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태의 신간서평

[이코노뉴스=김선태 편집위원]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에서 회화 작품을 감상하지만 작가이자 문화비평가인 알랭 드 보통은 ‘치유의 힘’을 강조한다.

▲ 김선태 편집위원

우리는 미술이 우리를 도와 더 나은 삶, 더 나은 자아로 이끌어준다고 믿기 때문에 선호하며, 따라서 미술은 믿을 만한 기초 위에서 유용한 경험을 이끌어내는 도구가 된다는 설명이다. 우리가 처한 여건이 제한적이라 가정할 때, 과연 어떤 그림을 선택하면 우리 자신을 더 잘 치유할 수 있을까?

더 나은 삶과 자아로 이끄는 도구

알랭 드 보통은 그 대답으로 예술이 제공하는 치유 능력에 주목할 것을 권한다. ‘기억을 교정하는 능력’은 아마도 가장 중요하다. 보통에 따르면 “예술은 경험의 결실을 기억하고 재생할 수 있게 해준다.” 화가의 섬세한 손길을 거쳐 탄생하는 회화는 캔버스 위의 화면 하나만으로 우리가 잊고 있던 무언가를 소중하고 아름다우며 의미 있는 것으로 되살려내는데, 보통은 이를 ‘단순화의 힘’이라 부른다.

▲ 『알랭 드 보통의 영혼의 미술관』 = 알랭 드 보통 저, 김한영 역, 문학동네, 240쪽, 2013년 9월 23일.

예를 들어 우리는 종종 각자의 방에 한 점의 그림을 걸어둔 다음 거기에 자신만의 세계를 투영시켜 놓고 필요할 때 꺼내보며 미소 짓곤 한다. 영화 ‘마담 프루스트의 비밀 정원’에서 나탈리 프루스트 여사가 폴 마르셀에게 한 말이 꼭 이 순간을 가리킨다고 봐도 좋을 것이다.

“나쁜 추억은 행복의 호수 아래 가라앉게 마련이다.”

보통에 따르면 미술은 희망의 조달자이자 슬픔의 연마자다. 먼저 미술은 이상화된 이미지를 통해 좋은 것을 애써 과장하여, 고난에 빠진 감상자가 희망을 증류하고 농축하게 해준다. 다음으로 미술은 일상의 단면에서 숭고함을 부각시켜 감상자로 하여금 슬픔 속에도 우아함을 잃지 않도록 다독여준다. 때로 그 숭고함은 인생을 걸 용기를 의미한다. 얼마 전 작고한 허수경 시인의 수필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다.

1923년에 태어난 스위스 시인 그베르더는 2차 대전의 참혹상을 본 뒤 모든 군대 권력을 반대하기로 결심했고, 그에 따라 병역 의무까지 거부하는 바람에 핍박을 받아 견디기 힘든 나날을 보냈다. 유부남이었지만 열 살 연하의 연인을 만난 그는 1952년 애인과 함께 반 고흐가 머물렀던 프로방스의 아를로 갔다. 거기서 그베르더는 “이 지상을 떠나기 전에 쓸 수 있는 아름다운 시를 쓰고는 자살했다.”(『너 없이 걸었다』 중 「뮌스터의 푸른 반지」, 난다) 그 자살은 좌절이 아니라 자신만의 길을 고수하고자 하는 슬픔의 승화였고, 그 배경에 고흐의 삶과 그림에서 비롯한 깨달음이 있었음을 알기란 어렵지 않다.

치유제로서 미술에 대한 알랭 드 보통의 설명에서 하나 더, ‘미술은 감각을 일깨우는 도구’라는 대답을 살펴보자. 우리는 종종 일상에 매몰되어 사물의 진정한 의미나 가치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감각을 잃기 쉽다. 그럴 때 미술은 주위의 선입견을 뛰어넘는 숱한 아이디어를 통해 그 위험에서 우리를 구해준다. 회화의 역사에서 이런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데, 사례 하나로 살펴보자.

