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인상주의 운동은 마네로부터 시작되어 모네에서 전형화되고 확장되었으며 피사로의 열렬한 믿음 속에 성장했다.

▲ 김선태 편집위원

점차 외연을 확대하여 쇠라의 점묘법을 잉태했고 르누아르와 드가에서 다양한 혁신과 변주를 낳았으며 고흐와 고갱의 하이브리드 스타일을 거치며 세잔에 의해 극복되기까지 현대 미술의 초석을 쌓았다.

한 세기에 걸친 이단아들의 투쟁

그런데 ‘인상주의’가 애초 조롱거리로 만들어진 용어인 탓에 인상주의자들은 이 명칭과 거리를 두려했다. 당장 마네부터 그랬는데 실제로 그의 작품 상당수가 사실주의 정신에 기초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는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처럼 마네의 작품이 작가인 그를 포섭해 인상주의자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 전설에 따르면 키프로스 왕 피그말리온은 자신이 만든 여인 조각상을 사랑하여 식음을 전폐했고 보다 못한 여신 아프로디테가 조각상에 생명을 불어넣어 왕과 결혼시켰다 한다.

▲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 알랭 드 보통 저, 김한영 역, 문학동네, 240쪽, 2013년 9월 23일.

마네에게 피그말리온의 조각상은 그의 대표작에 속하는 1882년 작품 ‘폴리-베르제르의 술집’이다. 잠시 그림을 살피면 캔버스 중앙에 파리의 고급 살롱 폴리-베르제르에서 일하며 ‘쉬종’이라 불린, 금발의 애교머리로 이마를 가린 영국인 술집 아가씨가 있다. 무표정하면서도 아름답고 온화한 그녀의 얼굴과 그녀 뒤에 자리한 귀티 나는 여인들이 대조를 이룬다. 중앙 상단에 하얗게 덧칠되어 시선을 사로잡는 거울이 있고, 이 모두가 특유의 파란 물감으로 연결되어 부드럽게 어울리며 술집에 생동감을 불어넣는다. 마네가 스스로 그림의 일부가 되기를 원하면서 드러내고자 한 것이 그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자신의 그림을 두고 마네가 말한 것처럼.

“나는 이런 생활방식을 좋아해. 살롱, 소음, 불빛과, 축제들을…, 그리고 그 색채를.”(『MANET』, 프랑스와즈 카생, 열화당, 145쪽)

▲ <폴리-베르제르의 술집>, 에두아르 마네, 1882, 캔버스에 유채, 96*130cm, 런던 코톨드 갤러리.

마네가 독창적 화풍으로 한창 이단아의 명성을 쌓던 1874년 그를 존경하던 드가, 르누아르, 세잔 등 비주류 화가들의 전시회에 하나의 작품이 출품되어 새 사조의 도래를 알렸다. 모네의 <인상, 해돋이>가 그것이다. 당시 모네는 파리에 갓 정착해 생-라자르 역에서 멀지 않은 아망 고티에의 구 화실을 얻어 매일 6시간씩 규칙적으로 그렸다. 형제처럼 지내던 르누아르가 출품작의 목록을 정리하면서 모네에게 “자네 그림 제목이 모호해” 하자 모네가 즉석에서 다음처럼 답했는데, 그로부터 인상주의라는 명칭이 탄생했다.

“그렇다면 바꾸지, ‘인상, 해돋이’라고.”(『MONET』, 소피 포르니-다게르, 열화당, 62쪽)

모네는 아미로테 호텔의 창문을 통해 이 그림을 그렸는데, 사람에 따라 누구는 터너의 영향을 누구는 요한 바르톨트 용킨트의 영향을 받은 그림이라 했다. 하지만 현재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에 보관된 이 그림이야말로 모네가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그 특유의 재능을 쏟아부은 대작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모네는 이 그림으로 자신이 진보라 확신했던 산업화의 물결을 자연 속에 녹이는데 성공했으며, 이를 위한 최상의 기술이 인상주의적 채색임을 증명했다.

에드가 드가 역시 평소 자신을 인상주의자라 생각하지 않았지만 그의 수많은 작품들은 인상주의 자체이거나 그 혁신의 산물이다. 이를테면 드가가 1890년대에 그린 풍경화들은 삭막하다 못해 을씨년스럽고 괴기스럽기도 하여 전통적인 풍경화에 대한 고정관념을 단번에 깨부순다. 숲은 적당히 채색되어 형체가 불분명하고 산과 들은 노란 먼지 속에 황량하며 나무와 길은 제대로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드가의 1969년 작 노르망디 풍경화를 보며 미술사학자 리처드 켄달(Richard Kendall)이 말한 “극단적인 단순성”에서 떠올릴 어떤 상념, 바로 이것이 드가가 원한 결과물일 것이다. 아무런 내막도 없고 아무것도 강조하지 않으며 고정된 주제가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인상주의가 이룬 혁신이기 때문이다.

