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태국이 ‘메이 키즈’ 양산 시대로 들어갔다.

태국에서는 지난 5월 세 차례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연속우승을 차지한 골프 ‘괴물’ 아리야 주타누간을 애칭으로 ‘메이’라고 부른다.

▲ 남영진 논설고문

주타누간이 5월초 태국 선수로는 처음으로 LPGA에서 ‘늦깎이’ 우승을 하자 태국의 골퍼들은 환호했다. 이후 6월부터는 ‘골프의 천국’이라는 태국의 수도 방콕과 두 시간 거리에 위치한 100개가 넘는 골프장에 부모들이 어린 선수 지망생들을 데리고 나오는 모습이 늘어나고 있다.

우리에게도 1998년 이후 낯익은 풍경이다. 98년 박세리가 LPGA US오픈선수권대회에서 연장전 끝에 태국의 아마추어 맞수를 꺾고 우승했을 때 우리나라는 IMF 구제금융을 받는 우울한 때였다.

그 시절만 해도 골프를 잘 몰랐던 국민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박세리가 18번 홀서 신발과 양말을 벗고 호수 안에 들어가 그린에 공을 올려 비긴 다음 연장전 2번째 홀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린 장면은 국민들의 우울증을 확 씻어준 쾌거였다.

이 장면은 몇 십번 씩이나 TV에 중계됐다. KBS가 양희은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라는 노래와 함께 불굴과 끈기의 한국을 상징하는 공익광고로 만들어 국난 극복을 위한 ‘금모으기’ 등 국민들을 한마음으로 모았다.

▲ 아리야 주타누간/AP=뉴시스 자료사진

1995년 11월생인 주타누간은 그때 3살이었다. 어릴 때부터 언니를 따라 골프를 배웠던 주타누간은 신장이 170㎝가 넘는 건장한 체구에서 뿜어 나오는 드라이브 장타가 일품이다.

만 17세에 프로무대에 데뷔해 곧바로 2013년 유럽여자골프투어에 진출했다. 그해 태국에서 열린 혼다 LPGA에 출전해 마지막 홀까지 2타차 선두를 지켰다. 보기 플레이만 해도 우승할 수 있는 18번홀에서 어이없이 트리플 보기를 범하면서 스스로 무너져 박인비에게 우승컵을 넘겨준 쓰라진 경험이 있다. 이때 태국 팬들은 크게 실망하며 지난 3년간을 기다려왔다.

그도 그럴 것이 박세리가 물에 들어가 ‘불후의 명장면’을 연출했던 98년 US오픈대회 ‘맨발의 우승’의 희생양이 당시 아마추어였던 태국선수 제니 추아시리폰이기 때문이다.

미국 LPGA 첫 우승을 놓친 태국은 박세리의 연장전 우승 이후 스웨덴의 아니카 소렌스탐, 멕시코의 로레나 오초아, 대만의 청야니, 미국의 스테이시 루이스 등이 휩쓸고 한국 여자 선수들이 잇따라 우승 행진을 하자 첫승을 18년이나 기다려야 했다. 추아시리폰은 바로 은퇴해 지금은 간호사로 일하고 있다.

이후 태국 여자 선수들에게는 좀처럼 우승의 기회가 오지 않았다. 한국에 골프붐이 불어 ‘박세리 키즈’들이 양산되고 한국의 여자프로골퍼대회인 KLPGA 우승이 곧 미국의 LPGA 우승의 등용문처럼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 박세리/롯데=뉴시스 제공

박세리를 모델로 연습에 나선 ‘세리 키즈’들이 미국 여자프로 무대를 휩쓸고 있는 박인비 신지애 지은희 최나연 유소연 김세영 전인지 김효주 등이다. 일본에서도 선배 전미정에 이어 이보미 신지애 김하늘 등이 연간 10승 이상을 올리고 있다.

98년 박세리의 US여자오픈 첫 우승 이후 지난해 전인지까지 7명이 챔피언이 나왔다. 박인비는 2008년과 2013년 두번 우승해 한국 선수들이 8차례 우승트로피를 안았다.