“캔버스에 윤곽 대신 빛의 색깔을”

그림에 빛의 성질을 반영하는 문제는 미술사상 오랜 난제였다. 조지프 말로 드 윌리엄 터너(1775-1851)는 에두아르드 마네(1832-1883)보다 두 세대를 앞선 화가였다. 그의 후기 풍경화들은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빛의 묘사에 집중해 일체의 자연을 빛 속에 녹이다시피 한 것으로 유명하다. 이런 기법을 터너가 맨 먼저 사용한 것은 아니다. 터너는 입문 당시 풍경화의 대가인 필립 제임스 드 루테르부르를 흠모해 그의 그림을 충실하게 모사했다.

루테르부르의 화법을 터득한 터너는 스승의 그림에서 실제로 자신이 감탄한 부분을 파헤쳤는데, ‘구름과 비에 얼비친 햇살의 효과를 표현한 방식’이 그러했다. 터너는 이 기법에 집중하여 머지않아 이 분야의 대가가 되었다. “우리가 보통 새로움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어느 선배의 작품에서 하위 주제였던 것을 현명하게 부각시킨 사례일 수 있다.”(알랭 드 보통, 위의 책 188쪽) 말하자면, 누구나 자기가 보고 싶어 하는 것을 더 잘 보는 법이다.

▲ <전함 데메테르호>, 조지프 말로 드 윌리엄 터너, 1839, 캔버스에 유화, 91*122cm, 런던 국립 미술관.

빛의 처리를 둘러싼 터너의 기여는 충격적으로 강렬해서 후일 사람들은 그를 ‘인상주의라는 말이 있기 전에 존재한 인상주의자’라고 불렀다. 그도 그럴 것이 터너의 기법은 정통 고전주의 회화에서 사용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 정신에도 위배되었기 때문이다. 고전주의 미술에 대한 회의는 일찍부터 있어 왔는데, 이 점을 문학 작품에서 날카롭게 표현해 낸 작가가 프랑스의 문호 발자크다. 그는 1831년에 쓴 단편 「미지의 걸작」에서 주인공 프렌호프를 통해 기존 화단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공격했다.

“자네들은 말이야, 형상을 정확히 그려내고, 각각의 것을 해부학의 법칙에 따라 제자리에 놓으면 모든 것을 다 했다고 생각한단 말이야! (…) 예술의 임무는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표현해내는 것이야! 자넨 비열한 모방자가 아니라 시인이란 말일세!”

발자크는 이 글에서 서구 회화의 이상형을 제시했다. 르네상스의 영웅 라파엘을 숭배한 그가 딱히 특정 유파를 염두에 둔 것은 아니지만 주류 미술의 한계를 지적했음은 명백하다. 하지만 발자크는 자신의 이상이 당대에 실현될 수 없음을 알았기에 주인공 프렌호프가 좌절하여 자살하는 것으로 소설을 마무리했다. 이 한계는 30여 년이 지나 새롭게 등장할 일련의 화가들에 의해 재조명되는데 그 선두에 인상주의자들이 서 있었다. 인상주의자들은 정확히 다음과 같은 발자크의 지적을 좇아 고전주의 미술에 반기를 들었다.

“인간이 대상에 대한 빛의 효과를 이해하는 방법이 바로 선(線)이라네. 하지만 모든 것이 가득 찬 자연에는 선이 없다네. (…) 빛의 분배만이 육체에 외관을 부여하지! 그래서 난 윤곽선을 계속해서 그렸고, 그 위에 암영을 퍼뜨려 윤곽과 바탕이 서로 만나는 곳을 정확히 짚어낼 수 없게 만들었네.”

