 대소변을 가리는 데 문제가 있으며, 빈번하게 자해 행위를 하는 사람들의 고통”(505쪽)은 가려져 있다.

솔로몬이 일갈하듯 우쭐대는 과학도 싫고 메스꺼운 감상벽도 싫다.(716쪽) 뒤집어 말하면 의료적 접근도 중요하고 정체성 정치학도 중요하다. 참으로 어려운 문제다. 솔로몬이 열정적으로 그러모은 케이스들을, 그 혼돈의 이야기들을 경청할 밖에. 빛은 상처난 곳을 통해 들어온다고 하니.

※ 김미영 칼럼니스트는 고려대학교 사회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고려대, 홍익대 등에서 강사로 일했고 학술연구교수를 역임했다.

전공은 현대공동체주의(communitarianism)로 관련 책과 논문을 여럿 발표했으며 섹슈얼리티 문제도 연구했다. 광우병 사태 즈음에 한겨레신문에 칼럼을 연재한 경험이 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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