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영진의 청호칼럼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올겨울 태국 방콕과 베트남 호치민의 한류 분위기가 확 달랐다. 반년 만에 가보는 방콕은 한류 분위기가 시들해졌고 1년 만에 들른 호치민은 후끈 달아있었다.

▲ 남영진 논설고문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이 동남아시아대회인 스즈키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직후라 양국의 우호 분위기가 절정이었다.

5, 6년 전부터 동남아의 대표도시인 이곳을 다니면 K팝의 영향으로 도시 곳곳에서 한글간판이 늘어나고 현지TV에선 한국드라마가 한국어 그대로 방영되곤 했다.

12월 중순부터 보름간 방콕, 호치민을 들르면서 양국의 한국 붐이 ‘방콕 시들, 호치민 절정’임을 실감했다.

6년 전부터 여름, 겨울 한차례씩 들러 방콕에서는 학교 선후배들과 골프모임을 주로 하고 호치민서는 사업을 하는 후배가 있어 베트남 현지인들과도 자주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베트남항공을 타면 방콕과 호치민이 비슷한 가격이어서 먼저 방콕 일정을 조금 길게 하고 귀국길에 호치민을 들러 온다.

방콕엔 한국인들이 80년대부터 많이 드나들기 시작해 제조업은 별로 없지만 한국과의 농산물, 해산물 무역과 유통업 요식업 등에 많이 종사했다.

그러나 자동차 기계공업 등 중장비산업은 거의 일본 기업들이 차지하고 있다. 금융이나 상업은 인구의 30%를 점하고 있는 중국계 화교가 장악하고 있다.

쿠데타로 물러난 탁신 친나왓 전 총리, 그의 여동생 잉랏 친나왓 전 총리 등도 중국계의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5년 전 쯤부터 방콕의 한국타운이라 일컫는 스쿰빗로나 통로역 근처에 한국 음식점에 이어 빙수가게가 선보였다.

오랫동안 한국 교민들이 더운 나라에 팥빙수를 팔아보려고 시도했지만 잘 안되다가 우유빙수인 ‘설빙’(雪氷)이 한국에서 유행하면서 이 제품을 들여와 성공했다고 한다.

큰 길 가에 한국말로 ‘설빙’‘빙수’라고 쓴 상점이 눈에 뜨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 보니 많이 문을 닫았다.

고려대 토목공학과를 나와 쿠웨이트에서 일하다 귀국길에 방콕을 자주 들렀던 김경환 사장(64). 방콕이 좋아 3년 전에 시내 한복판인 스쿰빗12가에 ‘바닐라 스노우’라는 빙수집을 열었다.

머쏘우대학 앞이라 대학생들이 몰려와 팥빙수를 시켜먹으면서 한국음악을 들으며 분위기를 한껏 맛보곤 했다. 1년 만에 대박을 친 그는 지난해 롯대쇼핑이 면세점을 만든다고 가수 싸이 등과 함께 투자해 작년 4월 개장한 ‘쇼DC’(Show DC) 라는 대형 면세쇼핑몰 2층에 2호점을 냈다.

▲ 태국 왕족이 면세점을 거의 독점한 관계로 롯데면세점 진출이 어려워지는 등 한류 파워가 태국에서는 시들해졌다. 사진은 태국공항의 킹파워면세점.

자신 있던 김 사장이 이번에 만났을 때 좀 풀이 죽어 있었다.

‘바닐라 스노우’는 팥빙수보다 과일빙수, 와플 등 신제품을 선보여 그런대로 버티는데 쇼DC는 태국 왕족이 소유하고 있다는 ‘킹파워’가 면세점을 허용차 않아 아직까지 개장휴업이란다.

방콕의 ‘홍대 거리’로 불리는 RCA(로열 시티 애비뉴) 한복판에 서있는 쇼디시건물이 불 꺼진 밤에 을씨년스럽게 보였다. 쇼디시몰의 부진은 동남아에 진출한 ‘한류=성공’이 더 이상 통하지 않는 대표적 사례다. 한류의 원조라던 태국에서조차 “한류가 시한부?”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태국 한류의 쇠락은 일본의 견제도 한몫했다. 태국과 일본과의 관계는 오래 됐다. 16세기인 태국 중부의 전 왕조인 아유타야왕조시대부터 일본의 에도(江戶) 막부가 나가사키(長崎)를 통해 교류해 아유타야박물관에 가면 조선의 부산이 무역로 지도에 들어있다.

나가사키를 경유해 조선시대 부산진 초량(草梁)에 있던 왜관과 무역을 한 것이다. 이런 오랜 우호관계 때문에 한류가 만개하기도 전에 일본이 견제했다는 것이다.

태국은 ‘작은 일본’으로 불린다. 2013년 무렵부터 한류의 영향력이 본격화하자 일본도 2015년부터 ‘저팬엑스포’를 열어 문화 공세를 시작했다. 한국의 10배 수준이었다.

중앙정부와 산하기관, 지방자치단체까지 총력 물량 공세를 펴왔다. 한국은 코트라, 한국관광공사, 한국문화원 등 각각 행사를 하고, 지자체도 거의 비슷한 콘텐츠로 제각기 한류 이벤트를 벌이는 것과 대조적이다.

방콕서 베트남팀이 스즈키컵 결승전에서 우승하는 것을 TV로 보고 21일 호치민에 도착하니 완전 축제분위기였다.

기내서 베트남뉴스 신문에 박항서 감독의 신한은행 전면광고를 보고 내리니 공항내 TV부터 박 감독과 축구선수들이 수시로 등장한다.

박 감독이 보상금 10만달러를 전액 기부했다는 훈훈한 뉴스부터 베트남 유수의 가죽제품 매장인 ‘라까’가 교민들에게 제품 1개씩을 무료 증정한다는 기사까지 풍성했다.

▲ 베트남에서는 박항서감독의 파파리더쉽이 한류를 고조시키고 있다. 사진은 호치민공항에서 볼 수 있는 박감독 광고사진.

이번은 그동안 여행 분위기와는 달랐다. 국내는 달아올랐던 남북관계가 식고 경기부진에 이어 내년에도 별로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음울한 뉴스가 이어졌다.

호치민은 우승과 성탄절이 겹쳐 활기가 돌았다. 베트남에 공장을 확장한 삼성전자가 베트남 GDP(국내총생산)의 30% 이상을 기여하며 친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는데 이번 박 감독의 ‘파파 리더쉽’이 그 불을 타오르게 했다.

내년에는 문재인정부의 ‘아세안 중시정책’에 숨통을 틔워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성탄절에 귀국 비행기에 올랐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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