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영진 논설고문

[이코노뉴스=남영진 논설고문] 문재인 대통령은 지난 17일 오후 바티칸 성베드로 성당에서 열린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미사’에 김정숙 여사와 참여한 뒤 15분간 특별인사를 했다.

“우리는 기필코 분단을 극복하고 평화를 이룰 것”이란 내용이었다. 다음날인 18일 문 대통령은 약 1시간 동안 프란치스코 교황을 단독 예방해 “멈추지 말고 앞으로 나아가라. 두려워하지 말라”라는 격려의 말을 들었다.

이 자리에는 한현택 신부만 통역으로 배석했다.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자리에서 사실상 방북(訪北) 의사를 밝혀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추진에 상당한 힘이 실리게 됐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미 미국-쿠바와의 국교정상화와 콜롬비아 정부와 반군과의 평화협정을 중재해 ‘세계의 평화메이커’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 정세의 주요 고비였던 평창 동계올림픽 개회식에 대표단을 파견하고 1차 남북정상회담, 북미정상회담 등 중요한 시기마다 미사 강론을 통해 한반도의 평화를 기원해준데 대해 감사를 표시했다.

이로써 신교 신자인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전 세계 인구의 17.7%인 12억8500만 명의 신자를 보유한 가톨릭의 수장이 직접 한반도 평화를 위한 중재역에 나서는 것을 쉽게 무시할 수 없게 됐다.

교황의 방북이 성사되면 역사상 처음으로 북한 땅을 밟는 교황이 된다. 지난 2000년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당시 교황 요한바오로 2세를 초청했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했다. 

교황 방북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가 복잡할 것으로 보인다. 비유럽 출신으로 처음 교황에 즉위한 프란치스코 교황은 트럼프의 반(反)이민 정책에 대해 공개 비판하는 등 그간 트럼프 정부와 껄끄러운 관계였다.

미국 대선 전인 2016년 2월에는 설전을 주고받기도 했다. 교황이 트럼프의 이민정책에 대해 “다리를 만들지 않고 벽만 세우려고 하는 사람은 기독교인이 아니다”라고 비난하자 트럼프는 “종교 지도자가 어떤 사람의 믿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것은 수치”라고 받아쳤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18일 로마 바티칸 교황궁 교황 집무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환담하고 있다./바티칸=뉴시스

트럼프 대통령은 2016년 당선 직후 프란치스코 교황의 미국과 멕시코 방문 때 미국 국경지대에서 미사를 집전할 것이라는 소식에 “교황은 아주 정치적인 인간”이라고 비난했다. 교황은 “그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인간은 정치적 동물’이라고 했기 때문에 나를 정치인이라고 하는구나.”라고 반박한 적이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후인 2017년 5월 바티칸을 방문해 전통적인 교황알현 외교적 의례를 무시하는 듯이 행동했다.

트럼프는 보수 성향의 개신교 복음주의운동이 활발한 미국 남부의 ‘바이블 벨트(bible belt)’를 핵심 지지 지역으로 삼고 있어 가톨릭의 진보파인 예수회 출신의 교황과는 생각에 차이가 있다.

특히 교황청과 북한이 교황 방북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대북제재 완화’등 압박 분위기가 흐트러질 경우 트럼프가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낼 수도 있다.

▲ 지난해 5월 24일 바티칸을 방문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프란치스코 교황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바티칸= AP/뉴시스 자료사진】

성염 전 주 교황청 한국대사는 19일 라디오 대담에서 “트럼프가 큰 숙제를 안게 됐다. 김정은이 교황의 손을 잡고 문제를 풀어버리면 공적이 다른 데로 갈 수 있다”며 “서둘러 대북 문제를 해결하거나 판을 깨는 양자택일을 해야 하는 입장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번 교황 면담의 주요 내용은 사전에 청와대와 바티칸 사이 협의를 거쳐 이례적으로 공개됐다.

윤영찬 청와대 국민소통수석은 교황이 문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방북 초청 의사를 전하면서 "김 위원장이 초청장을 보내도 좋겠느냐"고 하자 "공식 초청장을 보내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전했다.

교황은 이어 "초청장이 오면 무조건 응답을 줄 것"이라고 해 북한방문 뜻으로 해석됐다.

앞서 문 대통령의 유럽에서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설득 작업이 주춤거렸으나 교황이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힘을 실어주어 유럽 등 국제사회가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앞선 15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에게 프랑스가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으로서 대북 제재 완화에 힘을 실어달라고 요청했지만 마크롱은 CVID(완전하고 불가역적이고 검증가능한 비핵화)를 강조하며 완곡히 거절했다.

이날 미사가 열린 성당은 초대 교황 베드로가 묻힌 자리 위에 위치한 중앙돔과 발다키노(천개, 天蓋)를 기준으로 십자 형태인 대성당 앞쪽에서 거행됐다.

미사를 집전한 피에트로 파롤린(Pietro Parolin) 교황청 국무원장(추기경)이 한국말로 “교황님의 축복을 전합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위해 기도합시다.”라고 시작한 이후 라틴어로 진행됐다.

▲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가 지난 18일 로마 바티칸 교황궁 교황 집무실에서 프란치스코 교황과 환담을 마친 후 함께 이동하고 있다./바티칸=뉴시스

미사 안내도 한국어로 병기됐고 130여명의 한인사제가 공동 집전했다. 한국인 수녀와 수도자들도 많이 참석했다.

특히 주 교황청 대한민국 대사관(이백만 대사)가 초대한 로마 한인 21명으로 구성된 ‘안칠라 도미니(주님의 종) 성가대’의 성가가 돋보였다.

문 대통령의 세례명은 ‘디모데오’다. 서기 50~60년경 시리아 터키 그리스를 돌며 그리스도교를 세계적 종교로 퍼트린 바오로 사도를 따라 선교여행을 다녔던 애제자다.

‘가난의 성자’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이름을 받은 교황과 소아시아에 기독교를 퍼트린 디모데오의 한반도 평화를 위한 공동기도가 한반도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 남영진 논설고문은 한국일보 기자와 한국기자협회 회장, 미디어오늘 사장, 방송광고공사 감사를 지내는 등 30년 넘게 신문·방송계에 종사한 중견 언론인입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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