고흐와 세잔, 아방가르드를 넘어 현대로

인상주의 이래 사람들은 그림에서 더 이상 획일적 해석과 주입된 지식을 떠올리지 않아도 되었다. 사람들은 그림에서 얻는 주관적 인상만으로 자신의 감상을 누리면 되었고 심지어 화가가 감추어둔 의도를 알 필요도 없었다. 회화의 혁명이 감상의 혁명을 낳은 것이다. 예컨대 고흐의 ‘밤의 카페’가 ‘밤새도록 문을 여는 카페’라는 뜻이며, 화가가 아래와 같은 의도를 가지고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을 감상자가 굳이 알아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밤의 카페’라는 그림을 통해 전달하려는 의미는 이거야. 카페는 사람들이 자신을 망치러 가는 곳이며, 이곳에선 미쳐버리거나 범죄를 저지르게 된다는 것. 어찌 보면 이 싸구려 술집에서 어둠이 행사하는 세력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지. 연분홍과 핏빛 진홍색, 적포도주색, 루이 15세 풍의 연한 녹색과, (…) 이 모두가 파리한 유황의 뜨거운 용광로 같은 분위기 속에 녹아들어 있단다.”(1888년 9월 9일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빈센트 반 고흐』, 생각의 나무, 288쪽)

▲ <밤의 카페>, 빈센트 반 고흐, 1888, 캔버스에 유화, 72.4*92.1cm, 미국 예일대 미술관

사람들은 종종 그림보다 화가의 삶에 자신의 처지를 감정이입한다.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아방가르드의 거장들이지만 세상을 회피한 고갱보다 세상에 대한 열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다 비극적 최후를 맞은 고흐에게 대중들이 슬픔으로 동조하며 더욱 열광하는 이유다. 당연하게도 그 열망이 저 불우한 네덜란드 화가의 그림 곳곳에 녹아들어 있는데, 다음과 같은 고흐의 탄식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눈앞에 펼쳐진 것을 정확하게 재현하려는 대신 나 자신을 더 강력하게 드러내기 위해 마음 내키는 대로 물감을 사용해. (왜냐하면) 이 어딘가가, 이 목적지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해도, 내게는 그것이 지극히 정상적이며 진실로 여겨지기 때문에.”(1888. 8. 6~11일 동생 테오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에서, 위 책)

시선을 돌려 보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 편』에서는 인상주의(후기 인상주의를 포함하여)가 사실주의나 자연주의를 한편 품고 한편 뛰어넘으며 19세기를 화려하게 수놓은 것으로 묘사되지만, 독자들은 그 모든 성과들이 폴 세잔의 업적에 비해 그다지 돋보이지 않는다는 느낌을 가질 것이다. 이 책에서 인상주의는 세잔을 준비한 과도기로 읽히고, 세잔은 인상주의의 한계를 뛰어넘어 거침없이 현대로 나아간 인물로 등장한다. 어떤 면에서 그와 같은 평가는 타당하다. 알랭 드 보통도 세잔을 현대미술의 개척자라고 칭송했다.

 

“세잔의 <생트빅투아르 산>은 때때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그림 중 하나로 기술된다. (…) 그의 화실이 있던 레 로브 언덕에서 보고 그린 산 이미지에서, 세잔은 관목들을 환기시키기 위해 구획을 나눠 색칠하는 방법을 썼다. 그것들은 다른 무엇보다 하나의 추상적 패턴을 형성하는 최초의 그리고 중요한 색채의 흔적이었다.”(『영혼의 미술관』, 68쪽)

1885년에 시작해서 1906년에 이르기까지 세잔이 여러 번 반복해 그린 이 연작 회화가 갖는 미술사적 의의에 대해 진중권은 더욱 정교한 감상평을 남겼다.

“이 그림들은 그가 인상주의의 영향에서 벗어나 저만의 언어를 구축한 후 원숙한 형태로 완성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 세잔은 하나의 산을 형태 공간 구조가 중첩된 모습으로 파악하고 개개의 단면을 벽돌처럼 쌓아올리는 식으로 화면을 구축해 나가는데, 그 방식이 공간을 단면들로 분해하여 처리하는 입체주의의 분석적 단계를 연상시킨다.”(『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 편』, 진중권, 휴머니스트. 286쪽)

피카소가 “그는 우리 모두의 아버지였다”고 말했듯이, 세잔은 과감하고 파격적인 시도를 통해 근대의 제약을 뛰어넘어 입체주의를 비롯한 현대 회화의 개척자가 되었다. 그럼에도 인상주의 회화들은 세월의 흐름과 무관하게 자신의 가치를 조금도 흔들림 없이 유지하고 있으며 화가 개개인의 인기도 여전히 식지 않고 있다. 왜 그럴까?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 편』 = 진중권, 휴머니스트, 378쪽, 2018년 4월 9일.

