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88 서울올림픽 준비가 한창이던 그해 여름 일본 히로시마 평화공원에 갔었다.

한국일보 기자시절 도쿄의 게이오대학 신문연구소에서 방문연구원으로 연수하던 여름방학 때였다. 결혼 6년차라 식구들을 다 데리고 도쿄 교외의 단칸방에서 살았는데 너무 더워 유치원에 다니던 두 딸을 데리고 이모가 살던 히로시마로 놀러갔다.

▲ 남영진 논설고문

당시 어머니가 한국에서 도쿄에 오셔 함께 당신 여동생집에 간 것이다. 부모님은 일제 강점기에 일본에서 결혼해 45년 태평양전쟁 종전 직전 아버지 고향인 충북 황간으로 나오셨다.

아버지는 10대에 먼저 일본에 들어간 형이 초청해 시모노세키에서 멀지않은 야마구치현의 오노다라는 곳의 탄광 막장에서 일을 했다. 후에 조선인으론 드물게 운전면허를 따내 트럭 운전을 해 월급을 많이 받았다한다.

외조부 가족은 경북 성주 가야산 밑에서 농사를 짓다 먹고살기가 힘들자 5남4녀를 데리고 시멘트 회사로 유명한 오노다시로 옮겨 살았다. 그러니 큰딸인 어머니로서는 44년 만에 일본에 오신 것이다. 오노다 근처 노인요양병원에 계신 외할머니 병문안도 하고 한분 계신 오빠와 남녀동생들 집을 들르는  순방코스였다.

외삼촌 두 분은 도쿄에서 건축일을 해 우리집과 삼촌집에서 두 번 만났다. 막내 외삼촌은 어머니가 한국에 나오시고 태어났기 때문에 처음 상봉한 것이다. 막내삼촌이 어머니를 뵙자 말로만 듣던 큰누나라며 바로 눈물을 글썽였다.

도쿄에서 신칸센 열차로 2시간 반 걸려 히로시마에 도착했다. 이모가 자동차로 마중 나와 한국인이 많이 사는 북쪽 언덕에 있는 예쁜 단독주택에 닿았다. 문패에는 물론 이모부의 한국성인 엄씨가 아니라 일본성인 ‘도미하루’(富春)로 써 있었다.

방문 다음날 히로시마 삼각주에서 바다로 나간 일본 3경의 하나라는 미야지마(宮島)섬을 방문했다. 바다갯벌에 세운 이츠쿠시마(嚴島) 신사의 빨간 도리이(鳥居)가 돋보였다. 꽃사슴들이 뛰어놀아 명승지로 꼽히는 곳이다. 여기서 이모에게 ‘대본영’(大本營)이란 말을 들었다.

이곳에 해군함들이 드나들었고 원폭 투하로 날아간 히로시마성안에 전쟁지휘부인 대본영이 있었다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일본이 제2차 대전을 치루기전 연승했던 근대 3번 전쟁의 육·해군을 지휘한 곳이었다. 1894년 5월 청일전쟁, 1904년 2월 러일전쟁, 1937년 11월 중일전쟁부터 태평양전쟁 패전까지의 총지휘본부가 원폭을 맞은 히로시마성이었던 것이다.

다음날 원폭투하지인 평화기념공원을 찾았다. 넓은 해자를 보니 옛성터였고 건물들은 완전 없어지고 돌담만 남았던 터에 새로 지은 천수각이 눈에 들어왔다. 사진에 많이 나오는 하나남은 철골건물인 ‘원폭돔’이라고 불리는 히로시마물산전시관 건물이 당시의 참상을 전해주었다.

▲ 대본영 비석

경찰서, 재판소터 등을 둘러 보고 드디어 대본영비석을 발견했다. ‘**明治二十七八年戰役廣島大本營(명치이십칠팔년전역광도대본영)’이라 씌어 있다. 명치유신이 1868년이었으니 27~28년 지난 청일전쟁기인 1885~1886년 첫 전쟁 지휘본부였던 것이다.

지워진 위의 두글자는 ‘사적’(史蹟)이었는데 태평양전쟁 패전후 군국주의 색채를 지운 것이다. 입구쪽으로 되돌아 나오는데 이모가 저쪽 바깥구석에 ‘한국인원폭희생자위령비’가 있다고 했다. 공원길에서도 보이지 않아 아이들을 데리고 좁은 길을 돌아들어가니 비주위에 꽃이 올려져있는 탑이 보였다.

