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태국이 오는 8월 새 개헌안에 대한 국민투표를 앞두고 집회시위에 관한 단속을 강화하면서 7월부터 정치인들의 해외여행을 허용하는 등 강온양면 전략을 쓰고 있다.

2년 전인 2014년 5월 쿠데타를 통해 민주정부였던 잉락 친나왓 여성 총리를 몰아내고 집권한 군부는 그간 국민의 정치활동은 물론 정치인들의 해외여행도 금지했었다.

▲ 남영진 논설고문

그러나 아직도 인기가 있는 탁신 전 총리의 동생인 잉랏에 대해서는 농민들에게 이중곡가제를 적용하는 포퓰리즘 정치로 정부재정을 고갈시켰다는 혐의로 재판중이라는 이유로 해외여행도 허용치 않고 있다.

2년 전 방콕시내는 반(反)잉랏파의 반정부 데모와 친정부파간의 대결 시위가 매일 이어져 시내교통이 마비되곤 했다.

가끔 폭발물이 터져 사상자가 속출해 해외 관광객들이 기피하는 곳이었다. 쿠데타로 집권한 전 육군참모총장 프라윳 찬오차 총리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간 최고 군정기구인 국가평화질서회의(NCPO)를 통해 5인 이상의 집회를 불허했다.

반정부 인사들을 '태도교정'(attitude adjustment)이라는 이름으로 군 기지로 데려다 조사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면 풀어주는 등 우리나라 70년대 ‘유신시대’의 긴급조치를 방불케하는 조치도 취해왔다.

그러나 지금의 방콕은 계엄을 느끼지 못할 정도로 평온하다. 그 이유로 태국 국민들의 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과 태국의 ‘대나무 외교’(bamboo diplomacy)를 꼽는다.

대나무 외교는 태국이 격동하는 국제 사회의 흐름 속에서 독립을 유지할 수 있었던 외교적 특색을 비유한 말이다.

현재의 차크리왕조(방콕왕조)는 1782년 방콕을 수도로 시작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 등 서구 열강에게 자신의 속국과 영토의 일부를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정치적 독립을 유지했다.

2차대전 때는 일본군에게 군수지원과 버마(미얀마)침략의 교두보인 ‘콰이강의 다리’ 건설에 협조하면서 식민지가 되지 않도록 현실적 유연성과 신축성을 발휘했다.

▲ 태국의 잉락 친나왓 전 총리가 지난 5울 30일 북부의 한 학교를 방문해 학생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고 있다. 2년 전 군부 쿠데타로 쫓겨난 잉락 전 총리는 정치활동이 금지돼 있으나 8월 군부의 헌법안 국민투표를 앞두고 정치적 언사 없는 전국 순회에 나섰다. 【부엥칸=AP/뉴시스】

태국은 강제적 상황이었지만, 외형상으로는 자의로 양보한 것이라는 형식을 취했다. ‘왕과 나’의 주인공 라마 4세인 뭉큿왕은 영국이 버마를 점령하자 1855년 4월 서북쪽의 버마 국경지대와 지금의 말레이시아 일부를 영국에 넘겨주는 불평등조약인 바우링조약을 감수했다.

또한 프랑스가 중국의 광둥(廣東)과 인도차이나로 진격하자 동남쪽의 캄보디아 일부를 넘겨 프랑스의 ‘코친차이나’ 식민국가를 만들게 했고, 동북쪽에 있는 라오스를 할양해 프랑스가 라오스와 베트남의 하노이를 엮어 ‘통킹’이라는 식민국가를 만드는 걸 양해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 견제하면서 어느 쪽도 태국을 독점적으로 지배하지 못하도록 한 것이다.

라마 4세는 영국을 시작으로 미국, 프랑스, 덴마크, 네덜란드, 프로이센, 벨기에 등 총 13개국과 조약을 체결해 불평등조약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서구 열강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면서 태국은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낼 수 있었다.

 
 

이어 태국 국왕 중에서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을 받는 라마 5세 쭐랄롱꼰 대왕(Culalongkorn, 재위: 1868~1910년)은 서구식 문물을 수용하여 부복(俯伏)제와 노예제 및 강제부역의 폐지, 도박장의 폐쇄, 징세제도의 확립, 교육제도의 개선, 우편제도의 개선, 6부 장관제 폐지와 12부 장관제 시행을 통한 행정기구의 개편과 지방행정개혁 등을 단행했다.

▲ 영화 '왕과 나'

‘왕과 나’ 영화에서 왕세자로 나왔던 그는 종교 자유를 보장하고 전국에 철도와 전신망을 갖추게 하는 등 라마 4세가 추진한 근대화 개혁을 구현해 냈다.

그는 1897년 러시아와 독일 등 유럽 10개국 1차 순방에 이어 1907년 독일과 프랑스 등 10개국을 2차로 방문해 견문을 쌓으면서 태국의 근대화에 헌신했다.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게 영토의 일부를 양도해야 했고 불평등조약을 맺는 불이익을 감수해야 했지만 서구 열강 틈에서 국가의 자주권을 지켜 냈고 스스로 근대화를 주도한 가장 뛰어난 군주로서 오늘날까지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태국 외교는 강한 나라에게는 순종하고 주변의 약한 나라에는 강압책을 쓰면서 실리를 취해왔다.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패하자 승자인 영국편에 가담했다. 1917년 4월 1차대전 때에는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 전승국으로 국제연맹 창설에 참여했다.

2차대전 중에는 아시아의 강자인 일본에게 붙었다가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미국에 접근해 피해를 입지 않았다. 이후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공군과 육군 3,650명을 파병하면서 미국과 한국을 도왔다.

‘대나무 외교’에 대해 기회주의라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인도 버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등 주변국들은 모두 식민지배를 받았지만 태국은 역사상 한번도 받지 않았다. 중요한 외교적 사태가 발생하면 그 사태의 전개 방향이나 결과를 냉정하게 주시하고 냉철한 시각으로 기다려 승자의 입장에 서서 자신의 독립을 지킬 수 있게 하였다.

태국은 그 많은 쿠데타와 정권교체에도 불구하고 아세안(ASEAN)의 중심국가 역할을 수행하고 경제를 비교적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다.

프라윳 총리는 지난 6월 1일 방콕에서 열린 G77포럼에서 의장국으로 “태국에 평화가 돌아오지 않는 한 총리의 자리에 계속 있을 것”이라며 “우리는 군인을 사용해 나라를 발전시키고 있고 우리 군대는 누구와 싸우거나 정치적 억압을 하지 않는다”며 민정이양 가능성을 일축했다.

문제는 90세를 맞는 현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라마 9세)의 건강이다. 이미 심장병 등으로 대외 활동을 자제하고 올해 뇌종양 수술을 받아 국민들이 걱정하고 있다.

재위 70주년 행사를 기념하는 화폐도 발행됐다. 하나뿐인 왕세자가 그간 여러 스캔들로 인기가 별로 없다.

1932년 입헌군주제가 됐지만 쿠데타나 격변시에는 절대적 승인권을 행사해온 살아있는 불교왕 ‘라마’의 힘은 막강하다. 대나무 외교의 뒤에는 이 라마의 지지가 있었다고 봐야 한다./태국 방콕에서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