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3.1절 100주년을 앞둔 지난2월27일 오후2시 불교의 총본산인 종로2가 조계사경내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는 2건의 3.1운동 관련 세미나가 열렸다. 2층에서는 ‘31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다루는 만해 한용운스님을 조명한 세미나가 열렸다.

▲ 남영진 논설고문

지하2층에선 또 다른 불교스님으로 독립선언33인의 1인으로 한용운과 참여한 백용성스님에 관한 세미나였다. ‘님의 침묵’의 시인인 한용운은 육당 최남선이 쓴 ‘독립선언서’에 앞서 또 다른 독립선언서를 기초했던 인물이다.

2층에 들러 지하2층 세미나장에 들어가려니 젊은이들이 강당 앞에 모여 있었다. 외부인사 안내를 맡는 대학생들이려니 생각했는데 접수대에 들렀더니 세미나자료가 다 떨어질 정도로 많이 참석했단다. 대강당에 좌석은 물론 뒤에 선 사람들도 움직이기가 힘들 정도로 가득 찼다. 일반에게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백용성스님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높았던가.

3.1 만세운동의 민족대표 33인은 지역이나 사회 각계를 대표한 게 아니라 전체 종교계의 대표들이었다. 당시 교세가 강했던 천도교의 교주 손병희의 자금지원으로 가능했고 천도교 서명자도 33인중 절반에 가까운 16명이나 됐다. 여기에 비교적 신흥종교였던 개신교의 목사 등 15명이 서명해 전국으로 확산하는데 큰 도움이 됐고 불교에서는 ‘불교유신론’을 쓴 대처승 만해 한용운과 대각사를 창건한 백용성 스님 등 2명이 참여했다. 조선시대를 주도했던 전국의 유림들과 130여년의 순교역사를 가진 가톨릭측은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당시 파리외방선교회출신으로 조선교구장이었던 프랑스인 뮈텔주교는 정교분리원칙을 내세워 천주교인들의 만세운동 가담을 불허했다. 1860년대 대원군집권시절 병인박해 등으로 천주교도들을 잡히는 대로 처형했던 때에 몰래 입국했던 파리외방선교회소속 루이 보리외, 안토니오 다블뤼신부등도 잡혀 처형됐다. 이미 1830년대 앙베르,샤 스탕, 모방 신부 등 프랑스인 신부들이 잡혀 순교했다. 1984년 요한바오로2세 교황이 한국을 방문해 103위 성인을 시성했을 때 한국에서 순교한 10명의 프랑스인 성인이 들어가 있을 정도였다. 이런 역사적 트라우마가 만세운동 가담을 막았던 것이다.

백용성은 일반인들에겐 잘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대한불교조계종 대각회 대각사상연구원은 2017년부터 학술세미나를 개최해오고 있으며 '백용성 대종사 총서' 발간을 추진해 왔다. 그는 1864년 태어나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했다. 그는 명산대찰을 돌면서 수행했다. 40세에는 중국과 만주를 순례하면서 견문을 넓혔다. 하동의 쌍계사 칠불암에서 수행 중 1910년 한일합방 소식을 들었다. 곧바로 중생과 함께 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숨은 공로자들이 다시 재조명되고 있는데 불교계에서 만해 한용운과 함께 또다른 한분의 스님 백용성도 새롭게 평가되고 있다. 사진은 3.1절을 하루 앞둔 28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 광장에서 어린이가 체험을 하고 있는 모습. /뉴시스

당시 불교는 일제에 어느 정도 협조적이었다. 조선왕조 500년 동안 ‘숭유억불’(崇儒抑佛)정책으로 사찰과 승려는 천대를 받아왔다. 일본 승려의 노력으로 1895년 승려의 한양도성 출입 금지령이 해제돼 불교계의 분위기가 친일적이었고 일제가 사찰령을 반포하면서 불교계를 회유했다. 오랜 불교국인 일본이 명치유신이후 신도를 앞세우면서 불교를 흡수했고 조선의 불교도 그 일환으로 합치려고까지 했다.

백용성스님은 귀경해 그는 종묘옆에 대각사를 세우고 선학원을 열어 불교 대중화에 힘쓴다. 첩첩산중에서 행하던 선(禪)을 ‘참선’이라는 이름으로 대중화했다. 3년 만에 3천명 신도가 모였다. 그는 불교계 개혁을 외치는 한용운을 강사로 초빙했다. 3.1항쟁을 앞두고 한용운이 불교대표로 참여하자고를 권유했다. 백용성은 1년 6개월간 서대문형무소에서 있으면서 기독교 목사들이 한글성경을 읽는 것을 보고 한문으로만 된 불경을 한글로 옮길 것을 결심한다.

그러나 불교계의 비방과 반대가 심했다. 중세 유럽에서 가톨릭이 라틴어 성경을 고집하고 사제들이 라틴어미사만 봉헌하고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는 것을 막은 것과 같았다. 성경해석의 자유가 허용되면 바티칸의 권위에 도전할 것을 우려한 이유다. 백용성은 스스로 불경을 번역하고 보급해 나갔다, 1921년 금강경이, 28년에는 화엄경이 한글로 선보였다. 이때부터 일반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각일요학교를 개설했고 30년에는 대각성전과 요사를 증축했다.

▲ 27일 서울 종로 조계사 경내 불교역사문화기념관에서 열린 독립선언33인중 한분인 백용성 스님에 대한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이 백용성스님에 대해 토론하고 있다.

그는 또한 불교계 정화에 나섰다. 일본 불교에 동화된 대처승들이 늘어나고 사찰들과 승려들의 부패도 심해졌다. 조선시대 억압받으면서 살아남아온 노예근성이 질을 떨어뜨렸고 일제가 교묘하게 불교를 통제하면서 불교의 타락을 부채질했다. 백용성은 참선과 계율을 강조하면서도 부처의 가르침도 현실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이들을 질타했다. 일제는 대각사가 민족자주성을 일깨운다고 보고 31년 대각사 재산을 몰수하는 등 탄압하기도 했다.

그에게 불교의 개혁이란 부처님의 가르침으로 돌아가는 일이지만 중생들에게 기생하는 생활은 안 된다고 보았다. 그래서 본인 스스로 금광도 운영하기도 했고 황무지를 개간하여 그 이익금을 몰래 임시정부에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권력자에게 머리 숙여 기생하는 것이 일종의 습관이 되어 있었던 조선 불교의 주류에서 외톨이가 됐다. 그는 식민지 시대 암담해져 가던 불교계의 행보를 홀로 저지하고 바로잡아 보려고 노력했다.

백용성은 1940년 2월 24일 76세로 입적했다. 세미나장을 나온 후 조계사에서 멀지않은 종묘옆에 있는 대각사를 찾았다. 정문 앞에 1999년 서울시가 세운 ‘용성스님 거주터’라는 까만 표지석이 서있다. “31운동 민족대표 33인중의 한분으로 불교혁신운동을 펼친 백용성스님(1864-1940)이 활동하던 곳”이라 써 있다. 용성스님은 해방 전에 죽었다. 그러나 상해로 망명 전 서울에 오면 대각사에서 머물렀던 김구 주석과의 긴밀한 관계 때문에 해방 후 45년12월 김구선생과 임시정부요인들의 귀국할 때 귀국봉영회도 대각사에서 맡았다. 3.1운동 100주년이 되어서야 숨은 공로자들이 재조명되고 있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저작권자 © 이코노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