2005년 김주연, 2009년 지은희, 2011년 유소연, 2012년 최나연 등이 영광의 주인공이었다. 2014년에는 재미동포인 미셸 위가 우승했다. 세계1위인 뉴질랜드 교포 리디아고까지 합치면 한국인 아니고는 미국여자프로골프가 성립하기 힘들 정도다.

스물한살인 주타누간이 5월초 ‘요코하마 타이어 클래식’에서 태국선수로 첫 우승한 후 내쳐 ‘킹스밀 챔피언십’ ‘볼빅 챔피언십’ 등 3개 대회를 휩쓸자 태국선수들의 기도 살아나고 있다.

이미 4년 전 미국에 진출했던 포나농 파트룸과 주타누간의 언니 모리야 주타누간 정도가 가끔 상위 랭커가 되긴 하지만 우승을 할 정도는 못돼 아시아 선수로서는 한국 일본 대만 다음 정도였다.

그런데 이번에 ‘핫 골퍼’ 아리야 주타누간이 ‘강심장’으로 다른 면모를 보이며 여유있게 우승해 미국 여자프로계 판도를 더욱 흥미롭게 하고 있다.

태국의 남자 골퍼는 국민적 영웅으로 떠받드는 통차이 자이디가 독보적이다. 미국이 아닌 유럽무대에서 몇 번 우승을 하며 자존심을 지켜 태국 공항에서 귀빈석을 이용할 정도다.

여기에 주타누간의 3연속 미국 대회 우승 직후인 6월초 일본 ‘요넥스 레이디스’ 여자프로대회에서 태국의 포라니 추티차이가 투어 5년 만에 첫승을 올렸다. 태국선수로서는 2년3개월 만에 일본에서 우승하자 태국팬들의 여자골프에 대한 관심이 더욱더 고조되고 있다. 골프장에 소녀골퍼 연습생들도 눈에 띄게 늘고 있다.

아리야 주타누간의 3연속 우승은 박인비의 3연속 우승이후 두 번째여서 태국 골프역사의 신화를 쓰고 있다. 3년 전 우승을 놓쳐 언니 모리야 주타누간의 품에 안겨 펑펑 눈물을 흘리던 아리야가 아니다.

이제는 장타자의 면모만이 아니라 티샷도 아이언으로 하면서 대회를 치를 정도로 점점 여유를 보인다. ‘새가슴’이라고 놀림을 받던 그녀가 20살이 넘고 코치를 바꾸는 등 훨씬 강해진 정신력으로 한국 선수들을 질리게 만들고 있다.

3연승 후 리디아고와 김세영, 캐나다의 브룩 헨더슨 등이 연승가도를 막아 주춤하고 있지만 주타누간은 계속 준우승 등 상위 랭커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그래서 ‘태극낭자’들의 기가 ‘태국낭자’들에게 넘어가는 게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문제는 8월 브라질 리우 올림픽 금메달이다. 개인전 금메달은 얼마전까지만 해도 박인비냐 뉴질랜드의 리디아고냐였다. 지금은 태국의 주타누간과 캐나다의 브룩 헨더슨이 가세해 점치기 어려워졌다.

미국 CNN이 최근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10가지’중 스마트폰, 노동시간, K-POP스타 등을 소개하면서 8번째로 세계 최고의 여자골퍼들을 들었다. 세계 랭킹 100위안에 38명으로 미국보다 많다.

그 비결이 ‘타이거 맘과 타이거 대디’의 엄격한 훈련이란다. 타이거 대디로 이미 어릴 때부터 유성CC에서 엄격히 가르친 박세리의 부친의 노력은 잘 알려져 있다. 지난해 우승 때까지 골프채를 메고 경기장 캐디로 함께한 최윤정 아버지의 열의도 유별나다.

한국을 본받은 태국 ‘타이거 패런츠’들이 기승을 부려 10년 후엔 우리를 넘보지 않을까?/태국 방콕에서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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