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인간의 육체가 긴 진화의 역사를 지닌 여러 기관의 박물관임을 보여 주듯이, 마음도 같은 양식으로 꾸며져 있다고 할 수 있다.

▲ 김선태 편집위원

마음의 그릇인 육체가 그러하듯이 이 마음 또한 역사 없이 그저 생겨났다고 볼 수는 없다. (...) 아득한 옛날의 그 마음이 오늘 우리가 지니고 있는 마음의 바탕을 이룬다. 이것은 흡사 우리 인간의 육체 구조가 포유류의 일반적인 해부학적 패턴에 그 바탕을 두고 있는 것과 같다. 나는 그 고태의 잔재를 ‘원형’ 혹은 원초적 심상이라고 부른다. - 『인간과 상징』, 칼 융, 열린책들, 98~99쪽.

이제 인간 육체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포유류들의 세계 속으로 우리 마음의 원형을 찾으러 떠나 보자. 이 책을 통해. 그리고 이 책을 탄생시킨 어떤 마음의 여정을 따라.

 

▲ ‘마른 길 지나 먼 길 돌아서’(본문에서)

아픈 영혼의 마음이 담긴 그림책

우미정. 지방 도시에서 태어나 어른이 되기까지 거의 대부분을 한 동네에서 자랐다. 가난은 그녀로 하여금 갇힌 삶의 나날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집안일을 도맡아 했고 늦게 귀가하는 부모님을 대신하여 어느 때부터 두 살 어린 남동생을 돌봤다.

삶은 날마다 조금씩 고달파졌고 꿈은 그만큼 조금씩 그녀로부터 멀어졌다. 엄마가 곁을 떠난 뒤로 그녀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그런 그녀에게 하나의 낙이 있다면 그림이었다. 어릴 때 낙서하는 버릇에서 시작된 그림은 그녀의 마음에 작은 위안을 주었고 몇 년에 걸쳐 그리기를 계속하다 미대에 진학하게 되었다.

“그릴 때는 언제나 행복했어요. 그림이 나의 출구였지요.”

그렇다고 그녀의 삶이 크게 바뀌지는 않았고 어떤 면에서는 더욱 팍팍해져 갔다. 작고 소소해도 좋으니 무언가 하지 않으면 질식할 것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노래는 들을 때마다 마음에 쏙쏙 박혔지만 그 즐거움을 지속하기에 일상은 각박했다. 쇼펜하우어는 삶이 고통의 연속이며, 그로부터 벗어나려면 일체 욕망을 버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녀는 욕망이 무언지도 모를 때부터 고통스러운 삶에 던져졌던 것이다.

어느 날 내셔널 지오그래픽사가 야생의 생태에 관해 제작한 다큐멘터리 방송을 보았는데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뒤로 비슷한 방송을 시도 때도 없이 보면서 그녀의 마음이 아프리카 초원에 머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초원을 누비는 누떼 가운데 자신이 한 마리 누(gnu)가 되어 서 있는 상상을 하곤 했다.

그녀에게 유도 선수인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훈련장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곤 했다. “모래밭에 서면 땅이 나를 든든하게 떠받쳐 주는 걸 느껴.” 그 말이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었고 그녀는 그림에서 그걸 느끼고 싶었다.

그러던 2016년 초 작심하고 앉아 초원과 그 위를 누비는 동물들을 그리기 시작했다. 6개월이 지나자 어엿한 형체를 갖춘 사자와 누, 얼룩말과 표범, 비 오고 싹 트는 대지 같은 수채화들이 그녀의 책상 위에 수북이 쌓였다. 그녀는 그림 위에 짧은 글을 얹어 하나로 엮었다. 그녀의 영혼이 담긴 아프리카 초원의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가 그렇게 탄생했다.

그 무렵 그녀는 한 회화 단체의 주선으로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규모의 아동 도서전으로 날아갔다. 자신의 작품을 알아줄 해외 출판사를 만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은 그러나 얼마 안 가 실망감으로 바뀌고 말았다. 그녀의 작품을 본 해외 출판인들로부터 돌아온 답은 하나같이 ‘어렵다’는 반응이었다. 그런 답을 예상하지 않은 건 아니었으니 그녀 자신도 자신의 그림책이 어린이보다는 어른을 위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되돌아보며 그린, 나를 위한 그림들이었으니까요.”

볼로냐에서 돌아온 뒤 용기를 내어 몇몇 출판사에 이메일을 보냈지만 반응은 비슷했다. “귀하의 그림이 저희 방향과 맞지 않음을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이처럼 정중한 회신을 받은 뒤 그녀는 기대를 접기로 했다.

시간이 무심하게 흐르던 2018년 2월 어느 아침, 이메일을 열어본 그녀는 새벽 2시에 도착한 메일 하나를 열었는데, 내용은 간단했다. “일단 만나 봅시다.” 그 뒤 모든 게 처음처럼 진행되었다. 더미북의 상태가 좋지 않아 그림을 다시 그렸고, 심하게 짧은 글을 놓고 길고 긴 고민을 이어갔다. 이렇게 하여 7월이 되자 그녀의 작품, 『초원』이 책이 되어 세상에 태어났다.

▲ 『초원』 = 우미정 글‧그림, 책고래, 2018. 7. 27.