회화에서 빛의 중요성에 대한 자각, 채색에서 덧칠의 중요성을 반영한 화법이 일반화되기까지는 더욱 오랜 시간이 걸려야 했다. 소설이 발표되고 70년가량 지난 뒤 화가 에밀 베르나르로부터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세잔이 흥분을 못 이겨 가슴을 치고는 자신이 바로 그 소설의 주인공 프렌호프라면서 감동에 겨워 눈물을 쏟아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미술사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

고전주의에 반대한 인상주의의 기초는 ‘색은 곧 빛’이라는 동일률이다. 이로부터 두 가지 인상주의 기법이 나오는데, 인위적인 실내조명을 거부하고 실외의 자연광 아래서 그리는 ‘플랭 에르’, 물감이 마르기 전에 다른 색의 물감을 덧칠하며 그리는 ‘알라 프리마’가 그것들이다. 이 기법들에 따라 그려진 그림은 사진 같은 정교함이나 매끄러운 윤곽 대신 찰나의 인상이나 몽환적인 장면을 낳는다. 이는 당시까지 사람들이 회화에 대해 믿고 있던 신념을 거부하는 일이므로 화단은 물론 대중들의 거센 비난에 직면해야 했다.

인상주의 기법에 대한 주류 화단의 가장 그럴듯한 비판 중 하나는 그림을 흐릿하게 만들어 대상의 미를 제대로 구현해내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상주의자들은 결코 미녀를 그려낼 수 없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르누아르가 1876년에 그려낸 <앙리오 부인>이 명백한 증거다. 화가가 이 여인의 아름다움을 어떤 식으로 화폭에 옮겼는지 인상주의 비평의 대가인 소피 모네레의 감상평을 보자.

“차분한 머릿결과 우윳빛 살결의 앙리에트 앙리오를 위해 르누아르는 의상과 목걸이와 배경을 부드러운 색조 속에 녹아들게 함으로써 이 처녀의 또랑또랑한 시선을 더욱 두드러지게 만들고 있다.”(『RENOIR』, 소피 모네레, 열화당, 74쪽)

▲ <앙리오 부인>, 르누아르, 1876. 캔버스에 유화. 66*50cm. 워싱턴 국립미술관.

그럼에도 인상주의 작품을 보노라면 그 특유의 무작위로 덧칠되어 마무리가 덜 된 듯한 윤곽선에 당황할 때가 많다. 이 작품들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방법을 두고 당시에도 설왕설래가 있었지만 미술사학자 곰브리치의 설명은 정곡을 찌르는 것으로, 오늘날까지도 최상의 감상법으로 추천할 만하다.

“인상주의 그림을 감상할 때 몇 걸음쯤 뒤로 물러나서 보면 혼란스러운 색점들이 갑자기 우리의 눈앞에서 제자리를 차지하고 생기를 띠게 되는 기적과 같은 기쁨을 맛보게 된다는 사실을 대중들이 알기까지는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했다. 이러한 기적을 성취하고 화가가 실제로 겪었던 시각적 경험을 관객에게 전달해주는 것이 인상주의자들의 진정한 목표였다.”(『서양미술사』, E. H. 곰브리치, 예경, 522쪽)

인상주의자들은 고매한 이상이 아닌 저잣거리 삶을 소재로 삼는다는 사실주의의 신념을 포기하지 않았으며 전시회에서 거듭 퇴짜를 맞는다고 미술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 관념을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그로 인해 인상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신념을 성공으로 이끌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그것이 역사의 필연이며 단연코 근대 미술의 혁명이기 때문이다. 곰브리치는 위의 설명에 이어 그들의 용감한 전진과 값진 성취를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이 미술가들이 새롭게 가지게 된 자유와 능력에 대한 감회는 실로 가슴벅찬 것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그들이 직면해야 했던 수많은 조소와 적의를 보상해주고도 남음이 있었다. 갑자기 세계 전체가 회화를 위한 적절한 주제들을 제공하였다. (…) ‘품위 있는 주제’니 ‘균형 잡힌 구도’니 ‘정확한 소묘’니 하는 과거의 낡아빠진 허깨비들은 이제 모두 사라져버렸다. 이제 화가들은 그가 무엇을 어떻게 그릴지 고민할 때 오직 자기 자신의 감각에 대해서만 책임지면 되었다.”

한마디로 인상주의의 도래는 미술 역사상의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다름 아니었다. [이코노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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