피폭 당시 히로시마에는 약 10만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었고 이중 절반인 5만명이 희생됐다. 3만명은 원자폭탄에 사망하고 중경상을 입은 2만명중 1만5천명 정도가 귀국해 원자병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1967년 원폭피해자 협회가 결성돼 일본에 치료와 피해보상을 요구했지만 91년에서야 일부 치료를 받게 됐다. 70년 민단 히로시마본부가 주도해 평화공원 내에 위령비를 건립하려다 거부돼 70년 4월 바깥에 세운 것을 나는 88년에 본 것이다. 99년 7월 평화공원 안으로 옮겼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 5월 27일 이곳을 방문해 위령비에 헌화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위령비 앞에서 20분간 소감을 발표했다

오바마는 “71년 전 구름 한점없이 맑은 날 아침, 하늘에서 죽음이 떨어졌다. 그리고 세상은 바뀌었다. 섬광과 불길이 도시를 파괴했고, 인류는 스스로를 파괴할 수단을 가지고 있음을 과시했다. 말로는 그날의 고통을 표현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왜 우리가 여기에 왔느냐"며 “우리는 그리 멀지 않은 과거에 끔찍한 힘을 행했던 것을 깊이 생각해보기 위해 왔다. 우리는 죽은 자들을 애도하기 위해 왔다. 모든 영혼들을 여기 평화롭게 쉬게 하자. 우리 모두 악(evil)을 반복하지 말자"고 촉구했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27일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 원폭 희생자 위령비에 헌화하기 위해 걸어가고 있다. [히로시마=AP/뉴시스]

그는 "이 곳에서 죽은 수십만 명의 일본인과 수천 명의 여성, 어린이, 그리고 수천 명의 한국인 그리고 수백 명의 미국인 등 그들의 영혼이 우리에게 말한다. 2차 세계대전에서 6000만 명이 죽었다. 죽은 남성과 여성, 어린이들은 우리와 다르지 않다. 히로시마 원폭 투하로 생긴 버섯 모양의 구름은 인간애와 반대되는 것을 보여줬다“고 말했다.

또 " 언젠가 피폭을 목격한 사람들의 목소리를 더 이상 들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기억은 결코 희석되지 않는다. 그 기억은 우리의 상상력의 원동이 되며, 우리에게 변화를 촉구한다”고 말했다. 그는 방명록에 "우리는 전쟁의 고통을 알고 있다. 이제는, 함께, 용기를 내어서 평화를 확산시키고 핵무기 없는 세상을 추구하자"고 적었다.

오바마 대통령은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에는 일본인 뿐만 아니라 한국인, 미국인도 포함돼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하지만 조선인 위령비엔 가지 않았다. 우리나라 외교부는 “현직 미국 대통령이 최초로 히로시마 현장에서 한국인 희생자를 명시적으로 애도한 점을 높이 평가한다”고 말했다.

일본 언론과 일본인들은 오바마의 이번 방문과 발언을 원폭투하에 대한 사죄로 받아들이는 분위기다. 오바마 방문으로 지지율이 올라간 아베 신조 일본총리는 이미 헌법7조의 '전수방위‘조항을 개정해 전쟁을 할 수 있는 ’보통국가‘로 만들겠다는 일관된 의지를 내보이고 있다. 중의원을 해산하고 올 7월 참의원 선거 때 더블선거를 치러 확실한 지지분위기를 만들려던 계획은 구마모토지진으로 일단 접고 있다. 많은 한국인들은 미국이 전쟁의 총지휘부였던 히로시마에 원폭을 투하해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이 됐고 한국동란을 도맡아 치룬 미국을 은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일본의 근대 4차례 전쟁 모두 한반도를 할퀴어 식민지였던 우리가 제일 많은 피해를 입었다. 이 피해의식은 침략전쟁을 제대로 사과하지 않은 일본이 원폭의 피해자란 점만 부각시켜 언젠가 평화기념공원을 ‘대본영’으로 또다시 바꾸지나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낳고 있다.

※ 남영진 상임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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