우리 모두는 ‘초원을 걷는 누떼’의 일원

『초원』의 표지는 강렬한 눈빛을 지닌 암사자의 시선을 담고 있다. 본문에는 단 한 마리의 사자도 등장하지 않으므로 이 책은 표지에서부터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하필 맹수가 독자를 잡아먹을 듯이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는 표지를 그려야 했을까, 아이들이 봐야 할 책인데. 이 물음에 작가는 초원을 누비는 사자라면 당연히 그래야 할 모습을 그렸다고 답했다.

“사자는 우리를 먹이로 볼 테니 그렇게 그리는 게 맞을 거 같았어요.”

그 말을 듣고 보니 작품 속 그림들이 왜 불친절하게 느껴지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느 순간에도 녹록지 않은 자연, 책은 그 찰나의 순간들을 정지 화면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를 강조하기 위해 작가는 의도적으로 한 군데에서 자연스러운 묘사를 피했는데, 그것은 흰자위를 넣어 공격성을 극대화한 맹수의 눈동자다. 한 장 한 장 회화 작품이라 해도 좋을, 수없는 반복과 덧칠과 세부 묘사로 이루어진 그림들이니만치 작가가 그 안에 무언가 다양한 상징을 담으려 하지 않았을까?

“그러지 않으려 했어요. 초원에서는 죽고 죽이는 모습이 자연의 섭리이기 때문에 거기에서 실제로 벌어지는 모습을 숨기지 않으려 했어요. 그럼에도 동물들은 늘 새롭게 태어나고 자라며 초원의 일부로 되돌아가잖아요.”

그럼에도 작가가 자신의 삶의 원형을 자연에서 찾았다는 이유에서, 맥락이 상징을 낳는다는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의 말처럼, 맥락을 담은 기표들인 이 그림들은 무언가를 상징할 수밖에 없다. 작품으로 돌아가면 이를 알 수 있다.

책은 표지를 넘기면 광활한 초지 위로 누떼가 장관을 이루며 나아가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이 장면에서 인간 사회를 연상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 속에서 우리 각자는 한 마리의 누가 되어 묵묵히 걸어가거나 풀을 씹거나 아니면 보이지 않는 초원 어디에서 사자나 표범의 밥이 되어 사라져 가고 있을 것이다.

누떼는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묵묵히 걷고 또 걸어 이윽고 얼룩말 떼와 만난다. 이제 누와 얼룩말들은 하나로 뒤엉켜 초원을 삶의 터전으로 삼아 그로써 하나의 사회를 이루어 나고 자라며 서로 기대고 머물며 헤어지고 만나기를 거듭하며 나아간다.

어느 순간 초원은 끝나고 거대한 강이 그들 앞에 나타나지만 누떼는 멈출 줄 모른 채 강가로 모여든다. 강물 속에는 악어떼가 우글거리므로 감히 어느 누도 어떤 얼룩말도 먼저 뛰어들 엄두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풍요로웠던 지난날은 끝나가고 새로운 보금자리는 저 건너에서 손짓하고 있으므로 어떻게든 이 강을 너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을 모든 동물들이, 또는 우리들이 알고 있다.

▲ ‘함께 달리고 목을 축이고’(본문에서)

누군가 용감하게 희생을 각오하고 강물에 뛰어들기만 기다리는 때, 조만간 일어날 어마어마한 투쟁에 대한 공포와 떨림으로 그들의 마음이 격렬하게 요동치며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릴 때, 한 마리의 누가 드디어 땅을 박차더니 강물 속으로 거대한 몸집을 날린다. 이어지는 사투, 그리고 모든 것이 다시 새롭게 시작되고 살아나고 움트며 나아가는 것이다.

“나는 강물에 먼저 뛰어드는 누가 되고 싶었어요.”

그림을 그리며 작가가 품은 희망은 이것이었다. 칼 융이 말했듯이 지상의 현실에는 ‘냉혹한 대극성’ 즉 밤과 낮이 있고 탄생과 죽음이 있으며 쾌락과 고통, 선과 악이 있으며 누구도 그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심지어 선이 악을 이기지 못하며 불행이 행복을 압도하는 삶은 이전에도 그러했듯 앞으로도 넘쳐날 것이다. 그런데 실은 이처럼 전쟁터 같은 인간 사회란 것도 자연에서 그 원형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그린 초원처럼.

마른 길 지나 먼 길 돌아서

비가 올 때쯤

넓게 펼쳐진 이곳 초원은

내가 태어난 곳 네가 자란 곳 (본문에서)

잠시 우리의 삶으로 돌아와 보자. 모두가 거대한 강물 앞에서 웅크리고 있을 때 과연 앞장서 뛰어들 이 누구일까. 아마도 삶의 아픔을 아는 이, 자신의 아픔이 곧 모두의 아픔이기도 해서, 자신을 위한 용기가 모두의 희망이 될 수 있다 믿는 이, 그런 이가 아닐까.

그와 같은 용기와 희망을 날것 그대로인 초원 위에 펼쳐 보이는데 성공했기에, 이 책은 한 아픈 영혼이 자신을 위하여 그렸지만 동시에 세상 아픈 영혼들의 마음까지 함께 담아내기에 이르렀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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