인상주의의 매력, 녹슬지 않는 치유의 힘

그 이유는 회화의 주제와 기법과 소재가 끊임없이 확장되어 왔음에도 대부분의 감상자들은 역사적으로든 유파별로든 단계나 우열을 가리며 보지 않기 때문이라 말할 수 있다. 특정한 그림에 대한 개개인의 해석과 느낌은 저마다 다르며 심지어 어떤 미술 작품에도 정해진 감상법은 없다. 19세기 회화에서 하나의 예를 찾아보자.

마르셀 프루스트 연구가인 유예진에 따르면 이 작가의 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1913∼1928)에는 1백여 명의 화가들과 3백여 점의 작품이 언급된다고 한다(「미술평론가 프루스트의 의미와 한계」, 유럽사회문화 19권 0호, 2017년. 이하 프루스트 관련 사실은 이 논문에 근거).

르네상스의 거장 지오토 디 본도네를 시작으로 14세기 고딕 화가, 르네상스 이탈리아와 17세기 네덜란드, 18~19세기 프랑스 고전주의·사실주의·살롱 화가들과 인상주의자들을 거쳐 20세기 상징파 레온 박스트와 삽화가 막심 데토마에 이르기까지 7백 년에 걸쳐 선정된 인물들이다.

여기서 이상한 점이 발견된다. 프루스트는 에밀 졸라처럼 소설가인 동시에 19세기 미술에 대한 뛰어난 비평가였다. 그런 그가 자신의 대표작에서 당대의 거장이던 세잔이나 현대 미술의 새 흐름을 주도하던 피카소와 마티스에 대해서는 거의 무심한 태도로 일관했는데, 심지어 이들 세 사람을 소설에서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논문에서 유예진이 이렇게 말할 정도다.

“프루스트 소설에서 브라크나 피카소 등의 입체주의 화가들에 대한 구체적 언급의 부재는 에두아르 마네, 클로드 모네, 에드가 드가 등 여섯 명의 인상주의 화가들과 그들의 작품들의 전방위적 활용에 견주면 입체주의에 대한 프루스트의 상대적 몰이해, 혹은 무관심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유예진은 프루스트가 “당시 미술계의 최신 동향을 무조건적으로 따르며 제작한 작품들을 비판”하기보다 “오랜 배움의 과정을 거친 후 튼튼한 기본을 소유한 채 완성한 작품”을 선호했으며, 프루스트의 주 관심사가 “화가의 회화적 표현 방식이나 기법보다는 회화작품의 소재(인물, 풍경, 분위기 등)”에 있었다고 주장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전통적인 사실주의적 서술 방식을 완전히 탈피함으로써 명성을 얻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회화에 대한 프루스트의 취향이 그와 어울리지 않게 현대적 경향에 무심했다는 점이 놀랍기까지 하다.

니체는 “우리는 근육으로 음악을 듣는다”라고 썼다. 음악이 어떻게 우리를 치료하는데 도움을 줄까? 음악은 공기 중에서 진동하면서 변화하는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이 우리에게 청각적 또는 감정적 영향을 주어 아름다움을 느끼게 하고, 우리의 가슴을 덥히고, 우리의 정신을 고양시켜, 우리 몸에 긍정적인 생리적이고 물리적인 반응을 일으킨다.

미술도 마찬가지로 작용한다. 비교하자면 음악은 우리의 귀와 근육을 치료하며 미술은 우리의 눈과 오감을 치료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알랭 드 보통이 지적한 대로 미술은 우리의 숨은 기억과 희망과 슬픔을 일깨우며, 찌그러진 삶으로부터 균형을 회복시켜주고, 우리 자신을 이해하도록 돕고, 그림을 감상한다는 사실만으로 행복을 느끼게 해준다.

현대 미술의 모든 매력에도 불구하고 특별히 인상주의는 21세기에도 여전히 살아남아 우리를 매료시킨다. 니체의 어법으로 말하면, 그 자체로는 번번이 파멸하기 쉬운 우리의 삶에 힘을 불어넣어 진리로 나아가도록 북돋는 힘 가운데 하나가 된다.

그 힘을 하필 인상주의 회화에서 얻는 건지 묻는다면, 실은 회화에 대한 필자의 취향과 그들이 일치하기 때문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다. 난처한 변명이지만 사람에 따라서 다른 수많은 회화에서도 같은 힘을 얻을 수 있음을 부인하지 않으면서.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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